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용살자의 성(2)
“지금…. 뭐라고?”
“싫다고 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되묻는 헬리안에게 다시 한 번 말해줬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니, 클라인?”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헬리안이말했다.
비웃음으로 애써 분노를 삭이는 것만 같았다.
“지금 라인란트가 어떤 꼴인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잘 알지요.”
그녀의 말에 답한 난 눈앞에 놓인 과일 하나를 집어 입에 가져간 뒤 말했다.
“휘하 영주들 중 절반이 가문에 등을 돌린 상태죠.”
“잘 알고 있구나. 그리고?”
내 말을 들을수록 헬리안의 비웃음이 더욱 짙어지는 것이 보였다.
“주요 자금원이던 담비 가죽 수렵권은 플리시안에게, 광산은 제국에게 이권을 뺏기고 있는 상황이죠.”
그걸 듣고 고개를 끄덕인 헬리안이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그에 비해, 내가 다스리는 이 폴와이번은 어떻지?”
포도알 하나를 더 입에 가져가는 사이, 내 대답을 기다리지 못한 헬리안이 입을 열었다.
“지금의 라인란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금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
“그렇죠.”
단순히 폴와이번 공작가의 규모만 따졌을 때도 이 정도다.
거기에 헬리안에게 충성하는 방계까지 합쳐진다면, 그녀의 세력 규모는 더욱 커질 터.
“그런데도 내가 아닌 라인란트를 선택하겠다고?”
“예.”
짧은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하자 헬리안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도대체 왜? 왜 내 제안을 거부하고, 그깟 이름뿐인 공작가에…!”
“콘웰 백작가가 제국의 네크로맨서들에게 광산을 제공한 것.”
헬리안의 말을 끊은 뒤 그녀에게 물었다.
“고모님이 명하신 것이지요?”
일개 백작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특히 델칸 백작처럼 기회주의적인 자들은 더더욱.
그렇기에 이 물음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작업이었다.
“그랬지.”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죄책감 따위는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네크로맨서들은 북부인들을 실험체로 사용했고요.”
그렇게 말하자 잠시 말을 멈춘 헬리안이 다시 날 향해 말했다.
“농민 수백 명을 써서 제국의 자금을 끌어왔지. 그걸로 기사 수백 명을 무장시켰고 말이야.”
자금.
그 말을 듣자 속이 들끓었다.
결국 그놈의 돈 때문에, 또 북부의 사람들을 희생한 것이었나.
“그뿐만이 아니야. 이 무도회를 보렴, 클라인.”
내게 그렇게 말한 헬리안이 커튼을 걷어 무도회장을 보였다.
“너희 라인란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호화로운 연회, 그리고 권력!”
웅변하듯 울리는 헬리안의 목소리와 황금으로 몸을 두른 돼지들의 웃음소리가 섞였다.
“아직도 모르겠어? 그 알량한 자존심만 버린다면, 이 모든 것이 손에 들어오는 거야!”
황홀한 듯 외치는 헬리안의 모습과 오래된 기억이 겹쳐 보였다.
사치와 향락에 미친 돼지들과 북부의 역병을 외면한 버러지들.
20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방금 전 대답은 못 들은 것으로 하마, 클라인.”
화려한 보석과 비단으로 온몸을 두른 헬리안이 내게 말했다.
“내 사람이 되렴. 그렇게 한다면, 넌 공작이 될 수 있어!”
한 줌 기대감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헬리안 라인란트.
그녀 또한 라인란트의 일원이었기에, 그에 걸맞은 이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서로의 길이 엇갈려, 이렇게 대립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실없는 기대감을 한편에 품은 채 이곳에 온 것이었다.
‘차라리 잘됐군. 더 기대할 필요가 없으니.’
결론을 내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만에 가득 찬 저 괴물의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거절합니다.”
단호하고 망설임 없는 대답.
그 말에 헬리안이 쥐고 있던 부채가 비틀렸다.
“도대체 왜지?”
웃음기가 사라진 그녀의 물음을 담담히 받아내며 쐐기를 박듯 말했다.
“전 라인란트의 공작이 되고 싶은 거지, 제국의 앞잡이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서요.”
그 말을 한 뒤 잠시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득!
파열음과 함께 헬리안이 쥐고 있던 부채가 그대로 부러졌다.
“허, 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헬리언이 분을 삭이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천하디 천한 이민족의 다리 사이에서 나온 원숭이 새끼가.”
웃음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가면에 균열이 갔다.
뿌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에게서는 아니었다.
아마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들인가 하는 놈이겠지.
“재주가 볼만해서 길러보려 했더니, 기고만장하기 이를 데 없구나.”
웃음 속에 감춘 그녀의 눈이 날 향했다.
적의와 살의로 가득한 괴물의 눈이었다.
“당신보다는 훨씬 낫지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원숭이 새끼가 무서워, 제국한테 꼬리나 흔들어대던 암퇘지 주제에.”
콘웰이 사주한 내 암살사건을 들먹이자, 헬리안의 아래턱이 파르르 떨려왔다.
콘웰 백작 본인의 독단이었다? 웃기는 소리.
그 겁쟁이는 공작가를 건드릴 담력이 없는 인간이다.
“내가…. 제국에게 꼬리를 쳐?!”
머리끝까지 화가 난 헬리안이 내게 일갈했다.
“제국이 내게 꼬리를 치고 있는 거야! 동맹의 중심은 나라고-!”
고삐가 풀린 듯 목소리를 높이는 헬리안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 불신이 없을 수가 없지.’
이 반응을 보니 확실했다.
제국과 그녀 간의 애매한 상하관계.
그것이 헬리안이 지닌 역린이고, 이 동맹의 약점이다.
“모르지, 과연 제국도 그렇게 생각할까?”
“이…!”
약점을 알아낸 다음엔 그것을 자극해 불안의 씨앗을 심는다.
그 불안이 의심으로, 불신으로, 종국에는 동맹을 깨트릴 비수로 발(發) 할 수 있도록.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어머니에게 뭐라고 지껄인 거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다, 임계점에 다다른 돼지가 하나 더 있었지.’
식탁에 놓인 나이프를 들어 올리자, 뒤이어 날 향해 서슬 퍼런 검날이 짓쳐들었다.
‘검로가 너무 단순한데.’
이미 눈으로 검로를 파악한 뒤 식사용 나이프로 그것을 막아 비틀었다.
마력이 담긴 검격이라 해도, 이렇게 힘의 방향을 바꾸면 대응할 수 있다.
하인켈이 알려준 방법이었다.
카앙-!
쇳소리와 함께 검로가 뒤틀린 검이 나와 헬리안이 앉아있던 식탁을 반으로 갈랐다.
쿠콰쾅-!
마력이 가득 실린 공격.
굉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살롱에서 뿜어나오자, 무도회를 즐기던 귀족들 사이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꺄아악?!”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손님분들은 이쪽으로! 어서요!”
그러는 사이, 살롱 밖으로 튀어나온 난 들고 있던 식사용 나이프를 보았다.
‘쯧, 이건 못쓰겠네.’
수직으로 구부러진 나이프를 버린 뒤 상대를 기다렸다.
“이 개자식이…!”
분기탱천한 목소리와 함께 걸어 나온 것은 붉은 머리의 청년.
델라인과 동년배로 보이는 귀공자였다.
“헥토르 공자님?!”
어느새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모여든 기사들이 현장을 둘러쌌다.
‘헥토르 로스 폴와이번. 아기돼지 삼형제 중 첫째, 차기 공작 내정자로군.’
이름으로만 듣던 헬리안의 아들 중 하나, 헥토르.
현재 폴와이번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폴와이번의 안주인을 면전에서 모욕하고도 살아돌아갈 줄 알았나, 라인란트!”
이를 악문 채 그렇게 외치는 헥토르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손님인 나와 내 어머니를 먼저 모욕한 것은 헬리안 공후다. 전후 관계를 생각해야지?”
설전 중에도 주변을 살폈다.
아린은 시야에 없으니 안심이었지만, 무도회장에 들어올 때 검을 제출한 상황.
‘검을 달라고 해 봐야 줄 것 같지도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걸 시험해봐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난 어깨에 두른 망토를 풀어 팔에 감았다.
“하, 그깟 천쪼가리로 기사인 날 이기겠다고?”
헥토르의 비웃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세를 잡았다.
몸을 낮춘 채 망토를 잡은 손을 뒤로 뺀 자세.
내게 손목을 내어준 란델이 사용하던 기술이었다.
“이 자리에서 숨통을 끊어주마!”
그 말과 함께 헥토르의 몸이 쏘아져 왔다.
‘경로는 정면. 검로는 찌르기. 검은 바스타드. 간격은 중장거리.’
판단을 마친 난 팔에 감은 망토를 던져 그의 눈 앞을 가렸다.
“하, 이까짓 걸로!”
시야를 가리는 검은 망토를 그대로 찔러 위로 올려 베는 헥토르.
마력을 담은 검날이 내 망토를 종잇장처럼 반으로 갈랐다.
“이걸로 네놈은…!”
“끝이지. 물론 난 아니지만.”
망토로 시야를 가리고, 그것을 치워내는 짧은 순간.
내 몸은 이미 그의 품 안쪽으로 파고든 상태였다.
빠각!
발을 올려 그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턱뼈를 타고 올라간 충격은 순식간에 그의 뇌를 울릴 것이었다.
“끄윽?!”
검을 쥔 헥토르의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감지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목을 쳐냈다.
헥토르의 손에 들려있던 검은 이제 내 손아귀에 있었다.
스릉-!
“크……!”
역수로 쥔 검이 헥토르의 목을 겨눴다.
조금만 힘을 줘도 목젖을 베어낼 수 있는 상황.
“거기까지입니다, 클라인 공자.”
그렇지만 내 검은, 그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산체스!”
“…….”
기사회생한 헥토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커먼 거구의 남자가 2미터는 될 거검으로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촤르르륵-!
나와 헥토르를 둘러싸던 기사들이 뒤늦게 검을 뽑았다.
“…….”
“…….”
난 헥토르의 목을, 산체스라는 기사는 내 목을 겨누고 있는 백중세.
분노한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헬리안조차도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양측 모두, 검을 거두세요.”
당장이라도 충돌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깬 것은 청아한 미성(美聲).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을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발코니에서 웃던 그 여자로군?’
올려묶은 금색 머리에 푸른 눈.
나와 같은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범상치 않은 마력이 느껴지는 검사였다.
“고, 공녀님. 하지만, 헥토르 공자님의 신변이…!”
“귀빈들이 함께한 무도회를 엉망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초대받은 손님에게 칼을 겨누다니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이 검손잡이를 잡았다.
같은 가문의 기사가 아니라 적을 대하는 것 같은 태도.
날 겨눈 기사들의 면면을 보니 그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다.
헬리안과 헥토르를 따르는 것은 중부 대륙 출신인 반면, 저쪽은 서부 출신.
‘즉, 이 대립은 전통적인 폴와이번 계통과 제국계의 파벌싸움으로 번졌다는 뜻이지.’
생각보다도 상황이 술술 풀리는 것을 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무도회를 즐기는 돼지들을 보며 느낀 불쾌감이 해소되는 기분이다.
‘역시 일을 키우면 키울수록 중요 인물이 튀어나오는 법이지. 그럼 이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숨긴 채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한쪽 파벌에 대한 평가는 끝났으니, 이제 반대쪽을 확인한 차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나올지 볼까?’
난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 뒤, 헥토르를 겨누고 있던 검을 내렸다.
‘자. 어떻게 할 테냐?’
먼저 검을 내려놨지만, 순순히 상황에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손에 새겨진 데스나이트의 각인은 그 자체로도 소환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바.
최악의 상황에는 루델을 꺼내 탈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지, 지금이다! 당장 저 개자식의 목을…!”
“오라버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던 헥토르의 일갈이 도중에 끊겼다.
“손님을, 그것도 무기조차 들지 않은 자를 핍박하려 하다니, 얼마나 더 가문을 부끄럽게 만들 생각입니까!”
“윽…!”
그 말에 움찔한 헥토르를 확인한 여인은 좌중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폴와이번 제 1공녀이자 푸른성창 기사단장, 라이아 렌 폴와이번이 명합니다. 지금 당장 전투를 멈추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