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재회(1)
“아아악?! 야 듄켈, 부탁이니까 제발 살살 좀…!”
“살살 하면 안하느니만 못합니다. 자, 한번 더!”
“아아아악-!”
교단의 대규모 습격이 이루어진 지 이틀째 되던 날.
누적된 피로와 근육통으로 골골대던 날 기다린 것은 듄켈이 시술하는 기사단식 마사지였다.
뿌득! 뿌드득?!
“야, 잠깐! 방금 그 소리 뭐야? 부러진 거 아니야?”
“안 부러집니다. 가만히 좀 계십쇼.”
“아니, 관절이 이상한 데로 돌아갔는데? 이게 마사지라고?”
이런 식으로 듄켈의 손에 이끌려 온몸이 뒤틀리기를 한 시간.
겨우 해방된 난 한숨과 함께 책상에 놓인 책에 손을 가져갔다.
그 와중에 마사지는 정말 효과가 있었는지, 뻐근했던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진짜 효과가 있으니까 쓸데없이 열받네.”
“단장급 기사가 손수 챙겨주는데, 고마운 줄을 모르는구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문에 등을 기대고 선 이안이 날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노크 좀 하고 들어오시면 안 됩니까?”
“했다. 네 비명 때문에 못 들은 거지.”
그렇게 말한 이안은 그대로 방에 들어오더니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거 한 번 싸웠다고 이틀을 드러눕다니, 제국 기사학교였으면 너 제명감이다?”
“잘됐네요. 거기 검술 교본 다 익히는데 10분밖에 안 걸렸는데.”
“허이구, 그래 너 잘났다.”
내 반박에 포기한 듯 고개를 저은 그가 쿠키 하나를 집어 먹었다.
“아! 그거 제 껀데!”
“잉? 이건 또 뭐야?”
옆에서 자신의 쿠키가 뺏기는 것을 보고 있던 아린이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것.
이안이 아린을 부르는 호칭에 슬쩍 그의 안색을 살폈다.
어린아이와 노는 듯 잔뜩 풀어진 모양새였지만, 마력로는 상시 긴장 상태.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군.’
방 안 곳곳을 뛰어다니며 쿠키 쟁탈전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똑똑.
“클라인 도련님.”
열린 문으로 노크라니.
고개를 돌리자 정복을 차려입은 버크만이 날 보고 있었다.
“공작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그리고….”
날 향해 공손하게 말하던 버크만이 아린과 방 곳곳을 뛰어다니는 이안을 보았다.
“이안 님께서도, 동행해달라 요청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이안이 의외라는 듯, 버크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인켈 녀석이, 나를?”
“예.”
이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버크만이 나와 이안에게 손짓했다.
“긴히 부탁하실 일이 있다 하셨습니다.”
***
“네가 말한 대로, 폴와이번에서 서신이 도착했더구나.”
하인켈의 서재에 도착하자 보인 것은 라이아의 인장이 찍힌 편지였다.
“폴와이번과 라인란트 경계 지역에 있는 농지 소유권을 넘긴다는 내용이다.”
그 말과 함께 내밀어진 서류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신인은 불명이지만, 아마 이전에 정보를 제공한 내부자와 동일인이겠지?”
“맞습니다.”
“흠.”
내 말에 잠시 생각하던 하인켈은 뒤이어 다른 한 장의 서류를 더 건넸다.
“이건…?”
“헬리안이 내게 직접 보낸 편지다.”
헬리안이 라인란트에 편지라.
어떤 내용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제 신병을 요구하고 있군요?”
“그래. 헥토르가 살해당한 사건과 네가 관계가 있다 여기는 것이겠지.”
온몸을 금으로 두른 돼지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멍청하지도, 약하지도 않다.
제국과 방계 사이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겼을지언정, 그들의 공동 목표는 라인란트.
이 사건을 구실삼아 곧바로 압박을 가해온 것이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도망쳐야죠.”
하인켈의 질문에 곧바로 답했다.
일전에 내가 헬리안의 근거지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루델의 존재였다.
하인켈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닌 데스나이트.
그렇지만 바꿔 말하면, 그 정도로 강력한 전력이 아니었다면, 난 그곳에서 살아나올 수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아린이 아니었다면 산체스 선에서 정리됐을 수도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내 말을 들은 하인켈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웃음을 본 순간, 잠시 생각이 멈춰버렸다.
웃어? 하인켈이?
있을 수 없는 상황.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그의 옆에 등짐 지고 서 있는 델라인을 살폈다.
‘쪼개고 있다.’
하인켈이 짓고 있는 것과 똑같은 웃음.
“조만간 제국과 방계 측에서 한번 더 방문하겠다고 서신을 보내왔다.”
불안을 느낀 내가 서둘러 해결책을 찾으려 할 때, 먼저 선수를 친 것은 하인켈이었다.
“그들은 내가 수습할 테니, 한두 달 정도 외진 곳에서 몸을 피하거라.”
그렇게 말하며 손짓하자, 그것을 보고 있던 델라인이 곧바로 책상에 무언가를 올려놨다.
‘아, 잠깐. 이거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갈색 털로 만들어진 방한용 망토.
이전에 내가 처음 이 서재에 불려왔을 때, 델라인이 받아들며 절망했던 그 망토였다.
“델라인, 이거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델라인이 그렇게 말할 무렵,
비슷한 미소를 머금은 하인켈이 쐐기를 박듯 내게 말했다.
아니 진짜, 저 웃음은 진짜 무섭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북부 대장벽에서 두 달 동안 머물거라. 이미 그곳의 감시자들에게는 연락을 넣어두었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북부 대장벽.
아키몬드 사변 직후, 북부 지방에 남아있는 언데드와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 건설한 대륙의 방패였다.
숨조차 얼어버리는 혹독한 추위와 척박한 땅.
대륙인들에게는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철의 장벽이었다.
“아버지, 혹시 다른 곳은….”
“이미 준비는 다 해 두었다. 방계 측에 댈 핑계도 만들어놨지.”
핑계?
하인켈의 말을 곱씹는 사이, 책상 위에 올라온 방한 망토 위에 다른 서류가 올라왔다.
아니, 이건 서류가 아니라 공작의 칙서.
수령인의 이름으로는 내 이름, 클라인 라인란트가 적혀있었다.
“이건….”
서류를 들어 그 내용을 훑어보았다.
[명령서]
[라인란트 공작가 제 2공자, 클라인 라인란트는 북부 대장벽 제 77감시 초소에 배치. 현지에 주둔중인 감시자와 합류하여 두 달간 경계근무에 임하라.]
[명령권자: 라인란트 공작령, 하인켈 라인란트.]
라인란트 공작의 인장이 찍힌 정식 군사명령서.
이건 단순한 장난이 아닌, 진짜 귀향명령이었다.
“네 덕에 아버지와의 앙금을 푼 것은 사실이지.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클라인.”
요즘 들어 부쩍 웃는 일이 많아진 하인켈이 날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가문 영묘를 파헤친 벌은 달게 받아야지.”
“……아.”
그제서야 난 이틀 전 내가 내뱉었던 말을 뒤늦게 떠올릴 수 있었다.
“동행은 한 명. 보호자 한 명을 지정해줄 테니 그와 동행하면 된다.”
이래 봬도 하인켈은 극한의 원칙주의자.
한번 결정된 이상, 이걸 번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알겠습니다. 채비하죠.”
피할 수 없다면 빠르게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리 나쁜 결정도 아니었다.
‘차라리 잘 됐어. 제국과 방계, 그리고 교단 모두가 날 쫓고 있는 상황이니.’
대륙 북부 전체를 가로지르는 장벽은 그 자체로도 천혜의 요새와 같다.
그 속에 숨어들 수만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은신처는 없을 터.
그리고 장벽이 있는 대륙 극북지방은, 나 아키몬드의 거점이기도 하다.
‘헬리안과 조만간 정면으로 맞붙을 걸 생각한다면, 얼음성을 한번 다녀와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전생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푸하하하하-!”
순식간에 장벽행이 결정된 날 비웃을 속셈인지, 구경에 한창이던 이안이 소리높여 웃기 시작했다.
“저 약골을 장벽으로 보낼 생각을 다 하고, 너도 참 악독한 놈이 됐구나 하인켈! 하하하하!”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하인켈의 어깨를 팡팡 쳐댔다.
“아, 그리고 형님.”
그렇지만 그렇게 깔깔대던 것도 잠시.
“클라인의 보호자는 형님이십니다.”
“……어? 뭐라고?”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는 얼굴로 되묻는 이안을 향해 하인켈이 망토 한 세트를 집어 던졌다.
“뭐합니까? 빨리 갈 준비 안하고.”
***
“저딴 걸 동생이라고…. 저런 걸 동생이라고…!”
“시끄럽습니다. 백부님.”
라인란트 북문.
방한 장비와 아이젠, 그리고 검을 등에 진 내 모습을 보자, 경비병은 동정이 가득한 경례와 함께 문을 열었다.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이어지는 설원지대와 산길.
눈이 소복이 쌓인 땅을 밟으며 걸어가는 내내, 이안의 불평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젠장, 역시 지금이라도 동부 밀림지대로 도망을…!”
“아버지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켁.”
하인켈의 부탁 아닌 부탁을 받은 이안은 당연히 반대했다.
애초에 라인란트의 일원도 아니니, 하인켈의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하인켈의 그물은 한 치의 틈도 없었다.
‘이미 형님 소재가 밝혀졌고, 라인란트의 모든 국경이 봉쇄되었습니다. 제국 기사들도 곧 방문할 예정이고요.’
말인즉, 퇴로 따위는 없다는 뜻.
물론, 이런 상황에 장벽에 은신처를 마련해 줬다는 것 자체가 하인켈이 제공하는 배려인 셈이다.
“그래, 이참에 널 붙잡고 검이나 주구장창 휘둘러야겠다.”
곧이어 체념한 듯 맥빠진 목소리와 함께 이안이 멀찍이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다.”
“뭐 문제 있습니까?”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걸었을까.
날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답하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안이 날 돌아보았다.
“네 검술은 하인켈 녀석의 피가 돌연변이를 했다 치자.”
“그런데요?”
내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허면, 사령술은 도대체 어디서 익힌 거냐?”
잠시 정적.
그렇지만 난 곧이어 준비된 답을 이야기했다.
“어머니께서 사령술을 연구하셨죠. 전 그 지식을….”
“거짓말.”
내 말을 끊은 이안이 날 향해 웃어 보였다.
무기질적인 웃음.
초점 없는 맹인의 눈이 내 모습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네크로맨서와 접했지. 제국, 플리시안, 갈라무. 심지어는 동방의 장의사들까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이것은 질문이 아닌 심문.
대답 여부에 따라선,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너처럼 혼을 다루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또 정적.
이번에는 조금 더 길었다.
“네가 사용하는 것은 현재 통용되는 사령술이 아닌, 훨씬 오래전의 것. 사령술의 시초나 다름없는 형태야.”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추궁에 대한 답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
“200년 전 처음 발견되어 한 사람에 의해 발전하고, 종국에는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친 유일무이한 사령술 계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산처럼 거대한 덩치를 지닌 신부가 서 있었다.
“개리슨…. 비어크만….”
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하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
“수백만 언데드 군단으로 대륙을 뒤흔든 네크로맨서의 이름은, 아키몬드.”
그렇게 말한 개리슨의 얼굴이 가까워져 왔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망할 신부 놈의 인자한 웃음이었다.
“내가 말했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