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데스나이트(2)
“어제 있었던 결례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클라인 공자님.”
폴와이번 가문의 기사들은 가문의 정식 절차를 밟고 하인켈의 허가를 받고서야 내게 다다를 수 있었다.
같은 공작이지만, 라인란트와 폴와이번의 힘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것인지, 내 앞에 고개를 숙인 기사들의 표정이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고모님께서 보낸 초대장은 읽었어. 출발은 언제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무시한 채 그렇게 말하자 기사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이미 이동을 위한 채비는 전부 갖췄습니다. 공자님께서 분부하시면 언제든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
기사의 말을 들은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적의 본거지에 들어가는데, 아무 준비 없이 갈 수는 없는 노릇.
‘당장 저 기사들만 봐도, 고모 명령만 아니었으면 당장 달려들 기세인데.’
살기등등한 기사들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검술은 어느 정도 보강이 되었지만 전력은 부족한 상황.
이 상황에서 대책 없이 헬리안의 면전에 당도한다면, 눈 깜짝하는 순간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하지만 차일피일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생각하던 난 고개를 돌려 저택 뒤뜰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눈치 좀 보면서 시도할 생각이었는데, 차라리 잘됐네.’
“좋아. 3일 뒤에 출발하도록 하지.”
생각을 마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서로의 눈치를 살핀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대기하는 인원들에게도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래. 아, 그리고.”
말을 마친 뒤 밖으로 나가려는 기사들을 불러세웠다.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딱딱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 기사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부켄에게 말 좀 전해 줘. 몸 간수 잘하라고.”
부켄의 갈비뼈를 부러트린 장본인이 그렇게 말하자 기사 중 한 명의 눈썹이 꿈틀댔다.
“사흘 뒤에 뵙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기사들은 응접실을 나갔고, 그 뒤에 듄켈이 내게로 다가왔다.
“초대장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전 동행할 수 없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지. 아마 살아서 못 돌아올걸.”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하자 듄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왜 초대를 승낙하신 겁니까?”
“내 목숨에 준하는 가치가 있는 건수였으니까.”
듄켈의 물음에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동행하려는 듯 하녀들이 다가오려 했지만, 손을 내저어 그들을 물렸다.
“적의 심장부에 다가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내 목 하나 건사하자고 날릴 수는 없지.”
“심장부에 다가간다니, 공자님. 설마 헬리안 공후님을…!”
“가문끼리 전쟁이라도 할 일 있어? 그런 거 아니야.”
화들짝 놀란 듄켈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암살이라.
말이 쉽지, 그 뒤에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면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면, 도련님이 그곳으로 가는 게 어째서 기회라는 거죠?”
“정보를 얻을 수 있지.”
복도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헬리안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원한진 이는 없는지, 방계 내부의 권력구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적을 알아야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거군요.”
“그렇지. 그리고 잘만 하면….”
그렇게 말하며 잠시 말을 흐린 내가 뒤이어 말했다.
“사령술을 이용해서 저쪽에 혼란을 줄 수도 있고 말이야.”
대륙의 수많은 무력집단들이 네크로맨서를 적으로 두지 않으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제까지 함께 싸우던 동료가 적이 된다.
싸움에 승패와 상관없이, 그 상황 자체만으로도 트라우마를 만들기에는 충분했으니까.
“헬리안 본인에게 하기엔 좀 위험하지만, 측근이나 주변인물을 언데드로 만들어서 습격하게 하면….”
전생의 경험을 떠올리자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듄켈은 얼굴을 찡그린 채 입을 열었다.
“도련님, 그건….”
“기사 된 자가 할 짓이 아니라고?”
그가 할 말을 내가 먼저 말하자 듄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방법으로 적을 친다면, 저희가 그들과 다를 것이 뭐겠습니까?”
“다를 거 없지. 똑같이 나쁜 놈 되는 거고.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그렇게 체면 따지다가 이 지경까지 온 거 아닌가?”
라인란트를 비판하는 신랄한 내 말에 듄켈의 말문이 막혔다.
“명예롭지 못하다, 비겁한 행동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목에 힘주는 사이에 여기까지 몰린 거 아니냐고.”
“…….”
방계에 의해 침탈당한 영지.
몰락해가는 가문.
그것을 떠올린 듯, 무거운 표정을 한 듄켈을 보며 난 등을 돌렸다.
“그렇다 해도. 라인란트는 그것을 져버려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내 말에 말문이 막히던 듄켈이었지만, 그 한마디만큼은 내게 밀리지 않았다.
“어째서?”
“명예와 신의를 잃고 이익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우린 기사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니까요.”
“명예와 신의.”
힘이 잔뜩 들어간 듄켈의 목소리에 내가 재차 물었다.
“이 지경까지 와서….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비웃음이나 비꼬는 것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한평생을 네크로맨서로 살아온 나로서는, 저들의 사고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요합니다.”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듄켈이 왼쪽 가슴에 주먹을 갖다 댔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
옅은 웃음과 맑은 눈.
내 비관에도 한 치 흔들림 없는 듄켈의 눈에서 순간, 그의 모습이 보였다.
절망과 체념이 아닌, 희망을 품은 채 내 심장에 검을 찔러넣은 기사.
‘베르켈, 라인란트….’
듄켈의 모습을 보며, 마주 웃어 보였다.
그래.
저 얼굴을 보기 위해 시작했던 거였지.
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영웅의 얼굴을 보기 위해.
베르켈이 만들고자 했던, 다음 세대의 베르켈 라인란트를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럼 다행이네.”
라인란트 기사의 표상.
그것을 확인한 난 한껏 후련한 마음으로 듄켈을 향해 말했다.
“난 너처럼 명예로운 기사가 아니라, 사악한 네크로맨서거든.”
***
“음냐…. 히히히…!”
늦은 밤.
옆방에서 자고 있는 아린의 모습을 확인한 난 조용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휘오오오-!
새벽바람이 휘몰아치는 저택의 뒤뜰.
그곳에 서 있는 낡은 석조 건물이 내 목적지였다
“역시, 아직 남아있어.”
내가 도착한 곳은 라인란트 가문의 영묘.
지하로 향하는 입구에 세워진 돌기둥을 쓸어본 나는 그대로 밑으로 내려가, 대리석으로 된 문을 밀어젖혔다.
쿠르르르….
무거운 돌문이 양옆으로 열리자, 청석으로 만들어진 푸른 석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우우우….
양옆으로 늘어선 여섯 개의 석관.
초대 공작인 베르켈부터, 전대 공작인 루델까지.
라인란트의 역사를 이끌어 온 역대 공작들이 잠들어있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혼들은 모두 성불했군.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아.”
석관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최근까지도 관리가 이어진 듯 깨끗한 관들의 모습을 보며 난 심장에서 마기를 뿜어냈다.
“그렇지만…. 아직 미련이 남아있는 혼이 있다.”
그렇게 말한 난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섰다.
내 심장에서 뿜어진 마기를 빨아들이는 하나의 관.
전대 공작, 루델 라인란트의 석관 앞이었다.
“하인켈이 알면 뭐라고 할지 감도 안 잡히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대면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도 없지. 그리고….”
마기에 반응하는 루델의 석관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생각보다도 더 미련이 강해. 이대로라면 이 혼은 망령이 된다.”
네크로맨서는 혼을 이끌어, 가야 할 곳으로 이끄는 자.
네크로맨서로서, 그리고 이 집안의 일원으로서 선대 공작이 망령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묘지에 묶여 떠나지 않는 루델의 혼을 느끼며, 난 마기를 이용해 석관에 계약문을 새겼다.
- 생전의 업에 묶인 불우한 자에게 고한다.
파츳!
검은 연기에 불이 붙듯, 계약문을 감싼 마기가 푸르게 빛났다.
‘혼의 눈이 보는 것은 형태가 아닌 본질. 클라인이라고 이름을 대 봤자, 거짓이라 여기겠지.’
영혼과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
그것을 다시 확인하며 영창을 계속했다.
- 안내자, 아키몬드의 이름으로 그대의 앞을 밝힐지니.
점점 더 빛을 더해가는 계약문을 확인한 뒤, 계속해서 망자의 목소리를 더했다.
- 내가 밝힌 길을 걷고자 한다면, 계약에 응하라.
마지막 영창을 끝낸 그 순간.
파아아앗-!
밝은 빛을 낸 계약문이 마치 지워지듯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한 영묘 안.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목소리가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 선조의 무덤에서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밖으로 나오게, 네크로맨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
혼의 정착이 성공했다는 증거였다.
‘전대 공작이라는 게 허명은 아니군. 마기란 마기는 전부 다 빨아갔어.’
묵직한 피로감을 느끼며 영묘 밖으로 나왔다.
새벽바람에 휘날리는 흰 갈대밭 속.
그림자로 둘러싸인 인영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루델, 라인란트.”
그의 이름을 부르자 검은 인영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 처음에는 귀여운 손자가 무슨 사연으로 네크로맨서가 되어, 이 할애비를 찾았나 생각했지.
그렇게 말한 루델의 영체는 날 향해 손을 뻗었다.
촤륵-!
검은 연기가 그의 의지에 따라 모여, 기다란 검의 형태를 띠었다.
- 그런데 설마, 라인란트의 숙적이 라인란트의 핏줄의 몸을 취했을 줄이야.
평이하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스산한 음성이 날 옥죄었다.
‘시험하는군.’
정점에 가까운 기사가 뿜어내는 투기.
그렇지만 난 흔들림 없이 그를 마주한 채 말했다.
“상황은 계약문을 통해 전했다.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
- 나쁘지 않지. 오히려 기특하다고 생각했다네.
그렇게 말한 루델이었지만, 날 향한 경계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 그렇지만 라인란트의 장을 맡았던 자로서, 가문의 숙적을 쉽게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말일세.
천천히 날 향해 다가온 검은 연기는 이윽고, 손에 쥔 검은 검을 들어 내 목에 겨눴다.
“…….”
데스나이트.
고강한 기사의 혼을 영체에 정착시켜 만들어내는 최상급 언데드 중 하나.
그렇지만 그 혼과의 계약을 완수하기 위해선 완성된 영체에 내 각인을 새겨야 한다.
방법은 두 가지.
압도적인 마기로 혼을 굴복시키거나, 혼의 동의를 얻어 협력하거나.
“그렇다면 증명해 보이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았다.
이곳에 오며 들고 온 철검이었다.
- 증명?
“내 계약에 거짓이 없다는 증명. 그리고 네 업을 풀어주겠다는 약속.”
그렇게 말한 난 검으로 날 겨누고 있는 루델의 목에 검을 댔다.
- ……!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내 검이 루델의 검은 검을 마주했다.
그가 날 겨누고 있는 자세와 완전히 같은 자세였다.
“기사의 신뢰는 검에서 나온다고 하지. 내 말이 틀린가?”
언젠가 하인켈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루델의 영체가 일렁거렸다.
휘오오오-!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루델이 그 자리에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에 맞춰, 나 또한 자세를 낮춰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앙-!
내게로 짓쳐드는 루델의 검을 막아냈다.
육안으로는 감지조차 할 수 없는 속도.
반응한 것이 아니라 준비자세를 보며 예측한 것이었다.
- 아니, 틀리지 않다.
하늘 아래 뜬 달을 조명 삼아, 영혼과의 검무가 시작되었다.
그 모습이, 내게는 마치 기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