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용살자의 성(1)
“와아, 그러면 폴와이번 공작님은 드래곤 슬레이어인 거에요?”
“초대 공작은 그랬지. 덕분에 무명 모험가에서 단번에 제국 공작이 된거고.”
폴와이번 공작가가 날 초대한 곳은 라인란트 영지 서부에 위치한 헬리안의 별장이었다.
‘말이 좋아 별장이지, 궁전이 따로 없군.’
도착하기 10분 전부터 이어지는 커다란 정원과 별채, 그리고 수많은 하인들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별장 하나가 우리 본가 저택보다 크네.’
으리으리한 저택의 외관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마차는 제택 대문 앞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클라인 라인란트 공자님.”
내 이름을 부르는 집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린과 함께 마차에서 나오자, 갈색 머리를 빗어넘긴 노신사가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폴와이번 공작가의 집사장, 고든이라고 합니다.”
“클라인 라인란트입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섣불리 하대하지 않자, 집사장 고든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헬리안 공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감정을 지운 고든은 정중한 몸짓으로 날 안내했다.
“와아~ 우리 저택의 세 배는 되보여요.”
“실제로는 그거보다 더 될걸.”
저택 이곳저곳을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는 아린이 감탄하던 때였다.
“라인란트 공작가의 일원이 폴와이번에 방문한 것은 굉장히 오래간만입니다.”
“그런가요?”
“예.”
집사장 고든이 꺼낸 말을 받자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하여, 제 주인이셨던 로크 공작 전하께서도 근심이 많으셨지요.”
“…….”
집사장은 가주의 측근으로서 가문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정보를 알고 있는 자.
그런 자가 아무 의미 없이 내게 먼저 말을 걸 리는 없을 터였다.
‘현재 실권을 장악한 헬리안은 라인란트 출신. 즉, 외지인이다. 공작 본인을 섬기던 입장에서는 작금의 상황이 썩 달갑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집사장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그러나 이젠 공자님께서 오셨으니, 많은 것이 변하겠군요.”
“…변한다라.”
그의 마지막 한 마디를 들은 난 결론을 내렸다.
‘폴와이번 공작을 섬기던 기존 세력이 남아있다. 헬리안이 세력을 키우는 이유는 그걸 찍어누르기 위해.’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고든은 저택 중앙의 거대한 문 앞으로 날 이끌었다.
그 안에서는 음악소리와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춤추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무도회라니, 금시초문입니다만.”
집사장인 고든을 향해 그렇게 물었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도련님 괜찮아요? 연회복 안가져왔는데.”
아린의 말을 들으며 내 옷차림을 살폈다.
이틀 동안의 마차 여행으로 머리는 떡지고, 여행복에도 때가 낀 상태.
라인란트의 공자가 이런 몰골로 무도회장에 들어간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단 말이지?’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이건 일종의 기선제압.
추레한 행색의 라인란트 공자를 둘러싸 힘의 차이를 과시하려는 술수였다.
“…….”
눈을 돌려 날 보는 집사의 표정을 살폈다.
갈색 머리의 노신사는 비웃거나 업신여기는 기색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켜볼 심산이군. 내가 어떻게 대응할지.’
여기서 내 행동을 살핀 후, 향후 대응을 결정하겠다는 의도였다.
헬리안과 내가 공조하는 것을 방관할지, 방해할지.
전자라면 난 가치 없는 재원으로 인식된다는 말이었고.
후자라면 날 죽이겠다는 뜻이겠지.
‘사방 천지에서 칼을 갈고 있는 꼴이군.’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될 양쪽 파벌의 탐색전.
그리고 그 중간에 낀 나.
만약 말 한마디만 삐끗한다면, 잠드는 사이에 목이 달아날 것이다.
이 상황은 정말이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아린. 가방에 망토 있지?”
“망토요?”
“어. 어깨에 우리 가문 인장 들어간 거.”
내가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하린이 들고 있는 짐가방에서 망토를 꺼냈다.
“여기요! 근데 여기서 망토 입어도 돼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린에게서 망토를 받아들어 그것을 둘렀다.
어깨에 라인란트 공작가의 약장이 새겨진 야전 망토.
비단으로 만든 예식이나 의전용망토가 아닌, 울 재질로 만들어진 실전용이었다.
“준비 됐습니다. 열어주세요.”
검은 망토를 두른 채 그렇게 말하자, 고든의 무표정에 균열이 갔다.
“전장에서 쓰는 망토를, 무도회장에…?”
“제 생각에는 이게 가장 적합한 복장일 것 같아서요.”
말을 흐리는 고든에게 그렇게 말했다.
대륙의 무인들에게 있어 망토를 입는다는 것은 즉, 전쟁터에 나간다는 의미.
그것을 깨달은 고든은 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을 향해 손짓했다.
“라인란트 공작가 제 2공자! 클라인 라인란트니 입장하십니다!”
무도회장을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적진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끼이이이-!
문이 열린 곳에는 황금으로 치장한 돼지우리가 있었다.
북부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실크를 두른 돼지들.
앞발에는 형형색색의 제국식 장신구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저자가 클라인 공자?”
“란델의 손목을 잘랐다더니, 어린 소년이 아닌가?”
“저 망토는 뭐야, 전쟁이라도 나가겠다는 것인가?”
내가 그들 사이로 걸어가자, 얘기에 한창이던 돼지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토가 쏠리는군.’
술과 사치, 향락에 젖어 뒤룩뒤룩 살찐 돼지들.
내가 혐오해 마지않던 썩어빠진 귀족의 표상들이, 이 무도회장에 가득했다.
“어서오거라, 클라인.”
기름을 세 번은 겹쳐 바른듯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불쾌감을 뒤로 한 채 고개를 숙여 날 초대한 돼지에게 예를 표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뵙습니다. 고모님.”
고개를 들자, 돼지들 중에서도 유난히 번들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도회장에 도착한 날 위아래로 훑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헬리안 라인란트.
라인란트 방계 세력의 중심이자, 폴와이번 공작가의 실세.
그리고 내 어머니, 클레어 공후의 죽음을 사주한 장본인이었다.
“그래.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좋구나. 헌데….”
오른손에 든 쥘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린 그녀가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참…. 특이한 옷을 차려입고 왔구나.”
비웃음을 가득 담은 한마디.
헬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곳곳에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따르는 방계의 귀족들이었다.
“더러워진 옷을 가릴 것이었다면 집사장에게 말하면 될 것을, 어찌 저런 더러운 망토로….”
“그 반대입니다. 고모님.”
헬리안의 말을 도중에 끊은 난 두르고 있던 망토를 살짝 들어 안에 입은 여행복을 보였다.
이틀 동안 갈아입지 않아 더러워진 여행복.
야영지에서 묻은 흙과 먼지가 곳곳에 묻어있는 옷이었다.
“깨끗한 이 옷에, 더러운 것이 묻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빙긋 웃으며 헬리안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날 향하던 비웃음이 도중에 멈췄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챘군. 돼지들치곤 똑똑한데?’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그렇게 생각했다.
내 몰골을 예상하고 무도회를 준비했다면, 내가 출발한 시점부터 보고가 들어갔을 터.
라인란트 저택에서 이곳까지 오는 내내 입지 않던 망토를 무도회장에서 입었다.
풀어 말하자면 이런 뜻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흙길보다, 네놈들이 서 있는 이 무도회장이 훨씬 더럽다는 뜻.’
“하하하하하-!”
그러는 사이, 무도회장 한구석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보자, 그 웃음소리의 주인이 눈에 띄었다.
‘저 여자는…?’
무도회가 탐탁치 않은 듯, 시선을 돌린 한 무리.
그 중심에 내 또래의 여자가 앉아있었다.
“아, 크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아직도 입가가 씰룩이는 것이 보였다.
“저, 저 어린 것이…!”
“이름뿐인 제 가문의 위세만 믿고!”
그러는 사이, 곳곳에서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얼굴을 붉히는 이도 있었고, 누군가는 흥미로운 듯 턱을 괴는 이도 있었다.
‘중요한 건 도발의 당사자가 어떤 표정을 지었냐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헬리안의 얼굴을 보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우, 눈깔 봐라. 마음 같아서는 벌써 죽이고도 남았겠네?’
도발은 성공.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마와 목에 난 힘줄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못 본 사이에 참…. 당돌한 아이로 자랐구나.”
그렇게 말하며 숨을 한 번 내 쉰 헬리안은 이전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방금 전과 같은 미소를 보인 채, 날 향해 손짓했다.
“들어오거라. 오랜만에 가족끼리 이야기나 하자꾸나.”
그렇게 말한 헬리안이 가리킨 곳은 무도회장 한구석에 만들어진 살롱.
고풍스러운 장식이 된 그곳에는 헬리안과 같은 붉은 머리를 한 남자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가족끼리라…. 말인즉, 저 녀석이 헬리안의 아들이란 말이로군.’
두 사람을 보며 그렇게 판단한 난 흔쾌히 헬리안을 따랐다.
“도련님. 저는요?”
“저기에서 과자 먹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와, 진짜요? 신난다!”
내 말을 들은 아린은 짐가방을 든 채 무도회장 한편으로 달려갔다.
“저 가방은 조만간 과자 가방이 되겠네.”
그렇게 중얼거린 난 헬리안을 따라 살롱으로 들어가, 그녀가 권한 의자에 앉았다.
어느새 내 앞에는 붉은 빛이 도는 술과 사슴고기, 그리고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놓여져 있었다.
“정말이지…. 당돌하게 컸구나. 클라인.”
커튼을 닫자 무도회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이제 이곳은 나와 헬리안.
그리고 구석에 숨어 날 지켜보는 그녀의 아들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죽지도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맞받을 줄이야.”
“원래 꼼수는 정수로 받아야 하는 법이라서요.”
꼼수.
날 압박하려는 의도가 가득했던 방금 전 상황을 꼬집자 헬리안이 웃음소리를 냈다.
“본가에서 손님이 온다는데, 이 정도 준비는 해야 하지 않겠니?”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붉은 술을 홀짝인 헬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편지 뒷면. 잘 살펴봤겠지?”
“예.”
순식간에 뒤바뀐 그녀의 목소리에 답했다.
헬리안이 내게 보낸 편지의 뒷면.
그곳에는 방계 세력에 합류하라는 권유와 내게 주어질 보상이 적혀있었다.
“만일 네가 평범한 범재 같았으면 적당히 제국 고관 자리나 하나 던져줄 생각이었는데, 오늘 생각이 바뀌었다.”
날 향해 그렇게 말한 헬리안이 탁, 소리나게 술잔을 놓았다.
“다시 제안하지. 클라인 라인란트.”
탐욕과 야망에 가득 찬 눈이 날 향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괴물의 눈이었다.
“네가 내 사람이 된다면, 널 라인란트 공작으로 만들어주마.”
공작위.
그 말이 나오자, 스멀스멀 느껴지던 마력이 한층 강해짐을 느꼈다.
그것을 확인한 난 푸우 한숨을 쉰 뒤,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