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2)
“아, 아직! 아직이다!”
천천히 걸어 나온 레이븐의 영체가 질을 응시하던 순간.
다급히 오른손에 낀 반지를 보인 그가 레이븐을 향해 마기를 뿜어냈다.
“데, 데스나이트가 없어졌다고 해서, 아키몬드 님께서 남기신 이 힘이 사라진 것이 아니란 말이다!”
- …….
검은 연기로 뒤덮인 레이븐의 영체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곧바로 자신을 공격하지 않자, 순식간에 기고만장해진 질이 미친 듯 웃어댔다.
“하, 하하! 하하하! 그래! 역시 그랬어! 내 마기로 이 녀석을 다시 복속시키면…!”
광기에 완전히 몸을 맡긴 질이 거기까지 말했을 무렵.
“계속 지껄이는데, 어쩔 생각이야?”
연기에 둘러싸인 그에게 난 퉁명스레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 어…?”
반지를 끼고 있던 질의 오른손이, 그대로 허공을 향해 솟아올랐다.
알아챌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빠른 발검.
이미 그의 검은, 이곳에 있는 모든 언데드의 목을 베어낸 뒤였다.
물론, 내가 소환한 스켈레톤들과 헥토르까지도.
‘허, 진짜 말이 안나오네.’
자신의 몸을 점검하는 레이븐을 보며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내가 부여한 영체는 헥토르와 같은 설계였을 텐데.’
곳곳이 각져있는 헥토르의 것과는 달리, 전통적인 갑옷처럼 매끈한 그의 갑주.
거기에 저 안에 가득 들어찬 마력량까지.
‘평기사 수준은 진작에 뛰어넘었고, 거의 단장급 기사에 근접할 정도라니.’
영체를 구축하는 그 짧은 순간, 그는 얼음성에 깃든 마력을 최대한 빨아들여, 스스로 몸의 형태를 변형시킨 것이었다.
데스나이트의 역량은 토대가 되는 혼에 의해 좌우되는 법.
그리고 그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언데드를 베어내며 베르켈을 보호한 전설적인 기사였다.
- …….
단칼에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언데드를 베어낸 레이븐.
그런 그가 완전히 기진맥진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정체는 계약문에 적어뒀고, 죽이려면 방금 언데드들이랑 같이 죽였을 테니….’
도통 심중을 알 수 없는 그의 시선을 받아내며 나름의 대응을 생각하던 찰나.
“으, 으아아아악?!”
뒤늦게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챈 듯, 질의 비명 소리가 얼음성을 뒤덮었다.
“내, 내 팔이! 아키몬드 님께서 하사하신, 시, 신성한 힘이!!!”
완전히 날아간 자신의 오른손을 뒤로 한 채, 땅바닥에 엎드린 그의 왼손이 미친 듯 바닥을 더듬었다.
“반지, 반지, 반지…! 어, 어어 어디에…!”
“이걸 찾나?”
그의 눈앞에 흑요석 반지를 내밀자, 질의 눈에 깊은 절망이 맴돌았다.
“아, 안돼…!”
간절한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 내 오른손 검지에 흑요석 반지를 끼웠다.
쿠르르르르…!
마치 물에 녹아 사라지듯, 완전히 내 몸속으로 들어가는 흑요석 반지.
“크으으…!”
심장 쪽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감각과 함께, 갑자기 몸에 가득 들어찬 마기를 축적시켰다.
이것이 흑요석 반지의 본래 사용법.
마기를 뽑아내는 것이 아닌, 통째로 몸 안에 받아들이는 무구였다.
‘아직 다 받아들일 수는 없고, 천천히 늘려가야겠군.’
몸 안에 깃든 반지의 존재를 느끼며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네, 네놈이 감히 아키몬드 님의 성물을-!”
내가 흑요석 반지를 흡수하는 것을 느꼈는지, 분노에 찬 질이 그대로 날 향해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달려들려고 했지.
서걱-!
횡으로 올려친 내 검격에 질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
“이 지경이 됐어도, 너 하나 죽일 힘 정도는 충분해 이 새끼야.”
단지, 의지를 되찾은 레이븐을 위해 남겨뒀을 뿐.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완전히 생명을 잃은 질의 몸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목을 되살려 정보를 캐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 정도로 정신 나간 혼이면, 정보를 캐려다가 괜한 말썽만 생기지.’
교단은 플리시안으로 본거지를 옮겼고, 이들은 교단에서 버려진 자들.
캐봤자 나올 구멍이 없었다.
“자, 이걸로 얼음성에 꼬인 벌레는 다 처리했고.”
이제 남은 볼일은 두 개.
하나는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다른 한 가지는 어떨지 모르지.
한 줄기 불안을 품은 채,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레이븐에게 다가갔다.
“계약 내용은 다 읽어봤겠지?”
- …….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날 바라보고 있는 데스나이트.
물어도 별 대답이 없기에, 얼굴을 찌푸린 난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계약 내용에 거짓은 없다. 계약문에 적힌 그대로니까, 네가 알아서 판단….”
거기까지 말한 그 순간.
카앙-!
내게로 쏘아진 레이븐의 검격을, 같은 기술로 비껴쳐 상쇄해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씨발거.”
마력이 담긴 일격에, 노린 것은 내 목.
분명한 살의를 담은 공격이었다.
파앗-!
곧바로 한 스텝 더 파고들어 날 향해 검을 치켜드는 레이븐.
그렇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지.
- 아키, 몬드……!
‘이제야 입을 여네.’
영체화한지 어언 20분 만에 이뤄낸 쾌거.
그 성과에 소소한 기쁨을 느끼며, 그를 향해 악당 같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를 되살리는데, 천하의 아키몬드가 안전장치 하나를 안해놨을 것 같냐?”
그 말과 함께, 레이븐의 몸이 그 자리에 굳어진 듯 멈췄다.
그의 뒤통수에 새겨뒀던 속박의 룬.
그것이 내 수인에 반응해, 그의 움직임을 옭아맸기 때문이다.
“계약할 생각이 없다면 얌전히 성불해. 엄한 사람 엿 먹이지 말….”
- 베르켈은 실패한 건가?
내 말을 끊은 채, 레이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우리들의 희생도 헛되이 사라지고…. 결국 그대는 뜻하는 바를 이룬 것인가?
“아니. 그 반대야.”
그의 물음에 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베르켈은 성공했다. 아키몬드는 목이 잘렸고, 북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되었지.”
- 그러면, 그대는….
“왜 살아있냐고?”
그가 할 질문을 가로채자, 잠시 말이 없던 레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는 게 아니라, 살아난 거지.”
그렇게 말하며 난, 그의 눈앞에 내 옷깃에 달린 라인란트의 문양을 내보였다.
- 그 문양은…?
“라인란트 공작가 제 2 공자, 클라인 라인란트.”
공작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풍스러운 모양으로 장식되긴 했지만, 그 원형을 바꿀 수는 없는 법.
“그게 지금 내 이름이다.”
날 죽이러 떠날 때 베르켈이 가슴에 새긴 문양.
그것을 보자 그제야 레이븐의 검에 서린 살기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발 좀 쉽게, 쉽게 가자. 안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피로감을 억누르며 맺고 있던 수인을 풀었다.
속박이 풀린 레이븐이었지만, 더 이상 날 공격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이 정지했다고 해야 할까?’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던 레이븐이, 이번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날 향해 말했다.
- 네크로맨서 아키몬드가…. 베르켈의 자손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그래.”
- 그대가…. 대륙의 공적인 네크로맨서가, 내 친구의 자손이라는 말인가?
“그렇게 되지.”
설명하는 나도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계약문에 다 써놓은 내용이잖아? 왜 다시 묻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계약문의 내용을 곱씹자, 그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레이븐이었다고 해도 안믿었을 거 같네.’
아마 ‘이 악마 같은 놈이 죽은 나를 능멸하는구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 그래서 죽이려 들었던 건가?
-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른 내용 또한 사실이겠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 베르켈의 가문이, 몰락하고 있다는 것.
그 말이 들려왔을 때는, 나 역시 별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목숨으로 지킨 세상이, 이젠 자신을 버리려 한다라.’
쓴웃음이 나왔지만 그것도 잠시.
할 일이 산더미인 내 입장에서는, 이곳에서 죽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 베르켈의 후손을 도울 수 있다면, 기꺼이 나서야지.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죽어서도 이런 충성이라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역시, 사족이 없을 리 없지.
말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내 얼굴을 응시한 레이븐이 말했다.
- 베르켈의 손에 죽은 그대가, 어째서 베르켈의 후손을 돕는 것이지?
이전에 루델이 내게 했던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 그대에게 있어 베르켈은, 아니, 우리들은 그대의 계획을 방해한….
“아, 진짜 그놈의 이유, 그놈의 명분.”
슬슬 짜증이 솟구친 탓에, 그의 말을 끊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천하의 아키몬드 목을 딴 기사가, 그깟 황제니 뭐니 하는 잡것들 때문에 죽네 마네 궁상들이잖아?”
레이븐의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계속 쏘아댔다.
“내 목숨값으로 북부를 받아가더니, 제국 같은 머저리들한테 전부 넘어갈 판이네?”
- ……!
아, 계약하기 전에 이렇게 대립각 세우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미 내뱉은 말을 번복할 수는 없는 법.
“내가 도저히 그 꼴은 보기 싫어서 이 개고생 중이다. 이럼 됐냐?”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자, 레이븐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 …결국, 베르켈의 말이 맞았다는 것인가.
내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린 레이븐.
이윽고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계약문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그대는 우리의 숙적이었으니.
“알아. 근데 이왕 계약하는 거, 본전 뽑을 때까지 굴릴 거다.”
나중에 딴소리 못하도록 단단히 당부하자,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좋을대로.
승낙을 받아내는 것과 동시에 계약문에 내 이름을 새겼다.
상호 계약에 드는 마기는 몸속에 있는 반지를 통해 충당.
루델과 했던 계약과는 달리,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영구 계약문이 만들어졌다.
“살다살다, 베르켈의 열두 기사를 부리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 동감이다.
짧은 문답과 함께, 계약문이 빛을 발했다.
- 선언하니, 망자 레이븐 폴드링이, 오랜 숙적에게 혼을 맡긴다.
레이븐의 영창과 함께 계약문이 열리고, 룬이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 선언하니, 안내자 아키몬드가 길잃은 적의 혼을 이끈다.
이윽고, 그의 몸을 감싼 룬이 손등에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루델과 같은 임시 계약이 아닌 영구계약.
손등으로부터 시작한 룬이 곧바로 팔을 타고 올라가, 심장이 있는 부근까지 도달하며 달아올랐다.
‘진짜 이거, 더럽게 아프네…!’
차라리 아까 처맞던 게 낫다고 할 정도의 고통.
그것을 견뎌내며 계약문을 마저 영창했다.
- 목적을 이루는 때까지, 안내자 아키몬드는 그의 길을 밝힐 것이며.
- 약속을 완수하는 그 날까지, 망자 레이븐 폴드링은 그의 검이 될 것이다.
파아앗-!
임계에 다다른 계약문이 한 차례 점멸했다.
이것으로 계약은 완료.
처음 시도했던 것에 비해선 훨씬 매끄럽게 진행된 계약이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팔에 새겨진 룬을 확인한 난 시선을 돌려 얼음성의 벽에 마기를 주입했다.
쿠르르르르…!
아무것도 없던 벽이 천천히 내려가고, 깊은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났다.
‘좋아. 이곳은 발각되지 않았군.’
지하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안도했다.
얼마 뒤 있을 방계와의 정면대결, 그리고 그 이후 펼쳐질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한 수.
그리고 내가 얼음성으로 향한 가장 큰 이유가, 이 통로 끝에 잠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