050. 다시 만났네요
“….”
“…….”
소리 한 줌 없는 하인켈의 집무실.
그곳에선 라인란트 공작이 서류를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장벽에서 본가로 돌아오기까지 꼬박 이틀.
당장 방으로 돌아가 침대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지만 이곳은 천하의 라인란트.
휴식이란 말과는 거리가 먼 기사가문이다.
“네크로맨서 종교집단이라니, 좌시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주변 영지에 공문을 보내고, 감시를 철저히 하라 일러주게. 이렇게까지 큰 조직이라면, 북부에도 그 끄나풀이 있을 테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인켈의 지시를 받은 버크만이 곧바로 서재를 나섰다.
‘일처리가 빠르니 그나마 다행이네.’
아키몬드 교단.
내 이름을 팔아 대륙 곳곳을 들쑤시는 버러지들.
그들이 내 고향인 북부에서 활개 치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기에, 난 내심 안도했다.
“널 장벽으로 보낸 것은 몸을 숨기라는 뜻이었는데, 그곳에서도 큰일을 해내는구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 네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인켈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만약 땅굴을 통해 침입하는 그들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장벽은 붕괴했을 테니까.
“이 정도면, 굳이 시간을 들여 시험할 필요는 없겠군.”
그렇게 말한 하인켈이 서재 책상 위에 무엇인가를 올려놨다.
“이건…?”
그곳에 놓인 것은 라인란트의 문양이 조각된 은패였다.
“네가 기사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는 가문의 인증이다. 제국 기사시험의 응시조건이기도 하지.”
제국 기사시험.
각 국가에서 시행되는 기사시험 중 가장 큰 권위를 가진 시험이다.
‘대륙 공인으로 정식 기사 작위를 부여할 생각이군. 그렇다는 말은….’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파견임무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뜻.
드디어 일 다운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응시하거라.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거다.”
“알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고 난 뒤, 하인켈은 얼마간 더 내가 건넨 보고서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기사시험 후 네가 소속될 기사단에 대해서다만….”
“……?”
거기까지 말하더니 하인켈의 말이 끊기고, 잠시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아니, 문제는 침묵이 아니다.
중요한 건 내게로 향해지는 이 노골적인 시선들!
“아버지. 그리고 델라인.”
“커, 커흠!”
“왜, 왜 그래?”
서류를 둘러보거나 창밖을 보는 척하며 수십 번이나 날 흘끔거리는 두 사람을 불렀다.
흠칫한 듯 하인켈과 델라인이 황급히 딴청을 부렸다.
“아까부터 궁금하던 건데,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음? 무, 무슨 말이냐?”
“아무것도….”
“그럼 아까부터 왜 그렇게 흘끔거리는 건데요?”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그냥 빨리 말을 해라.
진짜 답답해 죽겠네.
내가 정면으로 말하자, 하인켈이 손가락을 뻗어 날 가리켰다.
정확히는, 내 어깨에 두른 망토를.
“…그 망토 어디서 손에 넣었느냐?”
“망토요?”
그렇게 되물은 난 큰까마귀 기사들이 내게 준 망토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주던데요? 가는 길 추울 거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걸 들은 하인켈과 델라인은 굉장히 대수로운 표정이었다.
“줬다? 천하의 까마귀들이, 너한테?”
“예.”
“뭐, 거기 기사를 두들겨 패거나 해서 뺏어온 게 아니고?”
“아니, 내가 무슨 깡패야? 그냥 받아온 거라니까?”
영문을 모른 채 그렇게 말하자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하인켈과 델라인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잠깐만, 설마…?”
이윽고 뭔가 떠올랐다는 듯, 하인켈이 질문을 바꿨다.
“큰까마귀 기사단에게 있어, 그 망토가 뭘 뜻하는지 알고 있느냐?”
“의미…요?”
그렇게 되물은 난 코락스에게 전해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냥 방한 장비라고 들었습니다만.”
“쿨럭-!”
그 말에 옆에 있던 델라인이 사레가 들린 듯, 기침 소리를 냈다.
“…방한 장비라고 하면서, 까마귀들이 네게 그 망토를 건넸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델라인.”
“예 아버지.”
“장벽에 연락하거라. 급히, 신속하게.”
한숨 쉬는 하인켈과는 다르게, 델라인은 내 말을 들은 이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아직 서임식도 하지 않은 마당에, 벌써부터 눈독 들이지 말라고!”
반쯤 호통에 가까운 그 말에 킥킥거리던 델라인이 서재 밖으로 나갔다.
“코락스 단장. 아무리 장벽을 위해 한 일이 크다지만,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칠 줄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하인켈을 보며 내 표정은 점점 더 의문으로 물들어갈 뿐이었다.
…아니 진짜, 뭔데?
***
“뭐긴 뭐야, 까마귀들이 너 점찍은 거지.”
“점?”
오랜만에 만난 아린과 듄켈에게 인사하는 와중에도,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워서도 내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그 해답을 듣게 된 건 저녁 식사 시간.
같이 밥이나 먹자며 내 방을 찾아온 델라인의 입에서였다.
“깃털 망토는 큰까마귀 기사단의 정식 기사들에게만 주어지는 물건이야.”
“그 망토가?”
“그래. 떠날 때, 코락스 단장이 직접 너한테 망토를 둘러줬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까마귀들이 보인 반응들이 새록새록 기억났다.
“그럼 그게…?”
“장벽 기사들의 서임식이야. 단장이 직접 망토를 둘러주고, 지켜보는 기사들이 검을 들어 그 증인을 자처하지.”
“그리고 난 그 망토를….”
“어깨에 두른 채로 본가까지 걸어온 거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어떻게든 머리를 굴렸다.
자,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지금 큰까마귀 기사단이, 날 기사단에 넣겠다고 한 거지?
나한텐 아무런 말도 없이?
이건….
이건……!
“이건 날치기 인사잖아 이 미친 새끼들아!?”
“푸하하하하하-!”
그제서야 머릿속에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퍼즐들이 다시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는 나와는 달리, 델라인은 지금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댔다.
“아니, 웃지 말고 얘기를 해봐! 나 그럼 다시 장벽으로 가야돼?! 안 된다고!”
“하하하! 으하하하하-!”
그렇게 한참을 더 웃어댄 델라인이 눈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날 안심시킨 델라인이었지만, 솟아오른 입꼬리는 도통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진짜 대단하긴 하다. 클라인.”
“뭐가?”
뾰로통한 얼굴로 빵을 입에 문 내게 델라인이 말했다.
“모르나 본데, 큰까마귀 기사단에게 망토를 받은 귀족은 제국 역사상 네가 처음일 거다.”
“…그래?”
미심쩍은 표정을 한 채 되물었지만, 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버지나 나조차도 그 망토를 받지는 못했어.”
“뭐야, 상급자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들 친구 취급이잖아?”
“타고난 지위로 군림하는 것보다 곱절은 더 어려운 거지.”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장벽에서 그 개고생을 한 게 헛수고는 아니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냥 고맙다는 말 하나면 될 텐데, 뭘 그리 거창하게 난리를 치는 건지.”
나 하나 떠난다고 우르르 몰려온 그들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여튼 기사란 것들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가 없는 족속들이다.
***
장벽에서 돌아온 뒤 일주일.
연무장에 나와 있는 내 최대의 관심사는 맞은 편에 선 데스나이트였다.
쿠르르르….
처음으로 만들어낸 데스나이트, 헥토르.
설계 자체는 흠잡을 곳이 보이진 않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혼이 너무 약해.”
헬리안의 아들, 헥토르의 혼을 뽑아 종속계약을 통해 만들어낸 데스나이트.
그동안 원 없이 굴려댄 반동인지, 마력량이 현저하게 감소 된 상태였다.
‘이대로면 복구를 시켜봤자 악화될 뿐이니, 차라리 없애고 새로 만드는 게….’
움직이지 않는 데스나이트를 보며 내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클라인 도련님.”
연무장 한편에서 나타난 것은 집사장 버크만.
데스나이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처음인지, 연무장에 선 헥토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오늘은 일 없다고 하지 않았어?”
헥토르의 영체를 해체하며 그렇게 묻자 버크만과 함께 온 델라인이 그 말을 받았다.
“갑자기 일이 생겨버렸어. 그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
“중요한 일이라니?”
내가 그렇게 묻자 능글맞게 웃던 델라인이 내게로 다가와 내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아니, 요즘 왜 이래 닭살 돋게?
“정확히 말하자면, 중요한 손님이 찾아온 거지.”
“……손님?”
한참만에 되묻는 내 말에 답한 것은 버크만이었다.
“예. 갑작스럽게 본가에 손님이 찾아온 듯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건데, 기계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절도있는 예법이다.
귀족 예법서가 사람으로 변한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난 천천히 그의 말을 곱씹었다.
손님.
즉, 친구나 지인 같은 귀족가의 아는 사람이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내 의문을 한층 더 가중시켰다.
‘아니 잠깐, 내 손님이 왔다고? 델라인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인생 중 가장 당혹스러운 상황에 버크만을 보며 말했다.
“날 찾아올 손님이라는 게 있긴 있나?”
“도련님.”
“너도 알잖아. 나 친구 없는 거.”
말하면서도 울적해지기는 한데, 당연한 얘기다.
아키몬드의 망령이 씌웠다는 소문이 파다한 데다가, 뒷배조차 없는 공자.
친분을 쌓아 이득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근데 무슨 손님이….”
“한 명 있잖아.”
그렇게 말한 델라인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큭큭 거렸다.
이상한 그의 행동에 얼굴을 찌푸릴 때 즈음.
“클라인 공자님!”
버크만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 밖의 상황이었는지, 등 뒤를 바라본 버크만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공녀님.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공자님께서도 준비하실 시간이 필요하십니다. 역시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는 것이….”
이어지는 버크만의 주의에 목소리의 주인이 조금 움츠러든 듯 보였다.
“아,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그만….”
집안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맑은 미성(美聲).
목소리를 들어보니 내 또래 같은데, 그래서 더 의문이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버크만의 등 뒤에서 천천히, 작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
흑요석처럼 검고 투명한 눈.
허리까지 내려오는 살짝 파도치는 흑발.
그와 대비되듯 새하얀 피부.
조각을 깎아 만든 듯한 청아한 얼굴의 소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클라인…!"
은은하게 피어나는 미소에 그것을 보던 델라인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본 난, 그제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시엘 라 아일라시스.
제국 3대 공작 중 하나이자 제국 마탑의 주인.
명망 있는 마법사 가문인, 아일라시스 공작가의 영애.
그리고 일곱 살 때 처음 만났던, 내 정략결혼 상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