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1)
“폴드링?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내 경악의 이유를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질은 의아한 듯 눈가를 좁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뭐, 됐어.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니.”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자, 그의 휘하에 있는 언데드들이 일제히 전투태세를 취했다.
“크으…!”
이에 질세라, 곧바로 마기를 끌어올려 소환문을 형성했다.
대방패를 든 스켈레톤이 열.
나머지는 방금 전까지 사용하던 석궁을 장비시킨 상태였다.
“헥토르!”
믿기지 않는 광경이라 한들, 이미 닥친 상황은 어쩔 수 없는 법.
최대한 부딪히고, 탐구하고, 파훼해야 했다.
챙-!
맑은 검명과 함께 헥토르의 영체가 검을 뽑고, 나 역시도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았다.
‘베르켈의 열두 기사 중 하나라면, 저걸 뚫는 것은 불가능하다. 술자를 죽여야 해!’
판단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1열에게 명령했다.
“술자를 저격한다. 발사!”
푸슈슈슉-!
파공음과 함께 공기를 가르는 열 발의 쿼렐.
그렇지만 그 순간, 질의 눈 앞에 나타난 데스나이트, 레이븐의 검격이 공기를 갈랐다.
카카카캉-!
금속이 부딫히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튕겨나간 열 발의 쿼렐.
그것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명령을 수정했다.
“1열은 술자의 머리를 노린 채 2초 간격으로 교차 사격! 데스나이트를 묶는다!”
- 키이이!
내 명령을 알아들은 스켈레톤들이 곧바로 사격 간격을 조정했다.
푸슉! 푸슉!
한 발 한 발, 정확한 궤도를 그리며 질의 머리를 노리는 쿼렐.
“하! 이 따위 약아빠진 전술로!”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등 뒤에 대기중이던 언데드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질의 언데드들이 날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방패 전진! 2열은 언데드를 막아!”
질을 향한 순차 사격이 이뤄지는 것과 동시에 나머지 스켈레톤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크워어어억?!”
- 키이이이-!
대방패를 든 스켈레톤들이 달려드는 언데드 무리를 향해 방패를 치켜들었다.
쿠콰앙-!
육중한 살덩이가 방패를 강타하고, 힘에 부쳐 스켈레톤들이 몇 걸음 밀려났다.
“좋아, 지금이라면!”
틈을 잡아낸 내 눈이 빛났다.
예상대로, 중장갑으로 보강한 스켈레톤들은 어렵지 않게 언데드들을 잡아내고 있다.
이제 저 곳으로 돌입해 언데드들의 전열을 무너트리기만 하면…!
“놀라운 것은 확실하지만, 그 분의 힘에 비해서는 보잘것없지.”
“뭐?!”
귓가를 때리는 질의 목소리에 곧바로 몸을 뒤로 뺐다.
콰콰콰콰콱-!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내려온 강격.
데스나이트 레이븐이 날 향해 돌진한 것이었다.
“젠장, 석궁병들은?!”
그렇게 외치며 소환진을 확인하자 머릿속에 절망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그 사이에 전부 아작났군…!”
한번 부서진 스켈레톤이 완전히 복구되기까지 적어도 2분.
그렇지만 저 정신 나간 데스나이트는 단 2초 만에 내 언데드의 3할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제기랄!”
곧바로 레이븐을 향해 유성검을 쏘아냈다.
키이잉-!
하인켈의 그것을 완전히 재현한 검로.
- ?!
그렇지만 레이븐은 곧바로 고개를 틀어 피해낸 뒤, 다음 동작으로 연계해 날 압박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가지.
그의 검술 상당 부분이 큰까마귀 기사단의 그것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었다.
‘뭐, 따지고 보면 그 반대겠지만.’
카앙-!
올려치는 검격을 애써 비껴냈지만, 곧바로 손목에 저릿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씨발, 뭔 놈의 마력이…!’
그렇지만 이 한 합으로 인해 박자가 흐트러진 틈.
틈새로 헥토르를 돌입시킨 뒤, 그를 통해 다시 한 번 유성검을 토해냈다.
다른 기술은 없냐고?
이 기술 재현시키는 데에만 며칠이 걸렸는 줄 알고!
키이이이-!
이번에는 검로 뿐인 내 것과는 달리, 마력을 품은 완전한 기술.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헥토르의 검이 레이븐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좋아, 먹혀들었…!’
그러나 그것도 잠시.
뻐억.
“끄으?!”
복부로 전해지는 둔탁한 통증에, 순간 정신을 잃어버릴 뻔했다.
콰앙-!
타격음과 함께 수 미터를 날아간 내 몸이 차가운 얼음 바닥을 굴렀다.
“씨발, 수준 자체가 다르네.”
격통을 애써 참아내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그래도 물량전에서는 백중세를 이루는 상황.
이 상황에 저 녀석을 놔주게 된다면, 곧바로 전열이 붕괴할 테니까.
‘헥토르가 조금이라도 더 버텨준다면…!’
카앙-!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레이븐의 검이 곧바로 헥토르의 빈틈을 제압해갔다.
데스나이트의 역량을 결정하는 것은 토대로 사용한 혼의 자질.
그리고 이제 막 재능을 꽃피웠던 신출내기인 헥토르와는 달리, 레이븐은 전설의 열두 기사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 일합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헥토르는 자신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상태라는 뜻이다.
쿠콰콰쾅-!
멀찍이 날아간 헥토르의 영체가 내 바로 옆으로 곤두박질쳤다.
끼기기긱…!
곳곳이 뒤틀리고 깨진 헥토르의 영체가 움찔거렸지만, 이 이상의 행동은 불가능해 보였다.
“더럽게 쎄네 진짜…!”
상처는커녕 흠집 하나 없이 나와 헥토르를 제압한 레이븐.
그는 검을 치켜든 채, 천천히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검으로는 이길 수 없다. 역시 가능성이 높은 방법은 술자….’
짧은 순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질의 모습을 살피던 때였다.
‘잠깐만, 저거…?’
그의 오른손에 끼워진 흑요석 반지.
그것을 바라보던 내 눈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반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내 것이다. 그렇다면….’
마치 기사들의 마력 파장이 서로 다르고 마법사들의 마력회로가 상이하듯, 네크로맨서의 마기 또한 각각의 고유한 파장이 존재한다.
자신의 몸에 마기를 받아들여 축적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레 고유의 파장을 띄게 되는 법.
그렇지만 질이 다루는 마기는 자신의 것이 아닌 반지의 것이었다.
아키몬드의 파장을 지닌 마기.
즉, 나와 동일한 파장을 띄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저걸….
‘남은 수단도 없으니, 이판사판이군.’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방법.
솔직히, 전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터무니없는 곡예나 다름없었다.
근데 뭐 어쩌겠어.
살려면 해내야지.
“후우-!”
마른 숨을 뱉어낸 뒤, 표정을 굳힌 채 검을 쥐었다.
“호오, 아직도 저항할 힘이 남아있단 말인가?”
가소롭다는 듯이 날 보며 웃은 질이 레이븐에게 명령했다.
“팔다리 하나 정도는 괜찮지만, 살려서 가져와라.”
마기에 압도당한 채 꼭두각시가 된 기사.
그것이 하필이면 베르켈의 동료라는 것이, 내 결심을 한층 두텁게 만들었다.
저벅- 저벅-
낮은 발소리와 함께 점점 내게로 다가오는 데스나이트.
의지를 잃은 채 검격을 토해낼 뿐인 옛 기사.
그의 모습을 잠시 눈에 담은 난, 곧바로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카앙-!
“진짜 더럽게 아프네!”
불평과 함께 레이븐의 검로를 흘리고, 곧바로 환영검을 펼쳤다.
카카카칵-!
전대 공작, 루델 라인란트의 기술.
베르켈과 함께한 기사라 할지라도, 이 이질적인 검로를 파악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 ……!
예상대로, 대응이 한 박자 늦다.
순식간에 세 개의 검로를 장악한 내 검이 레이븐의 몸에 몇 가닥의 상처를 남겼다.
“뭣…!”
한순간 그의 검을 농락하는 내 모습에 질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낸 것이 작은 흠집일 뿐, 유의미한 손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맴돌았다.
“데스나이트! 어서 놈을 잡아라! 아키몬드 님의 지식을 내게 가져와!”
술자의 명을 받은 레이븐이 날 압박해 들어왔다.
‘죽이지 말고 데려와라.’
지식에 미친 저 광신도의 명령이, 지금의 내게는 한 줄기 광명이었다.
촤라락?!
그의 오른손을 타고 피안화의 검로가 펼쳐나갔다.
낡은 갑옷을 타고 새겨지는 수십 가닥의 흠집.
그렇지만 거기에는 아랑곳 않은 채, 레이븐은 정면으로 검을 휘둘렀다.
키리릭-!
발을 꺾어 검을 쥔 손을 낚아채고, 역수로 쥔 검을 그의 뒤통수에 찔러넣었다.
갈라무의 살수들이 쓰는 역수검법, 가오리침.
뒷통수에 기시감을 감지한 레이븐이 곧바로 내 몸을 집어던졌지만, 내 검은 이미 그의 뒤통수에 일곱 가닥의 흠집을 만들어낸 뒤였다.
“후우…! 후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다잡았다.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삼키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잡았다.
“뭣하고 있는 거야?! 그깟 꼬맹이 하나 잡지 못하다니, 그러고도 네놈이…!”
눈살을 찌푸린 질이 뭐라고 지껄이든,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촤르륵!
이번 검로는 정면.
수직으로 찔러 들어간 사영격이 기괴하게 비틀려, 레이븐의 가슴팍에 커다란 흠집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빠각-!
건틀렛으로 검신을 쥔 레이븐의 검손잡이가 내 명치를 강타했다.
근접상황에서 찔러오는 하프 소딩.
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 정도로 강력한 충격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뻐억!
방금 전의 공격보다도 더 강한 충격이 날 쳐올렸다.
다시 한 번 날아가 바닥을 뒹구는 내 몸.
“커억…?! 크으…!”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 온몸을 괴롭혔지만, 그럼에도 느낄 수 있었다.
라인란트.
베르켈의 혈통이 내게 선사한 이 육체는….
정말 더럽게도 튼튼하다는 걸.
“이걸로 끝이다. 클라인 공자.”
“그래, 끝이지.”
상반신을 겨우 일으킨 날 향해, 질이 천천히 걸어왔다.
승리에 도취한 저 얼굴.
제 것이 아닌 힘을 제 것인 양 휘둘러대는 도둑의 얼굴이다.
“얌전히 따라오게. 가지고 있는 지식을 넘긴다면, 교단의 일원으로 받아줄 수도….”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가.”
흐려지는 시야를 애써 바로잡으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우웅-!
내 마기에 반응한 그것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빛? 이번엔 또 무슨 수를…!”
“말했잖아. 이걸로 끝이라고.”
“뭐?”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질이 뒤를 돌아본 그 순간.
“어, 어어어…!?”
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이븐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흠집들.
마기에 반응한 푸른 빛이, 뒤늦게 그 형상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룬…?”
레이븐의 몸을 뒤덮은 기하학적인 문자들.
그것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난 들고 있던 검을 땅에 찍어, 내 마기를 이 공간에 흩뿌렸다.
파츳-!
검은 마기가 푸른 유리 바닥을 물들이고, 이윽고 그것은 선이 되어 그 몸에 새겨진 룬을 내 의도에 맞게 연결해나간다.
“말도 안 돼, 이런 복잡한 룬과 술식을 전투 중에, 그것도 검 끝으로 새겼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할 리가…!”
“하니까 되던데. 그리 어렵지도 않더만.”
허세를 가득 담은 한 마디로 질의 말을 끊었다.
쿠우우우-!
레이븐의 몸에 새긴 계약문이 빛나고, 그릇된 기운에 잠식된 그의 의지를 깨웠다.
투확-!
눈부신 빛이 자취를 감추고, 다시 나타난 그의 모습은 낡은 시체가 아닌 검은 영체.
새로운 데스나이트의 몸을 부여함으로써, 기존 계약자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낸 것이었다.
“아아…! 아아아…!‘
“넌 실수한 거다. 망할 사이비 새끼야.”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질을 향해, 난 이전에 베르켈에게 했듯, 엄지손가락으로 내 목을 가리켰다.
“살려서 데려오긴 개뿔, 시작하자마자 목을 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