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낙엽(3)
“놀라운 정보로군. 클라인 공자가 사령술을….”
달빛 한점조차 들어오지 않는 짙은 어둠 속.
안력을 끌어올려 공터에서의 싸움을 지켜보던 그림자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본래 내 명령은 클라인 공자를 죽이는 것.’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기사, 산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만, 저걸 뚫고 간다면….’
기사란 본래 일대일 전투에 특화된 병종.
그런 자신과는 달리, 상대는 진형을 갖춘 군대다.
‘저 병진을 뚫고 클라인 공자를 죽이려 든다면, 되려 놓칠 위험이 있다.’
산체스의 표정이 한층 더 착잡해졌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신으로 말미암아 헬리안의 암살 기도가 들통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불찰로 주군이 위험해진다니, 기사로서 그런 치욕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클라인 공자를 죽이는 것 이상으로 값진 정보를 얻었다.’
클라인 공자, 그리고 그 어머니인 클레어 공후에 얽힌 풍문.
그 불길한 이야기를 떠올린 산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인 공자는 이미 어릴 적부터 아키몬드의 환생이라 불렸었지. 그런 그가 사령술을 배웠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제국은 사령술을 금지하지 않았으나, 아키몬드의 악명은 대륙인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런 상황에, 아키몬드의 환생이라 일컫는 공자가 사령술을 쓴다?
그다음에 일어날 일은 불 보듯 뻔했다.
‘라인란트 본가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교단은 압박을 더해간다. 심할 경우에는 성전을 선포할 가능성도 있지.’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클라인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계속 살려두는 것이 라인란트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일일 터.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싸우는 것이 아닌 주군께 이 일을 알리는 것.’
생각을 마친 산체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등을 돌렸다.
‘당초의 암살계획은 실패했군. 하지만 이걸로….’
늘 무표정을 유지하던 산체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이로써 라인란트는 온전히 자신의 주군, 헬리안의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젊은 날의 실수로 작위를 박탈당한 자신에게도 영지와 작위가….
“안녕하세요?”
그렇게 생각하던 산체스의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황급히 다시 앞을 보자, 그곳에 뭔가가 있었다.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뒷골목, 그에 버금갈 정도로 어두운 자신의 살기.
그 모든 불길한 기운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촤앙-!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듯 갑작스러운 등장.
곧바로 검을 뽑은 뒤,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서늘한 오한이 순식간에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누구냐! 갑자기 어디서…!”
뭔가 이상했다.
암살자? 혹은 언데드?
수많은 가정을 머릿속에 담은 채 산체스는 눈앞에 있는 미지의 존재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는 사고가 정지하는 기분을 느꼈다.
“히히!”
어두운 뒷골목 한가운데에는, 하녀복 차림을 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너, 는…?”
얼굴의 반을 가리는 안경에, 양쪽으로 땋은 갈색 머리.
뜻밖의 불청객이 눈앞에 나타나자 산체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여자아이는 클라인 공자가 데려온 하녀.
아린이었다.
“우리 도련님 진짜 멋있죠?”
해맑은 소녀의 웃음소리가 산체스의 귀를 흔들었다.
‘알아채지 못했다. 기척조차도! 이렇게 가까이 접근했는데…!’
떨리는 두 눈으로 소녀를 응시하자, 고개를 갸웃거린 아린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칠흑 같은 그림자 속에서 오직 그녀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자기 할 일을 잊어버린 듯, 기괴한 광경이었다.
“역시 따라오길 잘했어요. 덕분에 맛있는 거도 많~이 먹고!”
“맛, 있는…?”
한 걸음 뒷걸음질 친 산체스가 아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함박웃음을 짓는 입가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붉은 액체.
오랫동안 전장을 오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것은 피.
다름 아닌 사람의 피였다.
“히~!”
발랄한 아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꾸륵! 꾸르륵!
자신을 둘러싼 벽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
마치 생물의 내장에서 나는 듯한 소리였다.
공복을 호소하는 뱃고동 소리가 자신을 둘러싼 벽에서 울리고 있었다.
“끄윽?!”
소리가 나는 벽을 바라본 산체스는 곧바로 비명을 삼켰다.
벽에 입이 달려있었다.
그림자라고 생각했던 짙은 어둠.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모든 공간에,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입이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어떤 것은 사람, 어떤 것은 개, 어떤 것은 맹금, 어떤 것은 어류.
심지어 이 세상의 것이 맞기는 한 지 의심스러운 무언가의 입도 보였다.
꾸르르륵-!
소름 끼치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입들이 무언가를 흘리기 시작했다.
찐득하고 투명한 액체.
그것을 알아본 산체스는 끓어오르는 자살 충동에 당장이라도 머리를 벽에 박아 깨트리고 싶었다.
침.
자신이 발을 딛고 선 이 공간은, 자신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크으-?!”
상황을 파악한 산체스는 곧바로 등을 돌려 내달렸다.
‘도망쳐야 한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
기사 된 자로서 평생 유지해 온 침착과 평정이 순식간에 부서졌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기사의 머리를 사정없이 옥죄어왔다.
영혼 깊숙한 곳까지 사무치는 극한의 공포.
봐선 안 되는 것을 보고 말았다는 후회와 회한이 이미 그의 온 정신을 집어삼킨 뒤였다.
“으헉…! 허억…!”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온 체력과 마력이 다할 때까지, 그는 그저 자신이 선 땅을 차올리며 미친 듯이 달렸다.
자신이 어딜 지나가는지도,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저 괴물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저 공포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안돼요~!”
암전.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산체스는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체력과 마력이 모두 바닥날 때까지 달리도 또 달린 결과.
그는 자신이 서 있던 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
산체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골목길을 뒤덮은 어둠은, 건물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치마 밑에서 흘러나온 검은 무언가가, 이미 자신이 있던 공간을 남김없이 잠식한 것이었다.
“도련님이 남기지 말고 꼭꼭 씹어먹으라고 했단 말이에요!”
심통이 난 듯 볼을 부풀린 아린이 그렇게 말했다.
“도련…님?”
그녀가 말하는 도련님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시선을 돌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공터를 보았다.
이미 기절시킨 두 명의 낙엽을
수습한 그는, 이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전에 보았듯, 소름 끼치도록 밝은 웃음이었다.
“클라인…. 라인란트.”
마지막 남은 투쟁심이 꺾였다.
자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그가 사령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며 떠올린 그 모든 계획들까지.
전부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는 말이었으니까.
땡그랑-!
“하…. 하하…!”
헛웃음과 함께 들고 있던 검을 땅에 떨어트렸다.
그저 이민족이 낳은 사생아.
운 좋게 얻은 재능으로 위세를 떤다고 생각했다.
알량한 재능에 취해,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렸다고.
“반대였구나.”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린 게 누구인가.
운 좋게 얻은 알량한 권세로, 세상이 제 것인 양 날뛰던 것이 누구인가.
“수십 년을 해 온 그 모든 대업이…. 전부 허사로구나.”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없어진다는 것은, 헬리안의 제동장치가 사라진다는 것.
제국의 약과 힘에 미친 그녀를 제어할 수 없다면, 그 결말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준비되셨어요?”
상냥한 아린의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
준비.
그 말을 들은 그의 눈은, 이미 텅 비어있었다.
“주군, 부디….”
황망히 하늘을 바라본 산체스가 입을 열었다.
그를 맞이하듯, 검은 하늘 또한 그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고통 없이 가소서.”
살려달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극한의 공포.
콰직-!
그 마지막 한 마디를 유언으로 한 채, 하늘을 메운 입이 그의 상반신을 먹어치웠다.
***
“도련님!”
기사들에게 낙엽들을 넘긴 뒤 아린을 데리러 골목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산체스가 서 있던 골목길.
그림자에 뒤덮여있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각각의 사물들이 원래의 색을 되찾은 뒤였다.
“흘리면서 먹지 말라니까, 얼굴 이리 줘 봐!”
“이이이~.”
아린의 얼굴을 잡아 입가와 손에 흥건하게 묻어있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도련님 근데요.”
“왜?”
이리저리 도망가는 아린의 얼굴을 한번 더 닦아주는 사이, 아린이 내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번엔 왜 허락해주신 거예요?”
“…아, 그거?”
아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잘 참았잖아.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그렇게 말하자 아린은 날 향해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역시 그때 도련님 따라오길 잘한 것 같아요! 히히히!”
“…그러냐.”
아린의 웃음에 화답하며 그녀의의 머리를 쓰다듬던 때였다.
- 내가 지금껏 봐 온 어떤 존재도, 이런 이질적인 기운을 가지진 않았지.
웃고있는 아린과 날 번갈아본 루델이 질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 아키몬드, 자넨…. 도대체 뭘 키우고 있는 건가?
“뭐냐니, 그냥 애잖아.”
별일 아니라는 듯 답하자 루델의 곧바로 반박이 들려왔다.
- 그냥 애? 그냥 애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먹어대나? 게다가 변질되긴 했지만 저 힘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힘 같아?”
그의 말을 도중에 자르자, 잠시 말이 없던 루델이 내 얼굴을 응시했다.
- …교단이, 만들어낸 것인가?
“자세히는 몰라. 처음부터 의도한 건지, 다른 무언가를 만들려다 실패한 건지.”
내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델의 감정이 내게 전해져왔다.
실망감, 분노.
가장 큰 것은 배신감이었다.
- 제국, 신성교단. 겉으로는 정의니 자비니 잘도 지껄이더니, 갈 데까지 갔군.
“언제는 안 그랬는 줄 알겠네.”
루델의 한탄에 맞장구치는 사이, 현장을 정리한 라이아의 기사들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 이대로 포기할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쩔 속셈인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해진 현장을 보며 루델이 말했다.
“일을 줘야지. 나 같은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을 정도로 큰일을.”
그의 질문에 그렇게 답하며, 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제국의 인장이 새겨진 황동색 가면.
광산에서 영지민을 상대로 인체실험을 하던 네크로맨서, 페일의 것이었다.
“동맹이었던 제국의 손에 제 아들이 죽으면, 헬리안은 어떻게 나오려나?”
가면을 한 손에 든 채 빙글빙글 웃는 날 보자, 루델이 허탈한 듯 입을 열었다.
- 정말이지, 저걸 보고 있으면 누가 악당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당연하지.”
그의 말에 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난 너희들 같은 기사가 아니라, 사악한 네크로맨서 거든.”
그렇게 말하며 웃는 내 얼굴은, 여느 이야기 속에 나올법한 악당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