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용살자의 성(3)
“도련님 또 무슨 사고쳤어요?”
예상대로, 짐가방 한가득 과자를 욱여넣은 아린이 날 보며 물었다.
“쳤지. 듄켈이 들으면 기절할지도 모르겠는데.”
쿠키를 우물거리는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사과를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싸움을 중지시킨 라이아 공녀는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날 향해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원만하게 해결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미소를 만들어내며 그렇게 답하자 라이아 공녀가 마주 웃어 보였다.
‘이것 봐라,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데?’
기사도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는 정갈한 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이 대립상황에 개입한 타이밍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내가 헥토르를 위협할 때까지 상황을 방관했어. 저 정도 영향력이라면 진작에 멈출 수도 있었는데.’
나와 헥토르의 싸움은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다.
다른 이들이라면 서둘러 자리를 피하거나, 상황을 파악하려 동분서주할 터.
그렇지만 그녀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정확히 필요한 시점에 개입해 최대한의 이익을 끌어냈다.
내가 헥토르의 목에 칼을 댄 순간.
헬리안 파벌의 자존심을 정면에서 구겨버린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크으…!”
벌겋게 달아오른 헥토르의 모습을 보아하니, 내 예상이 맞아들어간 듯했다.
“공자님. 이쪽으로….”
“기력이 많이 상하셨어요.”
싸움이 끝나자마자 우르르 몰려든 하녀들이 헥토르를 둘러싼 채 그의 개인실로 향했다.
“라이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라이아가 고개를 돌렸다.
분을 삭이고 있는 헬리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공후님. 상황이 심각한 듯해서 본의 아니게 끼어들었습니다.”
예의 바른 몸짓과 말투였지만, 라이아의 말을 들은 헬리안은 불쾌한 듯 혀를 찼다.
‘호칭을 붙이지 않았군.’
지금까지 만났던 제국계 인물들은 그녀에게 마마라는 호칭을 붙였다.
왕족이나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이에게 붙이는 극존칭.
그렇지만 고든, 라이아와 같은 폴와이번계 인사들은 그 호칭을 쓰지 않았다.
‘가문의 어른으로는 인정하되, 수장으로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라.’
호칭 하나에도 수많은 의도를 내포하는 것이 정치.
내가 하고 있으면서도 참 골이 아파오는 광경이었다.
“…손님 응대는 네게 맡기마. 난 헥토르를 살피러 가야겠구나.”
“알겠습니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라이아를 보며 혀를 찬 헬리안이 자신의 개인실로 사라졌다.
그렇게 제국계 인사들이 사라진 뒤 잠시 후, 긴장에서 벗어난 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쪽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공조? 아니면 추방? 어떻게든 내 쪽에 관심을 돌려야….’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아아-! 저 또라이년 진짜!”
익숙한 목소리에서 익숙하지 않은 언사가 튀어나오자, 순간 생각이 멈춰버렸다.
“아니, 뭔데? 갑자기 무도회를 한답시고 지지고 볶더니, 이젠 자기가 파토를 내? 진짜 웃기지도 않아서!”
“아가씨, 아가씨!”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계속해서 욕지거리와 불평을 내뱉는 라이아를 만류했다.
“아, 왜! 저년 있을 때만 공주님 연기하라며!”
우악스럽게 큰소리를 낸 라이아를 향해 기사들의 절규가 들려왔다.
“손님이 아직 안 가셨잖아요!”
그 말을 들은 뒤 잠시 정적.
말을 멈춘 라이아의 고개가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갔다.
…….
‘와아, 스켈레톤 대가리도 저거보단 부드럽게 돌아갈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녀보단 덜 어색하겠지.
터벅. 터벅.
발소리와 함께 라이아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하아…….”
잔뜩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온 라이아 공녀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상황이 급박하여 헛것을 보신 듯합니다. 우선 저희 숙소로 모시려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언제 그랬냐는 듯, 예법서에 나올 듯 가지런한 말투와 몸짓으로 날 향해 웃어 보였다.
옥구슬 굴러가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참 구슬프기 짝이 없었다.
“이제 와서 연기해봤자 안 먹히는 거 알죠?”
그 괴상망측한 변화를 견디지 못한 난 질색하며 그렇게 말했고.
“…치, 안 속아줄 거면 어디 가서 말하지나 마요.”
입을 비죽 내민 폴와이번의 공녀는, 그렇게 말하며 날 숙소로 인도했다.
***
“이 멍청한 것-!”
짜악!
헬리안 공후의 서재.
헥토르의 뺨을 후려친 헬리안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그를 향해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어쩌자고 그 상황에 검을 휘둘렀어!”
“그, 그렇지만 그 자식이 어마마마를…!”
“그렇다고 보수파 놈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그 난리을 부려?!”
짜악-!
제 아무리 고강한 기사라 한들, 날 때부터 이어진 공포에는 대항할 수 없는 법.
온 힘을 다해 반대쪽 뺨을 올려붙이자 그것을 이기지 못한 헥토르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개 같은 년…. 그 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라이아를 저주하던 헬리안은 이내 서재의 한쪽 서랍을 열어 자그마한 약병 하나를 꺼냈다.
콰득!
얇은 막에 둘러싸인 붉은 용액.
헬리안이 약병을 통째로 깨물어 그것을 마시자, 떨리던 그녀의 몸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후우!”
이미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그녀의 외모는 마흔 언저리에 가까웠다.
제국이 그녀에게 선물한 이 약 덕분이었다.
“그래…. 진정하자. 지금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지.”
머리를 맑게 하고, 노화를 억제해 주는 제국의 신약.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귀물이었다.
영약의 약효가 돌자 평정을 되찾은 헬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림자 속을 바라보았다.
“산체스. 있어?”
이름을 부르자 그림자 속에서 커다란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부르셨습니까, 공후 마마.”
낮은 목소리를 듣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헬리안이 입을 열었다.
“‘낙엽’들에게 연락해.”
그렇게 말하자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겁에 잔뜩 질린 헥토르에게서였다.
“지시 내용은 어떻게 할까요.”
“죽여. 클라인, 그리고 따라온 하녀까지. 전부.”
헬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헥토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엄마! 하지 마! 걔네들은 아키…!”
“어마마마라고 부르랬지!”
콰창-!
그녀가 던진 꽃병은 헥토르를 스쳐 지나간 뒤, 벽에 맞아 산산조각 났다.
“라이아 그년도, 클라인 그 버러지 새끼도 그러더니 이젠 너까지 날 인정 안 하는 거야?! 어?!”
“으, 으으…!”
어두운 서재 귀퉁이에서 완전히 겁에 질린 헥토르가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 순간, 눈을 크게 뜬 헬리안이 몸을 낮춰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헥토르, 우리 아가, 내 아들?”
헬리안은 겁에 질린 아들을 달래듯 천천히 걸어가 그의 양 볼을 잡았다.
“이게 다 널 위해서야. 네가 공작이 되면, 다 좋아질 거란다. 그러니까, 응?”
“으, 응….”
방금 전까지 미친 듯 폭력을 휘두르던 어머니가 이젠 자상한 목소리로 자신을 달랜다.
종잡을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에공포를 느낀 그는 미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렇지, 그렇지. 엄마 여기 있어. 우리 아들….”
“…공후 마마.”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산체스가 헬리안을 부르자, 헥토르를 껴안고 있던 헬리안이 말했다.
“란델이라는 기사, 넌 이길 수 있어?”
그렇게 말하자 산체스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기량이라면 스무 명 정도는 한번에 상대할 수 있습니다.”
무심한 목소리가 헬리안을 향했다.
헬리안의 심복이자 단장급 기사, 산체스.
그는 허세나 객기는 결코 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렇다면 클라인, 그 녀석은 어떻지?”
그 말을 듣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산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칼에 죽일 수 있습니다.”
“좋아, 그럼 너도 가.”
그렇게 말한 뒤 헬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겁에 질린 헥토르는 이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뒤였다.
“만일 ‘낙엽’들이 실패한다면, 네가 전부 죽여버려.”
주인의 명령을 받은 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이 있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조금만 더….”
그렇게 아무도 없는 텅 빈 서재.
홀로 남은 헬리안은 자신의 팔을 타고 흐르는 붉은 선들을 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조금만 더 하면, 난…!”
점점 짙어지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어두운 서재를 뒤덮었다.
그 밑에서는 약병에서 떨어진 붉은 액체가, 서재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
“전대 공작의 사인이…. 의문사라고요?”
얼굴을 찌푸린 채 되묻자 폴와이번의 집사장, 고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 의문사가 뭐에요?”
“왜 죽었는지 모른다는…. 아니다. 저기 가서 과자 먹고 있어.”
“네!”
활기차게 내 말에 답한 아린은 내 짐가방에 가득 들어찬 쿠키를 꺼내 입안 한가득 머금었다.
“저기, 저 하녀는….”
“원래 저런 애에요.”
그 모습이 신기한 듯 하녀들이 물었지만, 내가 그렇게 넘기자 뭐라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 어깨를 으쓱한 라이아가 날 보며 입을 열었다.
“대외적으로는 노환에 의한 병사라고 보고했지만, 실상은 헬리안 그년밖에 몰라요.”
“아가씨, 입!”
“아 어차피 들켰잖아!”
“그래도 신사분 앞에서는 내숭 좀 떠세요!”
“신사는 무슨! 기생오라비 같이 생겼는데!”
‘기생, 뭐?’
라이아가 하녀들의 잔소리를 듣는 사이, 고든이 설명을 보충했다.
덕분에 난 물 흐르듯 이어진 내 험담을 반박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공작 전하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공후님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언장은….”
“원본은 헬리안이 가지고 있어요. 내용도 그쪽에서 말한 대로고요.”
불쾌하다는 듯 한 손으로 턱을 괸 라이아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기사들 역시 분통을 터트렸다.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제국의 공작위는…!”
“최종적으로는 제국 황실의 승인이 필요하죠.”
기사의 말에 답하자 그것을 듣고 있던 라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제국 공작에게 걸린 최대의 족쇄.
일국의 왕과 버금가는 권한과 힘을 지녔음에도 제국의 공작이 황제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또한, 제국이 라인란트를 노리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
아키몬드 사변을 해결한 대영웅, 베르켈 라인란트.
그 공로로 인해, 라인란트는 제국 황실의 승인 없이 공작을 임명할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 되었다.
‘대륙의 모든 국가는 라인란트를 북부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전후 대륙 협정에서 의결된 라인란트 선언 덕분이었다.
“그래서?”
뜻밖의 정보를 알아낸 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 정보를 외부인인 제게 건네는 저의가 뭡니까?”
아무런 의도 없이 이런 정보를 건넬 리 없다.
미사여구를 걷어낸 뒤 곧바로 본론을 꺼내자 떠들썩하던 좌중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도와줘요.”
잔소리하던 하녀들을 물린 라이아가 내게 말했다.
‘역시.’
낮은 한숨과 함께 다시 물었다.
“저한테 도와달라는 건 아닌 것 같고, 라인란트가 폴와이번의 후계 문제에 개입하라는 겁니까?”
“공동의 적을 가진 사람끼리 협력하는 거죠. 안되나요?.”
“말인즉, 함께 헬리안에 맞서자?”
그렇게 말하자 라이아가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무리한 걸 요구하지는 않아요. 정보와 인적 자원. 그 정도를 교환할 뿐이니까.”
라이아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 잠기는 척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스르륵!
창문을 뚫고 나타난 반투명한 여인의 형상.
네크로맨서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사령, 밴시(Banshee)였다.
내게로 다가온 그녀는 내 귀를 향해 뭔가를 속삭였다.
이윽고 그녀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안심한 듯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밴시가 내게 알려준 내용.
그것을 확인한 난 대답을 기다리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안 되겠는데요.”
잠시간의 정적.
그리고 뒤이어진 것은 라이아의 목소리였다.
“아니 왜요?! 무도회장에서 그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쫄려요?! 네?!”
“아가씨, 입-!”
“아, 놔봐!”
그러는 사이, 평정을 유지한 고든이 날 보며 물었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야 어렵지 않죠.”
그렇게 말한 난 빙긋 웃으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저, 곧 있으면 암살당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