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얼음성, 그리운 내 집(2)
벌컥!
낡은 나무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몇몇 눈송이들이 먼지 쌓인 방 안을 맴돌았다.
“어으~! 왜 밖이랑 안이랑 온도가 똑같은 거야?!”
“첫째 공자님이 둘러본 이후로 한 번도 안왔는데, 당연한 것 아닙니까?”
추위에 온몸을 떠는 나와는 달리, 태연한 감시자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랫동안 출입이 없었던 듯, 싸늘한 공기가 감도는 내부.
한구석에 걸린 큰까마귀 기사단의 증표가 이곳이 기사단의 건물이라며 말하고 있었다.
“예상한 것보다 도착이 빠르군요.”
“이곳이 671번 감시초소입니다.”
“후우…!”
671.
꿈에 그리던 숫자를 듣자 다리의 힘이 저절로 풀렸다.
장벽을 넘어 북쪽을 향한지 어언 3일째.
마지막 초소에 도착한 난 이제야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뒤, 뒤질 것 같아…!”
“거 새파랗게 어리신 분이 이거 가지고 쩔쩔맵니까?”
“형님이랑은 영 딴판이시네.”
그리고 그런 나와는 달리,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감시자 두 명이 등에 짊어진 짐을 초소 한편에 풀어놓았다.
“야, 아무리 그래도 델라인이랑 비교하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 안해?”
도끼눈을 뜬 채 그렇게 묻자 감시자들은 어쩌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애초에 전문분야갸 다르잖아? 걘 기사고, 난 네크로맨서고.
내가 검 좀 쓸 줄 안다고 해서 아예 기사랑 같은 취급을 하면 어떡해?
온 힘을 다해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결국 난 어깨를 늘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내 옷깃에 걸린 견습기사의 증표.
신참이긴 하지만 엄연히 기사단의 일원이니, 예외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이 망할 놈의 집구석 같으니라고.
“뭐, 따지고 보면 또래치고는 잘 따라온 거긴 합니다.”
“첫째 공자님이랑 다니다 보니 점점 감각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내 허약한 몸뚱이를 본 감시자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말인즉, 이 녀석들은 델라인이랑 같이 다녔던 인원들이라는 건데….’
“델라인은 나보다 훨씬 더 잘 따라왔다?”
“아뇨, 그 정도가 아닙니다.”
내 볼멘소리에 그렇게 답한 감시자들은 기가 질린다는 표정을 한 채 말했다.
“첫째 도련님은 되려 저희가 따라잡는다고 개고생 하거든요.”
“…….”
할 말을 잃었다.
사흘간 직접 본 바로는 감시자들의 체력도 장난이 아닌데 말이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과 함께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삼켰다.
“어으…. 볼 때마다 오금이 저리네.”
“그러게 말이야.”
그러고 있는 난 안중에도 없는 듯, 초소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 감시자들이 미간을 좁혔다.
‘여러 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도착했군.’
호흡을 겨우 안정시킨 뒤 나 또한 그들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설원과는 달리, 그림자를 한 꺼풀 두르고 있는 음침한 빙원(氷原)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변한 게 없네.”
“예?”
“혼잣말이야.”
되물음을 얼버무리며 그리운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아키몬드 사변 이후, 200년의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는 저 먹구름.
햇빛을 가린 구름은 그림자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지던 설원과 빙원을 가르는 선을 그어놓았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경계.
갈라진 두 공간은 마치 다른 세상인 듯 서로 다를 빛을 품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하시는 게 좋습니다.”
“네크로맨서들이 저곳을 넘어갔다니, 솔직히 믿기 힘들어요.”
방금 전까지 농담조였던 감시자들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그만큼 그들도 공포를 느낀다는 뜻이겠지.’
지금까지 우리가 거쳐왔던 곳은 설원.
만년설에 뒤덮여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땅이 있고, 나무가 자라는 생명이 있는 땅이었다.
그렇지만 자연의 마지막 자비도 여기까지.
나와 감시자들이 도착한 이곳은 북부 전도를 기준으로 ‘탐사 한계선’에 달하는 지점.
이 초소를 넘어 북쪽으로 향하는 순간, 그곳은 대륙에 사는 그 누구도 발을 디딘 곳이 없는 세상이 펼쳐진다는 뜻이다.
“아니. 가야 해.”
그렇지만 감시자들과는 달리, 그 영역을 바라보는 내 표정은 평온했다.
“저곳에서 꼭 가져와야 할 게 있어.”
그렇게 말하는 내 모습을 보자, 감시자들 역시 더 할 말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말하시니 별수 없죠. 기구들 사용법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감시자들은 등짐에서 몇몇 기계장치들을 가져와 초소 가운데에 놓인 탁자에 늘어놓았다.
신호탄 발사장치와 일인용 야영 장비.
침엽수로 만든 숯에 불을 붙이는 법과 기본적인 방향 식별방법까지.
설원 탐사의 전문가답게, 그들의 설명은 군더더기가 없었고, 또한 정확했다.
“…이 정도면 전달할 내용은 다 전했습니다.”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고생이지?”
“일인데요. 뭐.”
감시자들은 굳이 내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동행한 이들은 내가 떠난 후 사흘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면, 날 구하기 위해 수색에 나서기로 했다.
“그래도, 나 올 때까지 여기 있으려면 좀이 쑤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난 품속에서 금화 다섯 개를 꺼내주었다.
“어?!”
“와, 금화!”
방금 전까지 가라앉아있던 감시자들의 표정이 대뜸 밝아졌다.
‘여차하면 감시자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니, 이 정도 투자는 필요하겠지.’
눈에 띄게 달라진 감시자들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방벽을 지키는 두 무력집단,
대륙 끝자락에서 장벽을 지키는 큰까마귀 기사들.
그들의 행동원리는 명예에 있다.
대륙의 최전방을 지킨다는 자부심과 사명감.
‘…말이 좋아 명예지, 내가 보기엔 정신병이야.’
그런 그들과는 달리, 정착촌에서 나고 자란 감시자들의 행동원리는 생존이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경제력.
감시자에게 지급되는 높은 봉급이 그들의 원동력이 된다.
“달에 한 번씩 행상이 온다던데, 언제 이걸로 술이나 사 먹어. 나누든 말든 너희 맘대로 하고.”
내가 그렇게 덧붙이자 감시자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역시, 칭찬이나 미사여구 같은 것보단 돈이 최고지.’
속물이라며 평가절하하는 이들도 더러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쪽이 더 낫다.
명예라는 알지도 모르는 것에 죽고 사는 기사들보다야 훨씬 합리적이니까.
“야, 이 정도면 우리 세 달 치 봉급 아니야?”
“첫째 공자님 때는 이런 거 꿈도 못 꿨는데.”
“풉!”
델라인을 향한 뒷담 아닌 뒷담이 나오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긴, 우리 형님은 이런 면에선 되게 인색하긴 해.”
“솔직히 맞습니다.”
공작가 후계자로서, 델라인이 장벽을 점검하는 것은 반 년에 한 번.
그때마다 이곳까지 고된 길을 걸어온 감시자들의 입에선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사 된 자로서, 한 푼도 허투루 써선 안된다!’ 맨날 이러지?”
“어! 맞습니다! 그거요!”
“본가에서도 그러고 다니십니까?”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떨자 그걸 보던 두 감시자가 박장대소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융통성이 없지 않냐?”
“공자님 본인도 돈을 안쓰고 다니시니 뭐라 불평할 수도 없고….”
공공의 적을 만들어놓으면 자연스레 공감대가 생기는 법.
어느새 부쩍 친해진 두 감시자와 이야기꽃을 피는 사이, 햇빛은 구름 너머로 사라지며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
“위험해지면 바로 신호하세요!”
“알았어-!”
멀찍이 보이는 감시자들에게 외치며 빙원으로 발을 내디뎠다.
쿠우-!
몸속으로 무엇인가가 스며드는 기괴한 감각.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곳에서 공포를 느끼거나, 기시감에 한번 더 고민할 터.
그렇지만 난 달랐다.
이 공간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난, 이 기괴한 감각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으니까.
‘이곳부터는 산 자의 세계가 아닌, 망자의 세계.’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내 손짓에 따라 뻗어 나가는 검은 마기.
다른 곳에 있을 때보다도 더욱 진하게 피어오른 그것이 내 몸을 감싸, 몸 곳곳에 검은 룬을 새겨갔다.
“경계하지 마라. 난 너희와 같은 자다.”
허공을 향해 읊조리자 방금 전까지 내게로 스며들던 이질적인 감각이 점점 멎어들었다.
망자와 산 자를 매개하는 기운, 마기.
그것을 몸에 두르고 혼의 파장을 조정한다면, 난 이곳에선 그들의 일원으로서 이곳을 거닐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지 못한 자는….
“아악! 아아악-!”
시선을 돌려 비명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웃으며, 울며, 찡그리며 설원을 누비는 남자.
검은 로브 차림을 본 난 곧바로 손을 뻗어 스켈레톤을 소환했다.
‘교단의 네크로맨서. 낙오된 건가?’
두 기의 스켈레톤이 활을 들어 남자를 겨눴다.
그렇지만 남자는 내 존재도 눈치채지 못한 듯, 이리저리 배회하며 뜻 모를 말만을 입에 담을 뿐이었다.
“히히! 아니야! 난 아니야! 내가 죽인 게…!”
“발사.”
퓨퓩-!
짧은 명령과 함께 검은 화살이 공기를 가르고, 생명을 잃은 남자의 몸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털썩!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진 남자에게 다가간 난 그의 몸 상태를 확인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멍청하긴, 사전조사도 없이 여기 들어올 생각을 했단 말이야?”
그의 시체를 걷어차 얼굴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혼의 파장을 맞추는 방법조차 모르다니.
이런 것들이 네크로맨서를 칭하며 돌아다니는 현실이 새삼 개탄스러웠다.
그렇지만 덕분에 뜻밖의 수확이 생긴 것 또한 사실.
가슴팍의 관통상 두 개를 확인한 난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좋아, 아직 뇌가 무사하군.”
그렇게 말하며 난 죽은 지 얼마 안 된 그의 시체에 마기를 불어넣었다.
꾸득! 꾸드득!
육신을 떠나려던 혼을 억지로 붙잡아, 죽은 몸에 강령시켜 기능을 회복한다.
“끄으?!”
울컥 피를 쏟아낸 그의 눈동자가 내 모습을 담았다.
망자의 눈이 비치는 것은 육신이 아닌 혼.
“아아…!”
내가 누군지 알아챈 네크로맨서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왜 그러나?”
“…!”
검게 물든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내젓는 네크로맨서를 보며 말했다.
“꿈에도 그리던 내가 너희 눈앞에 친히 나타나 주었는데, 왜 그리 떨고 있지?”
그렇게 묻자 네크로맨서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다, 당치도 않습니다! 위대하신 당신을 직접 뵈었는데, 어찌 제가…!”
“그래…?”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뭔가 더 말하려던 그의 혼을 제압했다.
“컥?!”
- 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망자의 목소리.
언데드에게, 특히 내가 소환한 언데드에게는 절대적인 명령권을 발휘하는 언령이 흘러나왔다.
- 너 같은 버러지에게 이름 불리고 싶지도 않고, 대화하고 싶지도 않다.
“끅…! 끄으으…!”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당황한 듯 발버둥 치는 네크로맨서.
그의 얼굴을 붙잡은 채 압박을 더해 가자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지금 저 얼굴을 보는 순간마다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내 이름을 팔아 창궐한 대륙의 구더기들.
- 그냥 내가 알아서 네 머릿속을 들여다볼 테니.
경악에 찬 그의 표정이 점점 공포로 바뀌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