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얼음성, 그리운 내 집(1)
“망할 조카놈 같으니. 몸은 다 나았냐?”
온몸을 뒤덮은 피로감이 한 꺼풀 가셨을 때쯤.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이안이 나타났다.
전투가 모두 끝나고, 내가 다시 깨어난 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뭐 하다 이제 돌아온 겁니까?”
“뭐 하긴? 지하 통로 틀어막고, 주변 몬스터 토벌하고, 언데드 시체 치우고 다녔지.”
“수배범이 그러고 돌아다녀도 되는 겁니까?”
“그럼 어떡하냐? 그대로 냅두면 여기 사람들 농사 못한다는데.”
되려 성을 내는 이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곧 눈이 녹겠구나.’
11월부터 겨울이 시작되는 여느 대륙과는 달리, 극북지방의 11월은 눈이 녹는 봄이다.
“참 신기하지. 다른 곳은 이제 눈이 오기 시작하는데, 이곳은 두 달 동안 눈이 녹는다니.”
이안의 말을 들으며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을 보았다.
마법사들도, 정령사들도 까닭을 밝히지 못한 이상기후.
그렇지만 이 기괴한 계절 변화는, 역설적이게도 장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귀중한 젖줄이 되어주고 있었다.
“읏 차아-!”
“거기! 좀 더 왼쪽으로!”
“누가 방책을 여기에다가 놨어?! 당장 치워-!”
전투가 일어난 지 나흘.
걸걸한 인부들의 고함소리를 음악 삼아 곳곳이 부서졌던 장벽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내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넋을 놓고 있을 무렵이었다.
“밖으로 나간다 나간다 노래를 불러대더니, 이제는 아예 장벽 밖으로 나가시겠다?”
내 방 한편에 놓인 방한 장비와 등산 도구들을 보며 이안이 그렇게 말했다.
“장벽 밖에서 찾아볼 게 좀 있어서요.”
“찾아? 눈, 언데드, 몬스터. 이거 말고 저곳에서 찾을만한 게 있던가?”
그렇게 말하며 이죽거리는 이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걸 넘어가면 다른 게 있잖아요.”
감시자들이 기록해놓은 장벽 너머의 지형도.
그곳에 그려진 새하얀 부분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잠깐만, 그렇다면 너 지금….”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를 알아챈 듯, 잔뜩 얼굴을 찌푸린 이안이 내게 물었다.
“얼음성에 가겠다는 거냐?”
“예.”
“너 혼자서?”
“안내인 몇 명은 데려갈 겁니다.”
“그걸 여기 기사단장이 허락했다고?!”
“잘 가라고 이렇게 장비도 챙겨줬잖아요?”
“아이구! 잘났다 증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하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이안이 혀를 찼다.
“거기는 또 왜 가겠다는 거냐? 죽다 살아나더니 이제 아예 황천길로 가고 싶어서?”
“죽을 생각 없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니 가는 거고요.”
“필요한 거라니, 그게 도대체 뭔데?”
“무기.”
그 말에 이안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
“…….”
한동안의 침묵이 별실을 맴돌고, 얼마간이 더 지나서야 이안이 내게 되물었다.
“얼음성에, 아직 아키몬드의 무구가 남아있는 거냐?”
평소 같은 장난기 있는 어투가 아닌 진지한 말투.
나 역시도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인간에게는 더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안은 내 전생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한 듯했다.
장벽에 도착하기 전에 있었던 추궁, 그리고 개리슨 신부의 습격.
그리고 그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에 빗대어본다면, 진작에 들통났다고 해도 무방하지.
단지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다.
“제국이 헬리안에게 대규모 지원군을 보냈습니다.”
본가에서 도착한 서신의 내용을 말하자, 이안의 표정이 깊어졌다.
“지원군의 수도, 그 수준도. 지난 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요.”
몇 번에 승리를 거뒀다 한들, 적들의 세는 너무나도 강대하다.
정상급 검사인 루델의 힘을 빌리고도, 헬리안의 등에 비수를 꽂지는 못했으니까.
‘그리고 헬리안이 마시고 있던 그 붉은 액체를 생각한다면…. 얼음성은 반드시 들러야 해.’
거기에 더불어, 내가 얼음성으로 가고자 한 이유는 한가지가 더 있었다.
아키몬드 교단.
내 이름을 딴 집단과 싸우게 된 아이러니는 말할 것도 없었지만, 중요한 건 이 녀석들의 성질이다.
인체실험을 밥 먹듯이 하고, 시체를 기워 누더기로 만들어내는 쾌락살인마 집단.
한 번 실패했으니, 다음에는 더욱 강력한 세력을 갖춰 찾아올 것이다.
“이대로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고 있으면, 전 언제 죽을지 몰라요. 그러니 수단 방법을 안가리는 겁니다.”
지금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은 데스나이트 한 기와 스켈레톤 서른 기.
그리고 몇몇 유령들뿐이다.
열다섯이라는 나이에 비해선 대단한 성취이긴 했지만, 전생의 나에 비하자면 보잘것없는 힘.
향후 방계, 그들을 지원하는 제국.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불안요소를 모조리 제거해야 하는 나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힘이었다.
“장벽에서 돌아온다면 백부님이 절 보호할 이유도 없고, 그러지도 않으실 거잖아요?”
이안은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장벽 내부이기에 숨을 수 있을 뿐, 그는 여전히 제국의 공적.
나와 함께 행동한다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짐작할 수조차 없을 터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내가 그린 지도가 아닌, 감시자들이 내게 건넨 또 한 장의 지도를 펼쳐 들었다.
네크로맨서들에게 붙잡혀, 고깃덩이로 변한 두 명의 감시자.
그들이 마지막으로 전달한, 아키몬드 교단의 이동 경로가 적힌 지도였다.
“추측이긴 하지만…. 얼음성에 이 녀석들이 둥지를 틀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말에 이안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그린 얼음성으로 통하는 경로와 그들이 이동한 경로.
구 선은 어느 한 지점을 시작으로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그럼 저 미치광이들이 아키몬드의 무구를…?”
“가능성은 있죠.”
베르켈과 열세 명의 기사가 아키몬드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고, 대륙을 뒤덮은 500만 언데드들은 제어를 잃고 야생화했다.
체계 없이 날뛰는 언데드들은 연합군에 의해 간신히 각개격파되었고, 언데드의 세력을 장벽 바깥으로 몰아내며 대륙은 아키몬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불안의 씨앗은 항상 남아있다.
아키몬드는 죽었지만, 그의 본거지인 얼음성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베르켈과 열두 기사를 제외하고는, 얼음성에 발을 디딘 인간은 없습니다. 아키몬드의 시신 역시 회수하지 못했죠.”
“그렇다면….”
“얼음성 내부에 있는 수많은 마력기구와 무구들은, 수백 년째 그곳에 잠들어있다는 뜻입니다.”
그 말에 이안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네가 얼음성에 가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들의 손에 넘어가느니, 제가 갖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이안이 못이기겠다는 듯 양손을 펼쳐 보였다.
더 이상 말릴 구실이 없다는 뜻이었다.
“죽지만 마라. 알았지?”
끝내 한 마디를 덧붙이는 이안을 보며, 난 짓궂게 웃으며 화답했다.
“절대 안죽습니다.”
***
“후우…. 후우…!”
쨍그랑-!
투명한 약병이 나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그곳에 한 방울 남아있는 붉은 액체.
그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한 여인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가쁜 숨을 들이키고 있었다.
“클라인…. 클라인…!”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방안이 한 차례 진동했다.
클라인 라인란트.
발에 채이는 돌멩이만도 못한 잡것이.
천하디천한 이민족의 다리에서 태어난 원숭이 새끼가 감히 자신을 능멸했다.
그를 향해 내민 손을 거절하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준 것도 모자라, 끝내는 자신의 기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거기에다가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후계자인 헥토르를….
‘주제도 모르고 내 아들을…!’
거기까지 생각하며 분노를 내뿜고 있을 때였다.
“헬리안 공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는 곧바로 얼굴빛을 바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증오와 광기에 사로잡혀, 악귀와 같은 모습을 했던 헬리안.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요.”
그렇지만 이제 촛불 사이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여느 귀족부인들과 같이 온화한 모습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눈.
헬리안의 눈에서 느껴지는 귀기는 단련된 기사라 할지라도 오금을 저릴 정도가 되어있었다.
“경과가 좋아 보이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두 달 정도면 완성되겠군요.”
맑은 청년의 목소리가 헬리안이 있는 서재를 가득 채웠다.
“그래요. 두 달….”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신부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교단에서 제시한 사항. 변동은 없겠죠?”
“물론입니다. 공후.”
만면에 자상한 미소를 띤 신부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검은 장발이 신부복을 스쳐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상응하는 금액과 ‘재료’를 내어주신다면, 교단은 향후 있을 전쟁에서 공후님의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좋아요. 아주 좋아.”
신부의 그 말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헬리안이 창밖으로 펼쳐진 자신의 영지를 보았다.
한때는 자신이 아닌 폴와이번 공작의 것이었던 땅.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위, 땅, 권력, 돈, 심지어는 힘까지!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어, 온 세상을 자신의 발아래에 놓을 것이다.
‘그래…. 앞으로 조금만 더…!’
쿨럭!
이를 드러내며 큭큭대던 헬리안이 별안간 마른 기침을 해댔다.
입을 틀어막은 손에 흥건히 고여있는 피.
순간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였지만, 이내 그 색깔을 확인하고는 안심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이다. 성혈이 아니라, 내 피야…!’
루비처럼 투명한 색이 아닌 탁한 피.
자신이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던 라인란트의 피가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오히려 희열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 이제 난 라인란트 따위가 아니야.
신성한 피를, 성혈을 받아들인 선택받은 인간…!
“팔리만 대주교.”
자신의 등 뒤에 선 남자의 이름을 부르자, 검은 장발의 신부, 팔리만이 고개를 숙였다.
“교황 성하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 주길 바래요.”
“분부 받들겠습니다.”
“아, 그리고 또 한가지.”
뒤이어 생각났다는 듯, 팔리만을 불러세운 헬리안이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우리가 친구라고는 하지만,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쿠르르르르…!
헬리안의 그 한마디와 함께, 방 안의 모든 기물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쩌적! 쩌적!
압력을 이기지 못해 벽난로와 대리석 조각 곳곳에 균열이 갔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모든 공간을 장악했지만, 그 압력을 정면으로 받는 팔리만은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러 두 사람의 대치가 어느 정도 지속되었을 때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헬리안 공후 마마.”
마마.
대주교 정도 되는 자가 자신을 향해 극존칭을 사용하자, 헬리안은 만족한 듯 그를 압박하던 기운을 거두었다.
“당신께서는 이미 몸 안에 성혈을 가득 머금고 계시니.”
그렇게 말한 팔리만은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서재 작자에 놓았다.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상자.
헬리안이 그것을 열자, 붉은 액체가 담긴 병 세 개가 불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아아…!”
탐욕에 찌든 눈이 약병을 훑는 것을 보며 팔리만의 눈이 곡선을 그렸다.
“당신은 곧,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힘을 휘두르게 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