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34화 (34/209)

034. 눈 덮인 장벽으로(1)

“아으….”

온몸을 둔기로 얻어맞은 듯 뻐근했다.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시야.

탈력감에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긴 살았는데,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군.’

속으로 망연히 중얼거리며 기억에 남아있는 마지막 광경을 떠올렸다.

성법기의 방어를 뚫어낸 이안과 내 합격기.

숲속으로 처박힌 개리슨.

그리고….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기억을 더듬어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 신부 새끼가 그거 하나 맞았다고 죽을 리가 없어. 분명히 후속 공격이 왔을 텐데?’

혼란스러운 머리를 애써 부여잡으며 생각을 거듭하던 때였다.

“저, 정신이 좀 드세요?”

낯선, 그렇지만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자 비로소 내가 누워있는 곳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끼익…. 끼익….

눈보라에 삐걱대는 나무 소리, 추운 공기를 덥히는 랜턴, 모닥불.

그리고 은은하게 피어오는 허브 차 냄새까지.

“여긴…?”

“북부 대장벽 이, 임시병동이에요.”

내 물음에 답한 맑은 목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은은하게 방 안을 맴돌던 허브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일어나실 수 있으세요?”

“아, 예. 잠시….”

목소리에 답하면서 창밖의 풍경을 살폈다.

눈보라에 뒤덮인 숲의 전경.

마치 망루에서 내려다보듯 높은 위치였다.

“아윽?!”

몸을 일으키려 하자마자 격통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괘, 괜찮으세요?! 역시 아직 회복이…!”

“아니, 아닙니다.”

이를 악문 채 고통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을 쑤시는 감각.

그렇지만 오히려 천만다행이었다.

고통이 남아있다는 말인즉, 감각이 살아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적어도 몸 어딘가가 불구가 된 것도 아니고…. 이걸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지.’

유년기에 사이클을 돌리지 않은 내 몸은, 비유하자면 꽉 막힌 수로와 같다.

즉, 이안의 마력을 주입한 것은 꽉 막힌 물길에 바다를 들이부은 격.

들어오는 마력을 빠르게 배출하지 않았다면, 온몸이 걸레짝이 되었을 것이다.

“후우…!”

심호흡을 몇 번 하자 어느 정도 고통이 누그러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적응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러는 사이, 내 옆으로 다가온 목소리가 찻잔을 내밀었다.

“여, 여기요. 드시면 좀 나아질 거예요….”

“감사합니다.”

상황을 조합한다면, 목소리의 주인은 날 치료한 치유사.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받으며 정중히 예를 표했다.

“아프진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얼굴을 보았다.

북부인 특유의 하얀 피부와 가녀린 팔.

흑요석처럼 검은빛을 내는 눈.

같은 빛을 내는 굴곡진 단발.

순한 인상의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 보고 있었다.

‘대장벽의 치유사…. 너무 어린데?’

나보다도 한두 살 어려 보이는 얼굴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내게 찻잔을 건넨 소녀는 그 자리에서 넋이 나간 듯, 내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에요! 그게, 저….”

내 질문에 화들짝 놀란 소녀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피온, 부탁한 장작 여기 있다.”

나무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부님.”

“뭐야, 벌써 깨어났어?”

마른 나뭇가지를 어깨에 짊어진 이안이 날 보며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겁니까? 개리슨은 어떻게….”

“생명의 은인에게 할 말이 그것 뿐이냐?”

히죽이죽 웃으며 그렇게 말한 이안이 어깨에 짊어진 장작을 내려놨다.

“은인이요?”

“그래 이 버릇없는 놈아.”

그렇게 말한 이안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따악-!

“아윽!?”

청명한 딱밤소리와 함께 이마에 둔탁한 충격이 몰아쳤다.

“장장 사흘 동안 들춰업고 장벽까지 와줬는데, 백부한테 고맙다 소리도 안 해?!”

“푸하하!”

잔뜩 골이 난 채로 그렇게 말하는 이안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저 태평한 면상을 보니, 새삼 살아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

“지켜보겠다니, 등골이 서늘한데요.”

피온이라는 이름의 치유사가 보고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의식을 잃은 후 있었던 일을 들으며 마지막 차 한 모금을 비워냈다.

“그나마 이젠 보자마자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일은 없을테지. 안그러냐?”

“하지만, 불안요소인 건 변함이 없죠. 따로 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턱을 괴었다.

이안이 날 지키는 이유는 하인켈이 부여한 임무 때문.

장벽에서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는 혼자만의 힘으로 개리슨을 견제해야 했다.

‘최악의 상황에는 아린을….’

처음, 개리슨이 날 죽이러 왔을 때를 떠올렸다.

하인켈이 막아서도 멈추지 않던 대행자였지만, 아린이 나타나자마자 습격을 포기했지.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 녀석을….

“쯧.”

거칠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의 내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전력이긴 했지만, 아린의 힘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

억지로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종잡을 수 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로군.’

개리슨과의 싸움을 떠올린 내 눈이 깊어졌다.

마력을 동조시킨 두 검사의 연계로 이뤄지는 절기.

지금의 내가 사용할 수는 없지만, 이것을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했다.

‘데스 나이트를 하나 더 늘려야겠어.’

마력이 없는 나와는 달리, 인공 마력로를 지닌 언데드라면 그 기술을 재현할 수 있다.

마력 파장을 내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니, 차후 연구하면 될 터.

‘루델과 같이 독립적인 언데드로는 어려워.’

연구 목표를 정하는 것과 동시에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수많은 소환문, 계약문의 술식을 떠올렸다.

‘지금 사용 가능한 헥토르를 참고하되, 정밀제어 쪽에 더 힘을 실어서….’

룬의 배열, 마력 파장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연구 방안, 그리고 최종적으로 만들어낼 언데드의 청사진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답답하지는 않았다.

때마침 주어진 두 달이라는 시간.

새 연구를 시작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으니까.

‘그리고 다름 아닌 이 곳이라면…. 재료를 찾는 것도 수월할테고.’

그렇게 생각하며 창 밖의 풍경을 보았다.

대륙을 감싼 철의 장막 너머, 거친 침엽수와 빙하로 이루어진 혹한의 땅.

저 끝에는 네크로맨서 아키몬드의 거처, 얼음성이 있다.

“책임자를 만나야겠습니다.”

“뭐, 지금?”

“예. 빠르면 빠를 수록 좋죠. 조금이라도 빨리….”

그렇게 이안에게 말하던 때였다.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쉿.”

이안의 불평을 끊으며 창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철컥, 철컥.

이곳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병사나 경계병의 것이 아닌, 기사의 것이었다.

“…사실인가?”

“감시자들이 수집한 정보입니다. 형태도 이질적인 데다가, 수는 다섯 배가 넘는다고….”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와 온갖 잡음에 묻힌 희미한 목소리.

오랫동안 이 설원에서 생활한 것이 아니라면, 감지할 수 없는 작은 소리였다.

“단장님께 보고하지. 우선 이 일은 함구하도록.”

“알겠습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굳은 목소리.

그와 함께, 임시병동의 문이 벌컥 열렸다.

“클라인 라인란트 공자님.”

임시병동으로 들어온 것은 방한용 털망토를 걸친 두 명의 기사였다.

“처음 찾아오셨을 때에는 어찌 되는 줄 알았습니다만,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앞장선 흙빛 머리의 기사가 내게 말했다.

검은 가죽 갑옷과 모피.

기사라기보단 사냥꾼에 가까운 차림이었다.

‘큰까마귀 기사단.’

그들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되뇌였다.

장벽 수호의 임무를 띈 라인란트 소속의 기사단.

대륙에서 가장 가혹한 대지를 벗삼아 설원을 누비는 혹한의 기사.

“시기는 조금 늦었습니다만, 북부 대장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두 명의 기사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장벽을 지키는 큰까마귀 기사단의 부단장, 보란이라고 합니다.”

감정없는 기사들이 내게 예를 표했다.

금속이라고는 찾아볼 수 조차 없는 검은 옷의 기사들.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것은 그들의 어께에 박힌 은빛 문양이었다.

“환영, 이라….”

그들의 자부심이기도 한 문양을 눈에 담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고개를 숙인 그들을 대신하여, 날개를 펼친 까마귀의 형상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이곳은 네 자리가 아니라는 듯이.

***

“네 덕에 공자님이 쾌차하셨다. 고생이 많았구나, 피온.”

“아! 아니에요…. 전 그냥….”

잔뜩 어깨를 움츠린 피온의 어깨를 두드린 보란이 피온이라는 치유사를 치하했다.

칭찬이 익숙하지 않은 듯, 얼굴을 잔뜩 붉힌 피온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 했다.

마치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자상한 미소.

그런 그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쉬었다.

‘외지인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군.’

장벽이 지어신 그 날부터 꿋꿋이 이곳을 수호해 온 큰까마귀 기사단.

그런 그들에게 있어, 갑작스레 찾아온 본가의 인물은 불청객에 가까울 것이다.

‘내 주변을 맴도는 소문을 들었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들의 성, 이 장벽이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를 떠올렸다.

얼음성을 시작으로 하여 쏟아져나온 언데드의 군대.

대륙을 유린하던 북부의 망령들은, 아키몬드의 죽음과 함께 야생화하였다.

지휘자가 없는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법.

머리를 잃은 언데드들은 연합군의 반격작전으로 순식간에 각개격파되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박멸하지는 못했겠지.’

내가 만들어낸 언데드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속으로 실소했다.

전쟁을 일으킨 내가 쓰러진 지 200년.

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원한을 잃지 않은 언데드들은 계속해서 장벽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저들의 주적은 장벽을 침공하는 아키몬드의 언데드.

그리고 난, 그와 똑 같은 언데드를 부리는 네크로맨서였으니까.

“명령서는 제대로 확인했습니다.”

하인켈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를 보며 보란이 내게 물었다.

“피온이 말하길, 앞으로 사흘 정도면 회복이 되신다고요.”

“그렇다고 하던데.”

그쪽이 날 불청객 취급하는데, 내가 굽히고 들어갈 필요는 없지.

똑같이 딱딱한 목소리로 답하자 보란의 뒤에 선 기사가 미간을 좁혓다.

“…알겠습니다. 단장님께는 그리 보고드리도록 하죠.”

“아니, 명령서는 내가 직접 전하겠어. 상관에게 인사도 해야하니까….”

초소근무에 배치된 이상, 기사단장은 엄연한 내 상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철컥.

검집이 버클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추가로 들어온 두 명의 기사가 내 앞길을 막았다.

“아직 제대로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자님을 밖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보란이 손짓하자 날 막아선 두 기사가 날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쓸데없는 참견질이 좀 심한데?”

탁!

이대로 얕보일 수는 없는 상황.

침대 한 켠에 놓인 검을 검집째 들어 그들의 손을 쳐냈다.

“어이구, 살벌하구만?”

그 광경이 재밌다는 듯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는 출가외인이니 볼 일 없다 이거지?’

현지의 기사들이 본가의 공자를 가로막는 상황.

일반적인 귀족가였다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이 곳에 내 편은 없었다.

“단지 공자님의 안전을 위할 뿐입니다. 부디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보란의 말에 뒤에 선 기사가 허리춤에 찬 검을 보였다.

이 이상 저항한다면, 무력으로 제압하겠다는 뜻.

검을 뽑지 않았을 뿐, 명백한 대치상황이었다.

“하아….”

살벌한 그들의 모습을 보며 보란 듯 한숨 쉬었다.

‘같은 집 식구니 좀 좋게좋게 가려고 했는데 말이지.’

명백한 월권에 기선제압.

이걸 용인한다면 난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두 달동안 한솥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렇게 답답하게 살 수는 없지.

“감히 누구 안전에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는 거지?”

판단을 마친 난 두르고 있던 모피 망토를 벗었다.

강수는 강수로 맞받아친다.

그렇게 생각하며 난 보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라인란트 제 2 공자, 클라인 라인란트가 명한다.”

두꺼운 가죽 속에 숨겨진 라인란트의 정복이 나타났다.

본가의 일원임을 뜻하는 문양이 내 가슴팍에서 빛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니 위, 내 밑으로 다 불러와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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