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의 네크로맨서-18화 (18/209)

018. 데스나이트(4)

“도련님 진짜 괜찮아요?”

“어, 괜찮, 괜찮아….”

아린의 목소리에 답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곧바로 온몸에 탈력감이 밀려왔다.

“괜찮기는 무슨, 사흘째 골골대고 있잖아요!”

“그, 잠을 잘 못 자서 그래. 조금 쉬면 문제없어.”

그렇게 말하며 애써 몸을 일으키자 그걸 보던 아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벽에 할게 뭐 있다고 잠을 못 자요?”

“어? 어, 그, 밤늦게 연구할 게 좀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피해 봤지만, 순순히 넘어갈 아린이 아니었다.

“거짓말! 책들 놓인 거랑 페이지도 다 그대로였는데요?”

“윽!”

위험하다.

첫 번째 거짓말이 실패로 돌아가면 의혹은 더욱 가중되는 법.

도끼눈을 뜬 채 날 바라보는 아린이 내게 계속해서 물었다.

“새벽 동안에 도련님 혼자서 뭘 했던 건데요?”

“아니, 그, 그게….”

“그것도 저나 듄켈 님도 몰래?”

“그…!”

미치겠다.

더 이상 댈 핑계를 찾지 못하겠다.

“흠….”

그렇게 내가 우물쭈물하던 사이, 날 바라보던 듄켈의 미간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젠장, 역시 눈치챈 건가?’

심각한 표정으로 날 잠시 바라보던 듄켈은 이윽고 날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도련님.”

“힉?!”

날 부르는 듄켈의 목소리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지은 죄가 있어서 제 발 저리는 건지, 생각한 것보다도 몸이 더 뻣뻣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굴욕이다! 천하의 아키몬드가 그 흔한 핑계하나 찾지 못해 이렇게 벌벌 떨고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뭐라 할 말을 떠올리려 했지만, 피로로 먹통이 된 머리는 도통 제 할 일을 못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그때, 진중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듄켈이 내 어깨를 잡았다.

‘넘어가는건가? 그럼 다행….’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중, 한가지 불안이 뇌리를 스쳤다.

…부끄러워하지 말라니, 뭔 소리야?

“아린 양?”

진중한 듄켈의 목소리가 아린을 불렀다.

“네!”

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자, 듄켈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지금 굉장히 중요한 시기를 보내시고 계십니다.”

“중요한 시기요?”

‘중요한…. 시기?’

얘 지금 뭔 소리야?’

그렇게 생각하며 괴상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듄켈은 그럴 날 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치 자신에게 맡기라고 호언장담하는 것처럼.

‘아니 진짜, 이 새끼 지금 뭐랑 착각한 건데?’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종종 있을 겁니다.”

“엥? 또 이렇게 골골대시는 거예요?”

“예. 그렇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듄켈이 날 보며 말했다.

“사춘기 때는 워낙에 왕성한 법이라서요.”

‘…야 이 미친.’

알았다.

이 새끼가 지금 내 상태를 뭐라 착각한 건지.

이 미친 기사놈이 사람을 뭐로 보고…!

“야, 듄켈. 니가 지금 뭔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나 그런 거 아니거든?! 난 사실…!”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벌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았는지, 듄켈은 걱정 말라며 내 양 어깨를 잡고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도련님. 남자라면 다 겪는 시기 아닙니까.”

“아니라고 했다. 나 진짜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던 중이었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마음속으로 진작에 결론을 내 버린 듄켈은 도저히 사람 말을 들어 먹지를 않았으니까.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도련님.”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내가 뭐 아쉬운 게 있다고 밤에 혼자 그 짓을…!”

거기까지 말했을 때, 듄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걸어갔다.

“야, 야! 너 내 얘기 안 끝났는데 어디가?!”

내 다급한 외침을 들은 듄켈이 날 보며 말했다.

“공작 전하께 보고하러 갈 겁니다.”

진지한 얼굴로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지껄이는 듄켈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다.

“아니 그걸 왜 아버지한테…! 아니, 그 전에, 그거 아니라고!”

“부끄러워 마십시오. 델라인 도련님도 거쳐간 일이십니다.”

아니, 델라인 한테도 그랬다고?

기사가 공작가 후계자를 성희롱했어?

이 가문 기사 새끼들은 왜 다 하나같이…!

‘루델이 아니라 저 새끼를 데스나이트로 만들어야 했는데!’

어느 때보다도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얼굴을 한 듄켈을 보니 그 확신이 더더욱 깊어져 갔다.

“이런 일은 최초 목격자가 알리는 것이 라인란트 기사단 전통입니다.”

“전통은 개뿔, 악폐습이잖아!”

“기사단의 일원이라면 받아들이셔야죠.”

글렀다.

이 기사라는 미친 것들은 도저히 사람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이딴 정신 나간 전통을 만든 건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묻자 들려온 것은 ‘초대 공작님이 만든 전통입니다.’라는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클라인 도련님의 호위기사로서, 이런 경사를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 전 이만…!”

“야, 야! 듄켈! 그만둬! 야!”

잽싸게 방문을 열고 나가는 듄켈을 따라 복도로 나갔다.

그렇지만 이미 듄켈은 저 멀리 하인켈의 방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거 귀족 모독죄야 이 미친 새끼야아아아-!”

절박한 마음으로 그렇게 외치던 그때였다.

“클라인 도련님?”

날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려 뒤를 돌아보았다.

집사장 버크만이었다.

“어, 어…. 왜?”

아직 듄켈이 휩쓸고 간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곧 있으면 약속시간인데…. 일정을 뒤로 미룰까요?”

버크만이 그 말을 하자 혼미했던 정신이 겨우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아니, 난 준비 끝났어.”

그렇게 말한 난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린을 불렀다.

“아린, 가자.”

“네~!”

헬라인이 초대한 것은 나와 내 수발을 들 하인 한 명.

이름을 부르자 미리 준비한 짐가방을 든 아린이 다가왔다.

“이쪽입니다.”

준비가 다 끝난 것을 확인하자 고개를 끄덕인 버크만은 날 저택 문 앞으로 이끌었다.

저택 앞에는 이미 사두마차와 그것을 호위하는 폴와이번 공작가의 기사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클라인 공자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봤던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뒤, 천천히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오, 마차가 푹신해요!”

“이번엔 멀미하지 말고 미리 자 둬.”

고위 귀족을 위해 만들어진 푹신한 좌석이 마음에 든 듯, 아린의 표정이 풀어졌다.

“…라인란트의 공자께서 하녀와 같은 마차를 쓰시는 겁니까?”

“왜, 문제 있나?”

의아한 듯 묻는 기사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내 시선을 느낀 듯, 기사는 고개를 저은 뒤 말에 올랐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조심하십시오.”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아 그리고….”

출발 직전, 마차 옆으로 다가온 버크만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내게 귓속말했다.

“…한창 왕성하신 건 이해하지만, 주기를 일정적으로 하십시오.”

“…….”

겨우 부여잡은 제정신이 다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문앞에 있었는데 그걸 못들었을 리가 없겠지!

“뼈 삭습니다.”

그래, 버크만 쟤도 라인란트 기사 출신이었지.

저 진지한 얼굴로 개소리를 해대는 집사장을 보니 더 말할 기력조차 사라졌다.

“아니라고 미친 놈들아아아….”

“이랴!”

그렇게 내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사이, 날 태운 마차는 라인란트 저택을 벗어났다.

***

저벅, 저벅.

빗물이 마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축축한 산길.

검은 신부복 차림의 거한이 느린 발걸음으로 그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키이이이이….”

“크어어어….”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는 신부.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양옆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시체들이 즐비했다.

썩은 살점과 뼈, 그리고 곳곳에 널브러진 제국의 인장까지.

신부를 습격한 이들은 제국의 네크로맨서들이었다.

“사, 살려줘! 제발…!”

마지막 남은 한 네크로맨서가 그렇게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지만 그가 도망치기 위해 등을 돌린 그 순간, 개리슨의 우악스러운 손은 이미 그의 목을 잡아챈 뒤였다.

“커, 커억…!”

“회개하고 참회하라. 찬미하고 찬양하라. 그리하여 내 너희들에게 영지를 내려 영원히 임하게 할지니, 성체에 임한 영혼을….”

신부는 마치 주문처럼 경전을 외우며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이 마치 상처 입은 짐승 같기도, 십자가를 짊어진 성자 같기도 했다.

“어, 째서…! 왜 신성교단의 대행자가 우리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발버둥 치던 네크로맨서였지만 소용없었다.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자 그의 손아귀에 잡혀있던 네크로맨서의 얼굴이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퍽-!

순식간에 이뤄진 살해.

이걸로 그는 벌써 열두 명의 네크로맨서를 제거한 뒤였다.

툭.

그렇게 시체가 즐비한 산길을 걷던 도중, 신부는 자신의 팔을 건드리는 감각을 느끼며 옆을 돌아보았다.

“아이구.”

깊이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높이를 고려하면 신장은 개리슨의 턱밑 부근.

신부의 팔을 건드린 것은 낡은 여행복 차림의 노인이었다.

“허허허, 이거 미안하게 됐구려.”

목소리와는 맞지 않게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었다.

백발을 뒤로 올려묶은 노인은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얼굴을 보였다.

“…….”

초점을 잃은 채 텅 빈 눈.

그것을 본 신부는 그가 마주친 노인이 장님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네크로맨서인가, 아니면….’

너무나도 태연자약한 그의 모습을 보며 개리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노인의 행동이 자신의 뒤를 노리기 위한 술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적은 아니로군.’

네크로맨서와 같은 교단의 적이 아니라면 적대할 이유가 없다.

판단을 마친 개리슨이 노인을 향해 물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분께서 어찌 홀로 여행을 하고 계십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가 노인을 향했다.

그제서야 신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챈 듯,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본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 동생 녀석이 편지를 해서 말일세.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러 가는 길이지.”

“그렇습니까.”

노인의 말에 그렇게 답한 신부는 등을 돌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앞을 가로막는 이교도는 전부 제거한 바.

저 여행객이 해를 입을 일은 없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아, 자네.”

그렇지만 뒤이어 자신을 부르는 노인의 목소리에 개리슨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묻는 개리슨을 잠시 바라보던 노인은 이윽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이번에 죽이지 못했으니, 앞으로도 죽이지 못할걸세.”

그 말에, 잠시 동안 개리슨의 호흡이 멈췄다.

처음으로 자신이 죽이지 못한 자.

그것이 뜻하는 바를 단박에 알아챈 개리슨이 노인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자신이 지나온 길은 외길.

그리고 그 길 끝에 있는 것은 라인란트 공작 가문의 저택.

그것만으로도 개리슨이 그에게 적의를 드러내기에는 충분했으니까.

“지금 널 죽여줄까.”

신성교단의 인간병기, 대행자의 입에서 나온 살벌한 목소리.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터였다.

그러나 백발의 노인은 허허 웃어댈 뿐,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마치 세상에 달관한 듯 보이는 태평함이었다.

“말했지 않나. 자네는 못 죽인다고.”

그렇게 말하며 노인이 고개를 치켜든 순간, 개리슨의 얼굴이 그곳에 나타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분노에 찬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노인이 그에게 말했다.

“가슴으로 키운 인연은 결심한 순간 끊어야 하는 법. 한번에 죽이지 못한 이상, 자네는 영원히 그것을 끊어낼 수 없을걸세.”

그 말을 들은 개리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미 그의 강권이 노인의 안면에 다다른 상황.

잠시 뒤면 노인의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부웅-!

소름끼치는 파공음이 허공을 갈랐다.

한순간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로 강력한 일격.

그렇지만 그 공격을 내지른 개리슨 신부는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곧 다시 볼걸세. 그때마저 얘기하세나.”

그 말과 함께, 노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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