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다시 만납시다
장벽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클라인 공자의 유배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카앙-!
연습장에 꽂힌 수십 개의 병장기.
하나같이 깨지고 부러진 무기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연무장에 선 클라인과 이안은 계속해서 검을 나누고 있었다.
“좋아, 좋아! 좀 더 들어와 보란 말이야!”
카가각-!
찔러 들어오는 클라인의 검을 비트는 것과 동시에 이안의 발차기가 날아온다.
평범한 기사였다면 여기서 거리를 벌려 다음 검격을 준비할 터.
그렇지만 그는 달랐다.
콱!
왼손에 숨겨둔 단창을 위로 치켜세워 이안의 발차기를 뒤틀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채 안쪽으로 파고들어, 이안의 정면을 베어간다.
“어딜!”
놀라운 엇박자 연계였지만, 상대는 천하의 이안 라인란트.
그는 자신의 곧바로 발에 얽힌 단창을 낚아채더니, 그것을 제자리에서 회전시켜 클라인의 돌진을 막아냈다.
마치 창이 공중에서 스스로 돌아가듯 기괴한 광경이었다.
“이게 어딜 봐서 검술입니까?! 곡예사도 아니고!”
“무도에 편견을 갖다니,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그 말과 함께 공중에 떠오른 단창이 내게로 날아왔다.
머리를 향하는 정면 경로.
피하려 몸을 트는 순간 다음 동작으로의 연계가 불가능할 터.
“진짜 저게 어딜 봐서 장님이야!”
그렇지만 클라인 공자는 그것을 피하는 대신,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직-!
단단한 물체를 꿰뚫는 파열음.
공중에 떠오른 스켈레톤의 팔이 날아드는 단창을 막아냈다.
“어어!? 비겁하게 대련에서 사령술이냐!”
“편견을 갖지 말라면서요? 그럼 기술에도 편견을 갖지 말아야지!”
“어디서 되지도 않는 궤변을?!”
카앙-!
이미 두 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두 검사의 대결.
훈련에 한창이던 기사들과 교대근무를 마친 뒤 휴식을 취하던 감시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이안 님 솜씨는 소문으로밖에 못 들었는데….”
“상상 이상이군.”
이안이 클라인에게 사용하는 것은 검뿐만이 아니었다.
양손검, 단창, 장창.
망치나 플레일, 심지어는 연무장 구석에 꽂힌 깃발까지.
그는 지금,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무기로 삼은 채 클라인을 압박해대고 있었다.
“이게…!”
그렇지만 기사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이안의 무예가 아니었다.
카앙-!
이안이 든 단창에는 같은 단창으로.
그가 새롭게 드는 무기와 완전히 같은 것을 사용하는 클라인은, 이제 이안의 검술을 완벽하게 따라 하고 있었다.
“공자님 나이가 몇이라고?”
“열다섯.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다.”
무기 하나를 완전히 숙달하는 데에도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클라인 공자는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저 이안 라인란트의 검술을 모조리 재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저분이 제때 사이클을 받았다면….”
“후계자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게 기사들의 탄식 속에서 얼마나 더 대련이 이뤄졌을까.
“흐아압-!”
이안의 검에 마력이 실리기 시작하고,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격이 클라인에게 쇄도했다.
“마력 안 쓴다더니?!”
“너도 사령술 썼잖아! 이정도로 퉁 쳐주는 걸 다행으로 알아!”
그렇게 말하는 사이, 이안의 검은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
그렇지만 그것을 보며 클라인은 되려 눈을 빛냈다.
카앙-!
마력을 머금은 이안의 검을 막아낸 검은 갑옷의 기사.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안의 등 뒤에 나타난 그림자가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뭐야, 그 새 하나가 더 늘어난 거야?!”
처음으로 이안의 눈에 당혹이 일었다.
몸을 틀어 등 뒤로 쏟아지는 검격을 피하는 이안.
“정면이 열렸습니다, 백부님!”
그렇지만 클라인은 그 짧은 순간 나타난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파악-!
곧바로 이안의 몸을 올려 차 공중에 띄워냈다.
‘이안은 땅의 진동과 소리로 상대를 감지한다. 말인즉, 공중에 띄워놓으면 탐지수단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소리.“
거기다가 발판이 없으니, 피하는 것도 불가능할 터.
이대로 두 데스나이트의 검이 들어간다면, 클라인의 승리였다.
“헥토르, 레이븐!”
공중에 뜬 이안을 향해 두 데스나이트가 자세를 잡았다.
마치 거울에 비친 듯, 똑같은 자세.
마력 배열과 파장을 서로 공명시켜, 위력을 최대로 끌어 올린다.
그렇지만.
“이 녀석아. 당연히 일부러 열어준 거지!”
부웅-!
희희낙락한 이안의 목소리와 함께 클라인을 향해 검격이 쏟아졌다.
웅혼한 이안의 마력에 맞서는 두 데스나이트의 합격기.
키이이잉-!
서로 다른 두 기술이 맞부딪혀, 쇳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것이 임계에 다다른 순간.
쿠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연무장 전체를 휘어잡았다.
“으억?!”
“진짜 미치겠네, 연무장을 통째로 박살 낼 셈이야?!”
연무장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풍압이 주변에 쌓인 눈을 순식간에 걷어냈다.
“…에이, 이번에도 실패네.”
그 속에서 들려온 볼멘소리와 함께 먼지가 걷히고, 대련의 결과가 일목요연하게 나타났다.
데스나이트 한 기의 상반신은 완전히 날아갔고, 다른 기사 역시 두 팔이 날아간 상태였다.
술자인 클라인 역시 기진맥진.
그렇지만, 흡족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는 이안에게는 작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하아….”
온 힘을 다했는데도 흠집조차 낼 수 없다니.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 쉰 클라인은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졌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열다섯 번째 대련이자 마지막 대련이 종료.
전적은 15대 0.
이안의 전승이었다.
***
“이번에도 연무장 청소는 니가 하는 거다.”
“압니다. 아니, 어떻게 한 번을 못이기지?”
가쁜 숨을 추스르는 속도가 저번에 비해 월등히 빨라졌지만, 그것을 기뻐할 겨를은 없었다.
한 번이라도 검이 닿으면 내 승리, 패배 선언을 하면 내 패배.
그런 핸디캡에 사령술까지 사용했음에도, 난 마지막까지 그를 이길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마지막에 던진 마력 동조도 실패했지. 역시 출력 차이 때문인가….’
너덜너덜해진 헥토르의 소환을 해제하며 생각에 잠겼다.
마력량이 단장급 기사에 맞먹는 레이븐과는 달리, 헥토르는 평기사 수준.
다른 출력을 지닌 두 마력을 억지로 동조했으니, 과부하가 걸리는 건 당연하겠지.
그 반동으로 레이븐의 두 팔도 터져나갔으니….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야 클라인.”
“뭐요.”
“이것 좀 어떻게 해 봐!”
이안의 말에 상념에서 벗어나 그를 보았다.
데스나이트, 레이븐이 계속해서 이안에게 발차기를 먹이고자 다리를 휘적거리고 있었다.
두 팔이 없는 기사갑옷이 발을 휘둘러대는 꼴이라니.
이건 뭐 코미디도 아니고….
“너 안 돌아가고 뭐 하냐? 끝났다니까?”
- 아니, 아직이다.
그렇게 말하며 레이븐이 다시 이안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난 각인을 발동시켜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 내 싸움을 막아서는 것인가?
“싸움은 개뿔, 너 지금 팔 두 짝이 다 날아갔다니까?”
-…?
레이븐은 그제야 자기 상태를 파악한 듯, 허전한 자신의 양어깨를 번갈아 보았다.
- …….
그렇게 잠시 말이 없던 레이븐이 한참만에 한다는 소리가….
- 난 원래 팔이 없었어.
“지랄하고 있네!”
깡-!
들고 있던 검으로 레이븐의 투구를 후려치며 소환을 해제했다.
진지한 목소리로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해대는 레이븐을 보니, 뒷목이 절로 당겨왔다.
“정상인이 어떻게 한 명이 없냐 한 명이….”
그렇게 앓는 소리를 내던 사이, 이안은 연무장에 꽂혀있던 검 중 하나를 뽑으며 기사들에게 외쳤다.
“이 칼 내가 갖는다!”
“무기고에 더 좋은 검이 널렸는데, 굳이 그걸 가져가십니까?”
흠집이 즐비한 검을 보며 기사 중 하나가 그렇게 물었다.
“보름 동안 무기고에 있는 건 대부분 써 봤는데, 이게 제일 낫더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가 허리춤에 찬 검을 보았다.
15일간 나와 대련하며 한 번도 부러지지 않은 검.
이안은 그것이 썩 맘에 든 듯, 뿌듯한 표정을 한 채 내게 다가왔다.
“내가 가르치긴 했지만, 설마 전부 재현해낼 줄은 몰랐다.”
“타고난 덕분이죠. 뭐,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노력도 했고, 절박하기도 했지만 부수적인 것이다.
이안이 뱉어내는 수십 수백 가지의 검술을 익힐 수 있던 가장 큰 이유.
내가 지닌 능력이었다.
“하여튼 끝까지 건방져 가지곤.”
“백부님처럼 게으른 것보단 낫죠.”
그렇게 한 차례 서로 악담을 주고받은 나와 이안은 이내 마주 웃어 보였다.
“기술적으로는 내가 더 가르칠 게 없다. 나머진 실전에서 배워.”
“그래야죠.”
스승을 자처한 것 치고는 퍽 무책임한 한 마디.
그렇지만 난 기꺼이 그리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안이 날 보호하는 것은 장벽에서일 뿐.
이제 각자 갈 길을 가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백부님은 어디로 갑니까?”
“플리시안.”
대륙 동부에 위치한 무역국이자,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의 고향.
제국과 함께 마법 연구기관, 마탑을 보유한 유일한 국가이기도 했다.
“멀리 가시네요.”
“제국의 끄나풀들이 안 보는 사이에 최대한 멀리 내빼야지. 그리고….”
“그리고?”
내 되물음에 이안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쪽에서 슬슬 구린내가 나고 있어서 말이야.”
호승심 가득한 악동과 같은 얼굴.
‘조만간 플리시안 쪽에서 일이 터지겠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이안이 내게 주먹을 내밀었다.
“…뭡니까? 또 싸우자고요?”
“인사 모르냐 인사! 다음에 또 보자고! 이놈이 끝까지 눈치 없게?!”
“푸하하핫-!”
내가 짐짓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자 곧바로 이안의 호통이 들려왔다.
“기회가 되면 또 보죠.”
그렇게 말하며 그의 주먹에 내 주먹을 갖다 댔다.
“죽지 마라.”
“백부님이야 말로요.”
그렇게 말하자 킥킥대던 이안이 등을 돌렸다.
향하는 방향은 동쪽.
잠시 동안의 휴식은 끝났으니, 그는 다시 방랑하는 맹인으로 돌아갈 터였다.
“자 그럼, 나도 슬슬 가야지.”
그렇게 말하며 난 연무장 한편에 놔둔 짐가방을 들었다.
배낭 가득 들어찬 건량에 야영 장비.
…그리고 얼음성에서 가져온 ‘그것’ 까지.
처음 올 때보다도 훨씬 무거워진 짐이었지만, 그것을 드는 내 몸은 훨씬 가벼웠다.
“아무 전초도 없이 떠나려고 하시는군요. 두 분 다.”
배낭을 메려고 하던 날 멈춰 세운 것은 코락스의 목소리였다.
“들어올 때 온갖 난리를 치고 왔으니, 나갈 때는 조용히 가야지.”
“이미 늦었습니다.”
코락스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큰까마귀 기사단의 기사들 전부가 날 보고 있었다.
“뭐야, 나 더 있어야 돼?”
“그건 아닙니다.”
“그럼 뭔데 다 모여있어?”
영문을 모른 채 그렇게 말한 내게 코락스가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긴 털로 장식된 검은 망토.
장벽을 지키는 큰까마귀 기사단들이 입는 물건이었다.
“선물입니다. 가는 길이 춥다고 하니, 두르고 가시죠.”
그렇게 말한 코락스는 내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그것을 펼쳐 내 어깨에 둘렀다.
풍성한 깃털 밑으로 쭉 내려오는 검은 털가죽.
방금까지 느껴지던 추위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귀한 거 아니냐? 막 줘도 돼?”
“어차피 저흰 보급 나옵니다.”
그렇게 말하는 코락스는 망토를 두른 내 모습을 보더니,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잘 어울리시는군요.”
…이 새끼들 눈빛이 이상한데, 뭐지?
그들을 둘러본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촤앙-!
날 보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고, 그것을 가슴에 붙였다.
하늘 위로 솟은 수십 자루의 검.
예를 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어인가 다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너네 뭐하냐?”
“하하하.”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내가 그렇게 묻자, 코락스가 낮게 웃었다.
저 목석같은 놈이 웃다니.
장벽에 온 이래로 처음 보는 광경이다.
“저희 나름대로의 인사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인사치곤 꽤 거창한…. 그래, 내가 말을 말지.”
더 뭐라고 했다간 말이 더 길어질 뿐이지.
한 손에 든 배낭을 어깨에 들춰 맨 채, 그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나 간다! 어디 가서 뒤지지들 말고!”
공작가 자제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경박한 언사.
그렇지만 그들은 그게 오히려 편하다는 듯, 웃는 얼굴로 뒤돌아 떠나는 날 배웅했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큰까마귀들은 언제든지 공자님과 함께 할 겁니다-!”
멀어지는 장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근데 큰까마귀는 공작이랑 그 후계자한테만 충성한다 하지 않았나?”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 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신입기사가 뭘 모르고 말했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