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눈 덮인 장벽으로(2)
“….”
“……!”
정복을 입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임시병동에는 몇 분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뿌득!
아니, 굳이 말하자면 침묵이 아니지.
보란을 포함한 다른 기사들이 날 보는 표정은, 마치 적을 보듯 살벌했으니까.
‘아무리 몰락하네 뭐네 해도, 공작가 끗발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양측 다 섣불리 굽히고 들어갈 수는 없는 상황.
그렇지만 이 대치 구도에서 유리한 것은 공작가를 등에 업은 나였다.
‘물론, 사후 보고를 받으면 하인켈이 날 가만두지 않겠지만.’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는 것을 억지로 눌러 담았다.
‘장벽에 도착하거든, 그곳의 위계를 존중하거라.’
떠나기 전 하인켈이 당부한 말을 사흘만에 아작냈으니.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배 째라고 해. 먼저 시작한 건 그쪽인데 뭐 어쩔거야?’
끌어오르는 불안을 뒤로 넘기며보란을 마주보던 그때였다.
“저, 저기…!”
건드리는 순간 폭발할 듯 팽팽한 침묵을 깨트린 것은, 피온이라는 치유사의 작은 목소리였다.
“공자님 상처가 깊으세요. 면회는, 나중에….”
한 박자 더 이어진 정적.
그렇지만 피온의 그 말을 듣자, 보란이 내 얼굴을 살폈다.
‘이 쯤에서 멈추고 싶겠지.’
지금 나와 대치라고 있는 보란은 부단장.
큰까마귀 기사단이라는 폐쇄적인 집단의 일원이었지만, 계급과 위계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방금 그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한 마디와 함께 보란이 손짓하자, 날 둘러싼 기사들이 곧바로 물러섰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기사들은 병동을 나갔다.
들어올 때보다는 한층 거칠어진 그들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져 갈 때쯤.
“휴우~!”
긴장이 풀린 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허허, 저 아이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했군그래?”
즐겁게 이 대치상황을 구경하던 이안이 그렇게 말하자 나 역시 표정을 풀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하마터면 진짜로 칼 뽑을 뻔했어요.”
그렇게 말한 뒤 날 보고 있던 피온이라는 치유사에게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원만하게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에, 예…?”
방금 전가지 보이던 살벌한 표정이 사라지자, 날 보는 피온이 흠칫했다.
‘아니, 그렇다고 쟤한테까지 핏대를 세울 수는 없잖아.’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이 장벽에서 치유사들과 척을 진다?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저 치유사는 일주일동안 날 간호해주기도 했으니, 저 기사들처럼 쓸데없이 적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이구, 여자 앞이라고 목소리 변하는 것 좀 봐라. 무슨 이중인격이냐?”
하지만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날 보며 넌더리를 냈다.
“실없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백부님. 그리고….”
그의 이죽거림을 대수롭지 않게 받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 이중인격을 만나면 그 말 못하실걸요.”
폴와이번의 욕쟁이 공녀.
라이아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지만, 이안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렷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쩔 셈이냐?”
그러나 의문도 잠시.
잡담을 멈춘 이안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덕분에 안그래도 고깝던 네 평판은 이제 바닥을 칠 테고, 장벽 전체가 가시방석이 될 텐데.”
이안의 말대로, 부단장에게 당짜를 놓은 이상, 난 저들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상황이다.
그렇지만 후회는 들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어줍잖은 대화로 신임을 얻느니, 그냥 내가 장벽을 넘어서 밖으로 나가는 게 빨랐으니까.
그리고, 방금 전 설전으로 얻은 것이 아예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애물단지 취급이나 받으며 여기 쳐박히느니, 미친놈이 되는게 백 번 낫죠.”
날 보던 기사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그렇게 답했다.
처음 날 본 기사들의 시선은 무시, 혹은 무관심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들이 날 보는 시선은 적대감, 그리고 그 이상의 경계로 바뀌었다.
“덕분에 적이라고 생각할지언정, 무능하다는 생각은 안할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뒤, 난 가져온 짐을 풀어 빈 책에 사령술 술식들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오자마자 실컷 치고박더니, 이젠 또 뭐하냐?”
“어차피 사흘 동안은 회복기간 아닙니까? 노느니 염불한다고, 밑준비를 좀 해 둬야죠.”
새하얀 종이를 순식간에 채워가는 룬과 상징,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기하학적인 선.
그것을 본 이안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 있는 동안 검이나 휘두를 생각이었는데, 바람 잘 날이 없겠구만.”
***
“여기인가?”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져 있어. 확실해.”
장벽 외부.
북동부 툰드라 숲 속.
산벌레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살지 않는 불모의 땅을, 두 남자가 거닐고 있었다.
등에는 석궁, 한 손에는 단창.
그리고 설피와 모피 옷으로 단단히 몸을 싸맨 두 남자는 장벽을 수호하는 감시자.
살을 에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기사님들은 감시초소에서 꿀빨고, 우리 애들만 밖에서 쌩고생이네.”
“우리가 찾아낸 몬스터들을 소탕하는게 기사들이다. 그런 식으로 폄하하지 마.”
남자의 말에 불평을 내뱉던 동료가 알겠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래서, 그 도련님은 뭐야? 교대할 때 들어보니까 부단장이랑 한판 붙었다던데.”
그렇지만 임무 중에 피는 이야기꽃을 마다할 수는 없는 법.
은근슬쩍 들어오는 질문에 피식 웃으며 남자가 답했다.
“입조심해. 공자님이시다.”
“쳇, 공자님은 무슨.”
짐짓 경고했지만, 동료가 보인 것은 비웃음이었다.
“본가에서 사고 치곤 이쪽으로 도망 온 거라며 장벽이 무슨 자기네들 쓰레기장이야?”
“모르지. 들리는 소문으론 이것저것 한다고는 하는데.”
라인란트에 대한 욕이 나왔지만, 남자는 굳이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라인란트 기사 출신인 큰까마귀들과는 달리, 감시자들은 장벽 주변에 분포한 정착촌 출신.
본가라고 해 봤자, 머나먼 다른 지역 얘기일 뿐이다.
“여~러가지 하고 있지. 그 애새끼, 사령술 쓴다면서?”
“확실한 소문은 아니야. 혹시라도 복귀해서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며 선을 지키는 남자였지만, 그 역시 장벽에 찾아온 불청객이 달갑지 않기는 매 한가지였다.
고강한 검술과 심성을 지닌 델라인 공자와는 달리, 클라인 공자에게 붙은 소문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아키몬드의 환생, 사령술에 심취한 둘째 부인 등.
그렇기에 그가 장벽에 찾아온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그의 방문을 반기는 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그렇게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 한 지점에 도착했다.
빽빽한 숲 속 한 구석에 형성된 공터.
곳곳에는 사람이 있었던 흔적과 동물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정지.”
선두에 선 남자가 수신호하자 등 뒤를 경계하던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아 몸을 낮췄다.
“분변이다. 얼마 되지 않았어.”
선두에 선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수풀이 헤쳐진 장소를 손으로 더듬었다.
곳곳에 널브러진 음식 찌꺼기와 불탄 장작은, 누군가가 이 곳에서 야영을 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흔적도 제대로 안지우고, 음식 냄새도 그냥 풍기는군. 완전히 초짜들이야.”
그렇게 말한 남자가 얼굴을 감싼 두건을 벗어 펜 하나를 입에 물었다.
“지도.”
“여기 있어.”
동료가 건넨 지도를 받아든 남자는 그곳에 야영지의 위치를 표시했다.
“역시, 이 놈들은 외부에서 온 놈들이야.”
입가를 비튼 남자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의 동료들이 지난 일주일 동안 찾은 비슷한 흔적들.
그것들을 선으로 잇자, 마치 길과 같은 경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말도 안돼, 여긴 몬스터들의 영역이잖아?!”
후방을 경계하던 남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지도에 그려진 선은 몬스터 서식지를 정면으로 관통하는 경로.
설원을 지나는 것조차도 목숨을 걸어야 할 판에, 몬스터들의 영역을 정면으로 뚫고 간다니?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그리고 한두 놈도 아니고.”
그렇게 말한 남자는 지도를 갈무리한 뒤 숲의 한 지점을 보았다.
그들이 분석한 경로를 봤을 때, 이 정체불명의 집단이 향할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남은 건, 장벽으로 돌아가서 기사단에 이 사실을 보고하면….
부스럭!
“뭐지!?”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곧바로 석궁을 들어 그곳을 겨눴다.
철컥!
후방을 경계하던 동료는 곧바로 반대 방향을 활로 겨누며 사각을 없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계.
그렇지만 잠시 후.
뀨꾹!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흰 토끼였다.
“젠장, 깜짝 놀랐네!”
작은 토끼의 모습이 보이자, 그제서야 안심한 듯 감시자 한 명이 활을 회수했다.
“돌아가자 대장. 우리 둘이서 들어가 봤자, 소용 없…!”
“씨발!”
석궁을 지닌 남자에게 그렇게 말하던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탁!
“으, 으악?!”
놀랄 시간조차 없었다.
대장이라 불린 남자가 곧바로 그의 옷깃을 잡아, 미친 듯이 내달렸기 때문이다.
“뭐, 뭐야!? 왜 그러는건데!?”
“정말로 모르겠나?!”
영문을 모른 체 달리던 남자가 묻자, 얼굴이 파랗게 질린 대장이 소리쳤다.
“지금은 10월이다! 동면 중인 토끼가 왜 지금, 하필이면 저 동토지대에 나타났느냔 말이야!”
그 말을 듣자, 방금 전까지 얼굴을 찡그려 트리던 남자 역시, 눈을 크게 떴다.
“자, 잠깐만. 그럼 저 토끼는…?”
공포감에 잔뜩 질린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뀨꾹! 뀨우우욱?! 꾸우우-!!
방금 봤던 새하얀 토끼가 자신들을 뒤쫓고 있었다.
“이런, 미…. 친…!”
이제 그가 달리는 속도는 대장보다도 더 빨라져 있었다.
두두두두-!
자신들을 쫓는 토끼의 몸은 수십 배로 부풀어있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토끼의 머리.
수십 배 가까이 부풀어 오른 토끼의 몸에는, 수많은 토끼 머리가 빼곡하게 붙어있었다.
“몬스터인가?!”
“아니, 아니야!”
비명과도 같은 대장의 목소리가 그의 추측을 부정했다.
죽은 피와 오물을 흩뿌리는 저것은 몬스터가 아닌 언데드.
산짐승의 시체를 엮어 만들어낸,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괴물이었다.
“어떻게든 장벽까지 달려! 기사단에 알려야…!”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네.”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에 답한 것은 낯선 목소리였다.
푸슉-!
도망치는 그들을 향해 쏘아진 검은 화살.
그의 동료가 황급히 몸을 틀어 그것을 피했지만, 그다음에는 운이 좋지 않았다.
“으악?!”
황급히 몸을 튼 반동으로 발이 걸린 그 순간.
자신들을 쫓던 괴물이 그대로 그의 몸을 들이받아 버린 것이었다.
으직!
“꺼어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남자의 몸이 짓이겨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달리던 남자의 앞으로 수많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
검은 로브 차림의 남녀들.
그들의 주변에는, 그들을 호위하는 듯한 각양각색의 시체들이 서 있었다.
마치 시체로 만들어낸 전시회를 보는 느낌이었다.
“크으…!”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가 석궁을 들었다.
죽음이 가까워졌다 한들, 그는 감시자의 일원.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