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오! 나의 신이시여(4)
대륙 전체를 휩쓴 아키몬드의 언데드 군단.
500만 언데드 군단이 자랑하는 최고의 힘은 지치지 않고, 죽지 않는 병사였다.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는 언데드.
그들의 진정한 힘은 무력이 아닌 노동력에 있다.
한 달이 걸려 만들어낼 요새를 사흘 만에 축성하고, 산을 이틀 만에 통째로 갈아엎는 어마어마한 공사속도.
대륙 극지방에 위치한 수많은 얼음 성과 빙하 요새들 또한,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으니까.
“땅굴…. 이요?”
“북부에서 장벽 뒤쪽까지 이어지는 굴이라니, 허무맹랑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내 말을 들은 기사들은 그것을 헛소리라 일축했다.
아키몬드와 그의 군대는 200년이라는 시간에 파묻혀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
이제는 그 위용을 기억하는 이도, 그 힘을 믿는 이들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나 같은 놈이 두 번 다시 없을 거란 보장도 없는데, 전부 잊혀졌단 말인가…!’
새삼 제국과 연합이 얼마나 철저하게 내 존재를 지우려 했는지 실감이 났다.
대륙의 수많은 전략가들이 분석한 아키몬드의 전술.
그러나 지금에 와선,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장본인인 나 밖에는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 장벽에 병력을 집중시킬 때가 아니야. 1개 중대, 아니, 대대는 후방으로 돌려야 한다고!”
방 한가운데에 떠오른 지도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지만, 기사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코락스가 단단히 명령해둔 것인지, 아니면 그 특유의 폐쇄성인지.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를 않았다.
“적 전력 규모를 생각한다면, 병력을 후방으로 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간다는 거 아니야! 당장 열어!”
기사들을 향해 열변했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곧 단장님의 지시가 올 겁니다. 그때까지….”
“답변이 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라고? 그게 지금 가당키나 한 소리냐?”
“공자님이 지금 밖으로 나가겠다는 것보다는 타당한 말이지요.”
“이……!”
숨이 턱 막혔다.
"누군지도 모르는 외부인의 말만 믿고 병력을 뺄 수는 없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명예는 저희들의 것입니다. 당신은….”
“그놈의 의무, 그놈의 외부인, 그 망할 놈의 명예!”
계속해서 잡고 있던 한줌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내 말이 맞으면, 너희들은 후방에 남겨진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걸 받아들일 거냐?”
그 말에 요지부동이던 기사들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잘 생각해라. 너희들이 지키는 것이 장벽이냐? 아니면 그 너머에 살고 있는 생명이냐?”
그들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
그리고 마지막 경고이기도 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두 기사의 얼굴.
그렇지만 이후 이어진 그들의 대답은, 맥이 풀릴 정도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기사 된 자로서, 그런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에 경거망동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수많은 세월 동안 지켜온 장벽입니다. 이 이상 참견 마십시오."
….
…….
이제 됐다.
더 이상 말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 대화니 설득이니, 나도 모르는 새에 베르켈 새끼한테 많이 물들었어.’
저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런 푸닥거리를 할 시간이 없다.
시시각각 적의 별동대가 가까워지고 있는데, 이 와중에 어쭙잖은 대화라니.
역시 이건 내 방식이 아니다.
“헥토르!”
마기를 끌어올려 이름을 불렀다.
내가 마주 보고 있는 문 건너편에서 그림자로 몸을 두른 기사가 나타났다.
“데스나이트?!”
“클라인 공자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 돌발행동에 그들 역시 당황한 듯, 황급히 검 손잡이를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당장 언데드를 거두십시오! 이는 명백한 지휘권 침해…!”
“침해는 니미, 알 게 뭐야. 뒤지기 싫으면 문에서 비켜!.”
다급한 기사의 목소리를 그렇게 일축하며, 난 데스나이트 헥토르에게 명령을 내렸다.
키이이잉-!
순식간에 이뤄진 올려치기.
내가 직접 새겨놓은 유성검의 초식이 데스나이트의 손을 통해 펼쳐졌다.
마력이 없는 반쪽짜리 기술이 아닌, 진짜 기사의 검격이었다.
쿠콰아앙-!
폭음과 함께 내가 서 있던 문이 터져나갔다.
문가를 자욱하게 둘러싼 탁한 연기.
기사들도 내가 이렇게까지 막 나갈 줄은 몰랐던 것인지, 황급히 검을 뽑으며 내게 달려들려 했다.
“젠장, 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막…!”
그렇지만 기사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빠각!
네크로맨서의 눈은 상대의 형상이 아닌 혼을 보는 법.
“끄으으?!”
연기 속을 뚫고 정확하게 턱주가리에 꽂힌 내 발차기에 기사 중 한 명이 정신을 잃었다.
“난 분명 경고했다.”
“버켄! 이런 제길…!”
눈앞에서 동료가 쓰러지는 걸 보자 다른 기사가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그렇지만 그 순간.
“거기까지일세.”
들고 있던 술병으로 기사의 손목을 막아낸 이안이 빙글빙글 웃었다.
“당신…!”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나.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을텐데, 한번 맡겨 봐.”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한 이안은 곧바로 기사의 목덜미를 쳐 그를 기절시켰다.
기사 두 명을 제압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1분 남짓.
빠른 속도였지만, 내게 있어서는 답답할 뿐이었다.
“제기랄, 진작에 이랬어야 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밴시의 안내에 따라 장벽 안을 내달렸다.
“우회하는 놈들도 규모가 좀 있어 보이는데, 내가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냐?”
날 따라오는 이안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규모로 따지면 장벽 쪽이 시급한 것도 사실이에요.”
시시각각으로 장벽을 기어오르는 언데드들.
지금 장벽이 가진 전력으로는 그것들을 틀어막기에도 힘이 부칠 터였다.
“그쪽으로 가서 언데드를 전부 처리하고, 코락스를 데려와 주세요."
별동대를 막겠답시고 장벽을 기어오르는 언데드를 방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주객전도다.
그런 내 설명에 이안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별동대를 너 혼자 막겠다고? 정말 가능한 거냐?"
걱정인지 불신인지 모를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새끼들 사령술 구조는 이미 다 뀄어요. 신경 끄고 가요!"
그렇게 말하자 짧게 혀를 찬 이안이 등을 돌렸다.
그 역시 감지술식으로 적 병력 규모를 알았으니, 내 말에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죽으면 가만 안둔다. 알겠어?!”
퉁명스러운 맹인의 한 마디.
그 말에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으며 그에게 말했다.
“절대 안죽어요.”
***
저벅- 저벅-
장벽 지하.
수백 년 동안 방치된 아키몬드의 비밀통로는 곳곳이 무너진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일반적인 군대에게나 해당 되는 말.
시체를 덧대 벽을 보강하고, 언데드의 힘으로 막힌 벽을 뚫어가자, 그들의 진격은 거칠 것이 없었다.
“도착한다면, 먼저 저항이 불가능한 민간인부터 언데드로 만들어라.”
“적의 사기를 떨어트리겠단 말이군요.”
“그렇지.”
작전을 설명하는 네크로맨서의 입에 비릿한 비웃음이 걸렸다.
“제 가족 친지들이 괴물이 되어서 달려든다면, 저 기사놈들도 한 번은 망설이겠지.”
“그 틈을 잡아낸다면, 이 구역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도 있겠군요!”
“수많은 기사들의 몸뚱이와 물자, 그리고 잊혀진 지식까지.”
“크하하하!”
이곳에 결집한 네크로맨서는 약 200명.
그들이 북부 동토지대에서 축적한 언데드를 동시에 내보내 장벽을 치고, 자신들은 그 후방을 쳐 완전히 포위한다.
그 옛날, 아키몬드가 만들어놓은 이 지하 통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역시, 아키몬드 님은 오늘날까지 안배하신 것이다…!”
“영광스러운 성전에선 쓰이지 못했던 통로!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아키몬드 님…!”
아키몬드.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한 발자국씩 나아갈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는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이 담겼다.
이 싸움으로, 자신들은 드디어 그분의 지식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대륙을 뒤덮은 수백만의 언데드.
그것을 오롯이 홀로 다뤄낸 네크로맨서의 전설, 아키몬드.
그 전설이, 그들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깐.”
그렇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품은 채 나아가던 중.
선두에 선 네크로맨서의 수신호에 그를 따르는 스무 명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앞에 누군가 있다.”
그 말에 방금 전까지 보이던 여유가 사라졌다.
크르르르-!
곧바로 언데드 한 명을 선두에 세워, 천천히 앞으로 전진시켰다.
구륵! 구륵!
썩은 살덩이가 바닥을 훑으며 천천히 침입자의 모습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윽고, 맞은편에 선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선두에 선 네크로맨서가 눈을 크게 떴다.
찰랑거리는 은발에 검푸른 눈.
그리고 허리춤에 찬 검까지.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목표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으니까.
“클라인 공자!”
그의 이름을 부르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소년이 앞으로 나왔다.
“이 오래된 통로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그렇게 운을 뗀 클라인은 얼굴을 찡그린 채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클라인 공자.”
선두에 선 네크로맨서가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소년을 불렀다.
“날 알고 있나?”
딱딱한 목소리가 그에 답하자, 고개를 끄덕인 네크로맨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이지요. 우린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 장벽을 찾아온 것이니까요.”
“날 위해?”
그 말에 클라인이 미간을 좁혔다.
“정확히는 당신이 익힌 사령술, 클레어 공후가 훔쳐 간 우리들의 지식을 위해서요.”
“…….”
클라인은 대답이 없었다.
금시초문이었던 것일까? 그럴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지식을 익혔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저 소년이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 뿐.
“제국이 사주한 건가? 날 데려오라고?”
“하! 제국이요?! 웃기는 소리!”
클라인의 추측을 들은 남자는 불쾌하다는 듯 코웃음 쳤다.
“진짜 신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배교자들을, 우리가 왜 따르겠습니까?”
“배교자?”
제국을 칭하는 네크로맨서의 말에 클라인의 표정이 한층 더 괴상해졌다.
“그래요! 배교자!”
그렇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국에 대한 모욕을 거두지 않았다.
“그럼 너희는 누구지? 교단? 아니면 다른 조직인 건가?”
“흐하하하하! 아니요! 아니지요!”
남자는 마치 클라인의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양팔을 벌린 채 동굴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우리들은 아키몬드 교단!”
아키몬드.
그 말을 듣자 클라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세계를 벌하려 하신 진정한 신, 아키몬드 님을 부활시키기 위해 일어선, 신성의 첨병입니다!”
황홀감에 젖은 채 남자가 소리쳤다.
그를 따르는 다른 네크로맨서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희열감에 몸을 부르르 떠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을 흘리는 자들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
누군가는 이것을 광신이라 말한다.
그러면 어떠한가?
지상에 강림한 신을 섬기는데, 미치지 않을 이유는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는 클라인 공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공포를 느낀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처럼 경외감을 느낀 것인지, 클라인 공자는 아무 말 없이 자신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정적.
처음에는 놀란 듯, 그다음에는 불쾌한 듯 표정을 뒤섞던 클라인은 이윽고.
“하, 하하! 하하하하!”
그들의 모습을 보며,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