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얼음성, 그리운 내 집(4)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설원.
그 우울한 혹한 속에 우뚝 솟은 얼음성 어딘가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아악?!”
“뭐야, 적습이라니?! 도대체 누가 이곳을…!”
“어디에서 쏘는 거야?! 찾아! 어서 적을…!”
콰직-!
몽롱한 정신을 부여잡은 채 윽박지르던 네크로맨서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한참 동안 설계해놓은 보람은 있네.”
활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육중한 위력.
얼어붙은 언데드의 몸뚱이를 뭉텅이로 도려내는 쿼렐을 보며, 클라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1진 장전, 2진 발사.”
그의 명령과 함께 서른 구의 스켈레톤들이 손에 든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다.
푸슈슈슉-!
파공음과 함께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클라인은 딱딱하게 굳은 육포를 뜯으며 혼비백산한 그들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 게다가 눈 때문에 시야조차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어지는 저격.
대응은커녕, 스켈레톤들이 숨어있는 위치조차 알아낼 수 없을 터였다.
“으, 으아아아-!”
한창 허공을 향해 언데드를 돌진시키던 네크로맨서가 전열을 이탈했다.
“어디 보자, 저 쪽은….‘
그가 도망치는 방향과 눈이 쌓인 모양.
그것을 잠시 재보던 클라인은 곧 그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후.
퍼석-!
방금 전까지 도망치던 네크로맨서의 몸이 밑으로 쑤욱 꺼졌다.
“뭐야?! 으, 으아아아아…!”
깜짝 놀란 듯한 그의 목소리가 땅속을 향하며 멀어졌다.
두껍게 쌓인 눈에 가려진 빙하의 틈새, 크레바스(Crevasse).
언데드를 앞세워 도달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맨몸으로 빙하를 거닌 대가였다.
“언데드의 지원이 없다면, 너희들은 빙산에서 조난된 샌님들일 뿐이야.”
그 옛날, 잔뼈가 굵은 연합군의 레인저와 기사들조차도 이 빙원에 발을 들이는 것을 주저했다.
지평선 끝까지 쌓인 눈.
그 속에 숨어있는 온갖 위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망치고 싶으면 쳐 봐. 이 빙원이 너흴 죽일 테니까.”
쿼렐을 방어하느라 움직일 수 없는 언데드들을 보며 클라인이 입을 열었다.
수십 년간 이 설원을 누비며 얼음성을 만들어낸 장본인의 한 마디였다.
***
“이걸로 잡졸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될 테지만….”
언데드를 전부 처리한 것을 확인한 후.
얼음성 외벽에 다다른 난 내 눈앞에 있는 푸른 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남아 도망친 네크로맨서가 있다 한들, 이곳의 추위를 감당해내지는 못할 터.
크레바스에 빠져 죽거나, 얼어 죽거나.
그들을 기다리는 결말은 그 둘 중 하나일 터였다.
“남은 건 한 사람뿐이군.”
질이라는 이름의 주교.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난 내 앞을 가로막은 성벽에 손을 댔다.
- 열어라.
성문을 향하는 망자의 목소리가 거대한 기둥을 휘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쿠르르르르…!
200년의 세월을 넘어 돌아온 주인의 목소리에, 굳게 닫힌 문이 움직여 작은 틈새를 만들어냈다.
“하아…!”
천천히 발을 떼어, 얼음성 내부를 향했다.
내가 들어온 곳은 얼음성을 유지하는 다섯 개의 탑 중 하나, ‘통곡의 창.’
수정처럼 빛나는 투명한 벽과 바닥을 딛자 내 눈시울이 파르르 떨렸다.
200년.
200년이다.
그 긴 시간을 넘어.
한 인간의 생을 넘어.
“기어코…. 난 이곳에 돌아왔구나.”
얼음성.
그리운 나의 집.
분노에 미친 네크로맨서가 만들어낸 원혼의 관이요, 끊임없이 언데드를 토해내는 공장.
…그리고, 무고하게 죽어간 수없이 많은 이들을 위한, 묘비이기도 한 곳으로.
고오오오오…!
잊어버릴 법도 하건만, 괴로운 기억은 상흔처럼 가슴 한편에 남아 마음을 울리는 법이었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눌러 담은 채, 서둘러 곳곳의 전경을 살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아키몬드의 거점.
그렇지만 그곳에 이질적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체?”
시체가 보였다.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낸 시체.
정황상, 이곳에 침입한 질이라는 네크로맨서의 것이겠지.
“전투가 있었다는 말인가? 도대체 누가…?”
불쾌한 감정보다도 당혹감과 의문이 먼저 들었다.
네크로맨서인 내 죽음과 함께, 얼음성을 지키는 언데드들은 성불하거나 야생화했을 터.
그렇다면 그들이 이곳을 지킬 이유 따위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이 흔적은….’
시체들의 몰골을 보니 더더욱 의문이 들었다.
하나같이 무언가에 베인 듯, 깔끔한 절단면을 가진 상태.
같은 언데드끼리의 육탄전이 아니라, 마치 기사와 싸운 듯한 모습이었다.
“뭐지? 내가 분명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을 텐데?”
그렇게 의문을 품은 채 시체를 살피던 순간.
날 향해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크로맨서의 기억을 엿볼 때 들었던 중년의 목소리.
“클라인, 공자…?”
기둥 한켠에서, 검은 로브 차림의 질 주교가 걸어오고 있었다.
“…….”
이곳에 널브러진 기괴한 흔적의 장본인을 보았다.
경악에 찬 표정과 함께 내게로 걸어오는 질의 모습.
그렇지만 그런 그의 얼굴에서, 공포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씨발, 한발 늦었군.’
그의 모습을 확인한 난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하, 하하! 이렇게, 이렇게 기쁠 수가!”
두려움은커녕,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단 얼굴로 날 바라보는 질 주교.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흉흉한 마기에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마기의 근원은 그의 오른손 검지에 껴 있는 검은 반지.
네크로맨서, 아키몬드의 마기를 한데 모아 결정화시킨 아티팩트, 흑요석 반지였다.
“그대도 아키몬드 님의 힘을 찾아 이곳으로 온 것인가?”
“아니. 난 너 죽이러 온 건데.”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자 날 보는 그의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죽여? 날?”
그렇게 되묻던 질 주교는 이윽고….
“하! 하하! 흐하하하하! 그래! 죽이러 온 건가?! 이 나를! 흐하하하하하-!”
마치 약에 취한 듯, 완전히 풀린 눈을 한 채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아직 저 반지에 깃든 마기를 전부 다루지는 못할 텐데….’
그가 착용한 반지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저것은 대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급하게 마기를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다섯 개의 반지 중 하나였다.
‘다른 네크로맨서들과 비교해도 이질적인 파장의 기운이기에, 다루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머릿속으로 분석을 계속해가면서도, 한 줄기 불안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방금 전 보았던 전투의 흔적.
네크로맨서에게 있어 그것이 시사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네까짓 게 감히 날 죽이겠다고?! 그분의 은총과 힘을 하사받은 이 질 라헬린을-!”
웃었다가 화냈다가, 이제는 아주 발작을 해 대는구나.
광증이라도 걸린 것인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질의 일갈과 함께, 그의 등 뒤에서 한 무리의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만.
저게, 뭐지?
“이런…. 미친…?”
그것들의 모습을 보는 내 표정이 이상해졌다.
언제 봐도 괴랄한 모습의 저 누더기들을 본 것이 아니었다.
내가 경악한 것은 단 하나.
저 언데드 무리 사이에서 걸어오는 한 존재 때문이었다.
저벅- 저벅-
낡은 갑옷이 바닥을 차올리는 소리와 함께, 그것이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흐흐흐…! 때마침 잘 되었어.”
넝마에 감춰진 녹슨 철판.
그리고 그곳에 새겨진 익숙한 까마귀 문양.
천천히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것은 데스나이트.
기사의 시체를 이용해 만들어낸 반혼술의 정수였다.
“……!”
“뭐지? 내 새로운 힘을 보고선, 할 말을 잊은 것인가?”
녹슨 기사를 보자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내 모습을 보며 질이 이죽거렸다.
그렇지만 지금의 내게 있어,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그의 갑옷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의 갑옷에 새겨진, 오래된 문양을 보았다.
“네가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거냐…?”
대답할 리 없는 언데드에게 애써 물었다.
라인란트의 깃발 아래 모인 열두 명의 기사.
그들 중 최초로 베르켈과 뜻을 함께한, 최초의 한 사람.
그리고 현재에 이어서는 그 이름을 받들어, 장벽을 수호하는 기사단의 시초가 된 자.
“레이븐…. 폴드링…!”
내 앞에 선 데스나이트는 베르켈의 열두 기사 중 한 명.
큰까마귀의 기사, 레이븐 폴드링이었다.
***
“헉…! 헉…!”
“베르켈! 이쪽이야! 어서!”
“흐아아압-!”
쿠콰아아앙-!
마력으로 찬연히 빛나는 검격과 함께, 저주받은 언데드의 영체가 산산이 흩어졌다.
“아키몬드는?!”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간 다섯 구의 데스나이트를 뒤로 한 채, 베르켈은 앞서 달리고 있는 붉은 머리의 기사에게 물었다.
“이미 심층부로 향했어! 놈이 열쇠를 가동하면 끝이야!”
“제길…!”
그렇게 침음성을 흘린 베르켈이 속도를 올리려던 그 순간.
쿵-!
- 크워어어어어-!
5미터는 족히 넘어가는 크기의 거인이 그들의 앞을 막아선 채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섀도우 골렘?! 아키몬드 이 개자식이 끝까지…!”
그것을 본 붉은 머리의 기사, 메르카인이 다급하게 자신의 파트너를 불렀다.
“아이긴!”
“말 안해도 안다. 준비해!”
짧은 신호와 함께 짓쳐드는 골렘의 주먹을 향해 몸을 날리는 두 기사.
콰아앙-!
이윽고 거인의 주먹이 지면을 강타했을 때, 두 기사는 이미 거인의 팔을 발판삼아 돌진하고 있었다.
키이이이이잉-!
서로 다른 두 마력이 공명하며, 두 검에 서린 마력이 이중나선을 이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것은 노도처럼 거인의 몸을 압도하여, 그 가슴을 통째로 뚫어버렸다.
- 크어어어어…!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거대한 섀도우 골렘.
홀로 성벽을 갈아버리는 공성병기를 처치했음에도, 그것을 지켜보는 베르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벌써 추격이 여기까지…!”
등 뒤에서 몰려드는 수많은 언데드들.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그 압도적인 군세에 기사들의 눈에 절망이 감돌았다.
여기까지인가.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의 멸망을 막을 수 없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철컥!
최후미에서 그들을 따르던 한 명의 기사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레이븐?!‘
“뭐 하는 거야! 빨리 안가면 여기서…!”
“아니.”
검은 머리를 늘어트린 기사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동료들을 등진 채, 검을 뽑았다.
“……!”
이미 검집은 허리춤에서 뽑아, 멀리 던져놓은 상태.
그것을 본 베르켈은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이게 최선이다.”
담백할 정도로 짧은 한마디.
점점 가까워지는 언데드의 군세와 레이븐을 번갈아 본 베르켈은, 결국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죽지 마라, 까마귀. 명령이다.”
“분부대로.”
항상 듣던 대답이 들려오자, 베르켈은 곧바로 얼음성 심층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베, 베르켈?!”
“제길, 전투마법사들 보호해! 속도 올려!”
“죽지 마요 선배! 알았어요?! 죽으면 죽여버릴 거야-!”
상황을 파악한 다른 기사들 역시 고민은 길지 않았다.
- 키이이이이!
- 크아아아-!
동료들이 모두 떠나고 난 자리.
홀로 남은 기사는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명령을 떠올렸다.
‘죽지 마라.’
그를 구원한 은인의 명령, 그리고 생에 첫 친구의 부탁.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언데드의 군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이븐 폴드링, 큰까마귀의 기사.”
마지막 남은 마력을 한가득 검에 집어넣은 레이븐의 입가에는 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 앞은, 절대 못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