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까마귀 둥지
“헉…! 헉…!”
장벽을 습격한 언데드 무리들을 몰아낸 뒤.
큰까마귀 기사단 코락스와 이안, 그리고 감시자들이 달리고 있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클라인 공자가 홀로…!”
“걱정 말라고는 했는데,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지. 서두르게!”
이안의 말에 설원을 달리는 코락스의 발걸음이 다급해졌다.
수천 구가 넘어가는 거대한 언데드 무리.
이안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장벽 내에서도 수많은 사상자를 감수해야 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렇지만 그 습격 외에도 기사들이 가져온 정보는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양동이라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장벽 너머에 있는 것은 민간인 거주구.
장벽을 지키는 기사, 감시자, 그리고 경계병들의 태반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다.
‘만약 네크로맨서들이 이를 노리고 후방을 쳤다면 병사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거기까지 생각하던 코락스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최악의 상황.
자신이 별실에 연금시킨 클라인 공자는 그것을 예견하고, 자신들에게 경고한 것이다.
“늦지 말아라…! 제발…!”
클라인 공자의 검술이 고강한 것을 안다.
사령술이라는 낯선 힘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지만 코락스는 쉽사리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수적 우위를 넘어설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정도로 까다로운 녀석들이면…!’
장벽을 넘어온 언데드들을 떠올리며, 코락스는 이를 악물었다.
일반적인 병장기는 먹히지 않고, 미력을 품은 검만이 언데드의 살을 베어낼 수 있었다.
발톱은 스치기만 해도 극심한 중독 증세를 보이며, 설사 죽인다 해도 시체는 폭발하여 썩은 피를 사방에 흩뿌려댔다.
그런 것들이 수천 마리씩 몰려온 상황이니, 장벽에 남아있는 기사들은 전부 체력이 바닥난 상태.
오직 자신과 이안, 몇몇 감시자들만이 뒤늦게 클라인을 도우려 나선 것이었다.
“단장님! 여기입니다!”
석궁을 짊어진 감시자가 그렇게 외치며 풀숲 한구석을 들어냈다.
“이런 곳에 굴이 있었단 말인가?”
“허…! 이거 자칫 잘못하면…!”
클라인이 일러준 위치에 난 굴.
그것을 확인하자 코락스는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피 냄새…. 죽은 피 냄새군.”
“치잇!”
먼저 지하 통로 속으로 몸을 날린 것은 이안이었다.
“위험합니다! 안에 뭐가 있을지…!”
“뭐가 있기는! 다 죽어가는 애새끼 하나밖에 없다!”
감시자의 말을 끊은 이안의 호통에 코락스 또한 지하로 몸을 날렸다.
“크윽?!”
지하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짙은 혈향.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눌러 담으며 이안은 지하 통로 깊은 곳을 달렷다.
“죽었기만 해 봐라. 이 망할 조카놈아…!”
그렇게 되뇌이며 한참을 달려간 끝에, 이안이 느낀 것은 미약한 소년의 숨소리였다.
“생각보다 많이…. 늦으셨네요.”
후우.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동굴 한쪽 벽에 기댄 채 자신을 부르는 클라인.
마력 파장을 통해 주변을 확인한 이안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걸 전부…. 혼자서 막았단 말이냐?”
거대한 누더기 언데드가 열다섯 구.
들개처럼 작은 체구의 짐승 괴물이 스무 구.
그리고 어림잡아 백 구는 되어 보이는 좀비들과, 그것을 조종하는 스무 명의 네크로맨서 까지.
“머리에 열이 너무 올라서…. 무리를 좀 했습니다. 마기를 너무 과하게 써서….”
거기까지 말한 클라인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다.
황급히 그의 몸을 받아들자, 미약한 숨소리와 함께 소년의 어깨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안 님, 괜찮으십니까?”
뒤이어 통로 속으로 들어온 것은 기사단장 코락스였다.
“흡…!”
횃불을 든 채 지하통로로 들어온 그는 눈앞에 펼쳐진 피바다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거의 중대 규모와 맞먹는 병력을, 혼자서…!”
일대일로 대결한다 했을 때, 코락스는 클라인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사령술과 검술을 혼합한다 한들, 그것들을 모두 파훼할 수 있는 마력과 검술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클라인이 상대한 저 언데드 무리를 홀로 상대하라고 한다면?
장담할 수 없었다.
‘클라인 공자 대신 내가 이곳에 있었다 해도, 저들을 전부 틀어막을 수는 없다.’
자신은 기사.
상대의 진형을 돌파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집단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다.
가능하다 한들, 그리 내버려 두지도 않겠지.
소수의 괴수로 시선을 끌고, 남은 병력을 민간인 거주구로 끌고 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클라인은 달랐다.
그의 전투방식은 일인군단.
홀로 군대 전체를 틀어막을 수 있는, 집단전에 최적화된 방법.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민간인 거주구는 진작에….
“깨어나면 할 말이 많겠군. 그렇지 않나?”
의식을 잃고 쓰러진 클라인을 짊어진 채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예. 그럴 것 같습니다.”
전투 현장을 곱씹던 코락스의 입에서 한참 만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늘어진 클라인을 보는 코락스의 시선에서는, 이전과 같은 적대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
눈을 뜨자, 익숙한 임시병동의 허브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깨어나셨어요!”
다급한 파이의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황급히 방 밖을 나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으, 머리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은 장막이 낀 듯 흐릿한 시야와 쉴 새 없이 골을 울리는 망자들의 하운팅.
허용량 이상으로 마기를 운용했을 때 나오는 부작용이었다.
‘어지간히 열이 뻗치긴 했나 보군.’
기억을 더듬어 내가 이곳에 누워있는 연유를 생각해냈다.
분명 아키몬드 교단이라는 개소리를 듣고, 뚜껑이 열려서 미친개처럼 날뛰었지.
그리고 그 반동 때문에 앉아있다가 정신을 잃었고….
“마, 마실 수 있으세요?”
흐릿한 머릿속을 다잡는 사이, 파이의 목소리와 함께 허브차가 눈앞에 나타났다.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받아들고, 따뜻한 차를 한 모급 입에 머금었다.
긴장으로 잔뜩 조여진 몸이 풀리고, 나른한 피로감이 온몸을 감쌌다.
“저, 저기….”
그렇게 오랜만의 휴식을 즐기는 사이.
말을 더듬던 파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날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
영문을 모른 채 멀뚱히 그것을 보고 있자, 파이가 황급히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그, 공자님이 막아주신 민간인 거주구에, 가족들이 있었어요. 엄마랑, 남동생이….”
“아, 그랬습니까?”
그제서야 인사의 이유를 알아낸 난 손을 내저으며 차를 한 모금 입에 가져갔다.
‘원래 같았으면 더 떠받들라고 유세라도 부릴 작정이었는데….’
허탈한 마음으로 흐르는 찻물을 바라보았다.
북부인들을 언데드로 만들어 장벽을 습격하던 이들.
그들은 내 이름을 내걸고, 날 숭배하며, 내 지식을 탐독하고 있었다.
‘달리 생각하면, 저들을 만든 책임도 내게 있는 거겠지.’
지나친 비약이라는 것을 안다.
저들은 단지 내 명성과 힘에 매료되었을 뿐, 그 속은 나와는 천지차이인 것도.
그렇지만 그렇게 훌훌 털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들에 의해 희생된 이들에게 있어서, 아키몬드라는 이름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을 테니.
“……씨발.”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으며 찻잔을 내려놓을 때였다.
끼이익.
“깨어나셨습니까, 공자님.”
나무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큰까마귀 기사단장, 코락스.
그는 감시자들과 부단장, 그리고 몇몇 기사들을 대동한 채 말없이 다가왔다.
시커먼 가죽 갑옷 차림의 남자들이 일제히 다가오는 것이,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멋대로 뛰쳐나간 것 때문이지? 이젠 나도 모르니까 맘대로 해! 연금이든 추방이든…!”
마치 전장에 나가는 듯 결연한 눈빛.
그것을 보며 지레짐작한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철컥!
각반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날 둘러싼 기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
아니, 치유사도 그렇고, 이 기사들도 그렇고 왜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거야?
왜 이러는지 까닭은 알려줘야지!
“공자님의 헌신 덕분에, 민간인 거주구에 살던 이들이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기사들을 대표해 코락스가 입을 열었다.
“이를 몰라 뵙고 공자님을 연금한 점. 제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공자님을 고립시키려 한 점…. 큰까마귀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깊이 사죄드립니다.”
“…어, 알아주면 됐고.”
멋쩍게 웃으며 코락스의 사과를 받았다.
말인즉, 상급자 명령 무시하고 뛰쳐나간 거, 명령 불복종하면서 대든 거. 전부 불문에 붙인다는 거겠지?
그거만 해도 감지덕지다.
적어도 돌아갔을 때 하인켈한테 책잡힐 일은 없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스르릉-!
갑자기 코락스가 자신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나에게 건넸다.
“…이건 또 뭔데?”
어안이벙벙한 채 그렇게 물은 날 향해, 굳은 표정의 코락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벽의 은인을 허투루 대한 죄, 백 번을 사죄해도 모자란 것을 압니다. 그러니….”
“그러니?”
내 되물음에 그가 천천히 자신의 오른팔을 걷어 내밀었다.
“잘라주십시오.”
….
…….
……….
야 이 미친, 뭐?
손에 쥐어진 검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주변을 둘러봤다.
“….”
“…….”
기사들도, 부단장도, 심지어는 이 중 가장 믿을만했던 파이조차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파이 같은 경우는 되려 울음을 꾹 참으며 지혈제와 붕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아니, 안말려? 진짜 잘라야 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안이 있어야 할 곳을 돌아봤지만, 이 노친네는 중요한 순간에는 보이지를 않는다.
‘미치겠네. 이걸 어떻게 해야….’
필요 없다고 물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분위기를 보니, 안자르겠다고 하면 지들이 알아서 잘라버릴 태세였으니까.
그렇게 코락스의 검을 손에 쥔 채 고심을 거듭한 결과.
‘…아, 그래. 그러면 되겠구만?’
번뜩 머릿속을 스치고 간 생각에, 난 검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오 머리야….’
아직 마기를 과용한 충격이 남은 것인지, 상식을 뒤집어엎는 이 기사놈들 때문에 골이 울려서인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검을 쥔 손을 위로 올렸다.
드디어 안심한 듯 눈을 감는 코락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콰직-!
시퍼런 검날이 나무를 꿰뚫는 소리가 나자, 그것을 보던 파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지만 이내 살을 가르는 소리도, 혈향도 느껴지지 않자, 다른 모든 기사들이 눈을 뜬 채 나를 보았다.
검은 코락스의 팔이 아닌, 나무 바닥을 꿰뚫은 채 꽂혀있었다.
“얻을 것도 없는데, 내가 뭐하러 네 팔을 잘라? 싫어 새끼야.”
뜻밖의 상황에 모두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몸을 낮춰 코락스와 눈을 나란히 한 뒤 그를 향해 말했다.
“니 팔은 됐고, 거기에 상응하는 걸 내놓으면 돼. 그걸로 이 일은 끝이야.”
당사자인 내가 그렇게 못을 박으면 기사들로서도 이의를 댈 수는 없을 터.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또한 생각을 마친 듯, 코락스가 내게 물어오자, 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곧바로 그에게 말했다.
“장벽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길잡이가 필요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