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데스나이트(1)
“후우.”
하인켈과 개리슨이 서로 부딪힌 지 일주일.
하인들은 아직까지도 하인켈과 개리슨이 격돌한 흔적을 치우고 있었다.
‘아린이 아니었으면 진짜 죽을 뻔 했네.’
단 한번의 격돌, 그리고 대치.
그 짧은 순간이 저택에 끼친 피해를 보니 새삼 그 사실이 실감 났다.
‘당장의 상황을 넘겼고, 수확도 있었다만, 그 이상의 위험요소가 생겼군.’
방으로 들어오는 와중에도 내 상각은 멈추지 않았다.
신성교단에 단 셋뿐인 대행자.
그중 단순한 무력만으로는 최강을 자랑하는 심판자, 개리슨 비어크만.
그 정신 나간 신부 놈이 날 점찍은 상황이니, 머릿속이 복잡한 것도 당연했다.
“오셨습니까.”
방으로 들어오자 듄켈이 날 반겼다.
“어. 부탁했던 건?”
“의술서와 해부학 이론서는 도착했습니다. 나머지 품목도 내일 중으로 도착할 겁니다.”
“좋아, 이제야 좀 할 맛이 나겠네.”
듄켈의 말에 답하며 방구석에 마련된 책상에 앉았다.
호화로운 가구와 장식으로 가득했던 내 방은 일주일 동안 내가 기록한 이론, 술식.
그리고 연구 기록으로 가득 찬 채였다.
“버크만 집사장님이 엄청 놀라셨어요!”
내 책상에 새로 온 책들을 놓으며 아린이 말했다.
“놀라다니, 뭘?”
그렇게 묻자 내 옆에 놓인 쿠키를 집어 먹던 아린이 말했다.
그 새 세 개를 집어 갔네?
아니, 네 갠가?
“도련님이 이렇게 열심히 뭘 하는 게 처음이라고요!”
“하,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홍차를 입으로 가져가며 어제 정리한 내용을 다시 검토했다.
‘그럼 내가 안 신나게 생겼어? 새로운 게 이렇게 많은데.’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고 있지만, 나날이 늘어가는 새 책들을 볼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편하게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호사인데!’
아키몬드로서 지식을 탐구하던 전생을 떠올리자 책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술식 하나를 익히기 위해 마탑의 하인이 되어 개처럼 일했다.
마도서의 찢긴 한 페이지를 갖기 위해 온갖 궁리를 하고, 그것을 훔치다 손가락을 날려 먹은 일도 있었다.
마법사의 가문이나 귀족이 아닌 이상, 지식과 학문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과거.
그렇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난 원하는 모든 분야의 지식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시 이 가설은 틀렸구나. 마력 순환계와 인간 혈관의 상관관계도 논파됐고….’
게다가 내가 죽은 뒤 흐른 세월이 200년.
그사이 새로 발견된 사실, 새롭게 제기된 가설, 새로운 마력 회로 이론 등.
환생한 뒤로 처음으로 맛보는 고양감이 내 머리를 미친 듯 회전시켰다.
“그런데, 뭣 때문에 그렇게 많은 해부학 책을 수집하시는 겁니까? 게다가 이건….”
“아, 이거?”
이미 탑처럼 쌓여있는 온갖 책들을 보며 듄켈이 묻자, 난 흰 양피지에 씌인 술식을 검토하며 말했다.
“영체 구축식이야.”
“영체…. 구축식?”
듄켈이 되묻자 술식을 바라보는 내 입이 절로 웃음을 그렸다.
“내가 불러낸 스켈레톤들 기억하지?”
“예.”
고개를 끄덕이는 듄켈을 보며 난 마기를 뿜어 방 한군데에 소환문을 그렸다.
“도련님, 여기서 사령술을…?”
“안 써. 이런 거에 영혼들을 부르면 꿈자리가 사납거든.”
그렇게 말하며 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여기다가 이걸 뿌리면….”
그렇게 말하며 난 책상에서 꺼낸 상자를 열어, 그곳에 내용물을 부었다.
푸스스스…!
내가 부은 것은 마력을 품은 모래, 마나 더스트.
공중으로 떠오른 회색 가루는 이윽고 내 술식에 따라 움직이며, 스켈레톤의 형상을 한 모래 인형을 만들어냈다.
“우와!”
스켈레톤 모양의 모래가 신기한 듯, 아린이 빛나는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사령술은 마기를 통해 혼과 계약한 뒤, 그 혼이 지닌 마력을 운용해서 영체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야.”
스켈레톤의 모습을 보며 듄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영혼은 스켈레톤 이상의 복잡한 영체를 움직일 수 없어. 마력은 있을지 몰라도, 그만한 자아가 형성되지 않거든.”
강도는 시체보다 단단한 마력체였지만, 목각인형과 진배없는 단순한 구조.
공격과 방어 명령을 수행할 수는 있지만, 기사나 마법사와 같은 마력 사용자들을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마련이다.
‘결국 달튼은 막아내지 못해서 내가 처리해야 했으니까.’
숲에서의 전투를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한 난 소환문을 해제했다.
“하지만 평범한 영혼이 아니라면 어떨까?”
“평범한 영혼이…. 아니라면?”
듄켈의 질문을 듣자 내 웃음이 더 진해졌다.
“만일 그 영혼이, 고강한 마력을 지닌 기사나 마법사의 것이라면?”
그렇게 말하며 난 마기를 이용해 새로운 술식을 그렸다.
도형 두 개와 하나의 룬어로 이뤄진 스켈레톤의 소환문과는 달랐다.
여덟 개의 점을 빈틈없이 메운 선들과 스무 개의 룬.
지성 없는 영체를 만드는 소환문이 아닌, 고강한 영혼을 불러내는 계약문이었다.
파스스스스-!
바닥에 흩뿌려진 마나 더스트가 소환문에 반응하여 솟아올랐다.
뼈가 아닌 검은 연기.
그리고 그 검은 연기를 감싸는 견고한 갑주와 무기.
그것을 본 듄켈의 눈이 커졌다.
“이건…?”
“뭐, 아직 구축 중이라서 좀 더 손봐야 하지만 말이지.”
생전의 힘을 낼 수 있도록, 완벽하게 재현된 마력회로.
마기를 통해 보강되어 안정된 출력을 보장하는 마력로.
거기에 아키몬드 특유의 삼중으로 보강된 갑주까지.
“시험작 치곤 되게 괜찮게 만들어졌네?”
계약문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200년 전 설계를 보강한 거긴 해도, 이렇게 정교한 영체를 만들 수 있는 놈은 얼마 없을걸?
“자, 그럼 이제 어디서 기사의 영혼을 구하냐는 건데….”
그렇게 말하며 내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하자, 한숨 섞인 듄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묘에서 이상한 짓 하시는 건 꿈도 꾸지 마십시오.”
아, 들켰네.
내심 가장 크게 기대하고 있던 후보지를 들키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 귀여운 손자가 모처럼 찾아왔다고 하면…. 선조분들도 용서해주시지 않을까?”
“선조분들은 용서한다 쳐도, 공작 전하가 용서하시겠습니까?”
“윽.”
조상님들 묘에다가 강령술이라.
잠시 상상해 본 순간 확신했다.
다시 교회에 처박힐 게 분명하지.
아마 이번엔 넉넉잡아 50년 정도.
“내 뜻대로 하라는 말이 내 멋대로 난리 치라는 말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며 술식을 보강한 난 계약문을 해제하여 그것을 양피지에 다시 옮겨적었다.
스르륵!
그러는 사이, 하늘로 떠오른 마나 더스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럼, 최근에 전투가 있었던 지역을 돌아봐야겠네. 예를 들면….”
내가 계약할 영혼을 찾을 궁리를 하며 생각에 잠기려던 그때, 멀리서부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크, 클라인 도련님!”
버크만이 데리고 다니던 하인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내 이름을 불렀다.
“어우, 그냥 막 열고 들어오네?”
“아, 아니, 그! 죄송합니다! 그게…!”
“장난이야 장난. 뭔데?”
창백해진 하인의 얼굴을 보며 장난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뒤, 곧바로 그에게 물었다.
“헬리안 공후 마마의 사신이 찾아왔습니다!”
“고모님이 보낸 사신?”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지만, 마냥 태연할 수는 없었다.
헬리안 라인란트.
라인란트와 같은 제국의 3대 공작 중 하나인 폴와이번 공작가로 시집간 하인켈의 여동생.
그리고 숨을 거둔 폴와이번 공작을 대신해 전권을 틀어쥔 뒤, 방계 세력의 일인자로 군림하고 있는 여자였다.
‘하인이 날 찾아왔다는 말인즉, 사신이 방문한 가장 큰 이유는 나라는 뜻인데.’
물론, 그 이유는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백작 가문 하나를 풍비박산 내고, 제국의 끄나풀을 잡아 죽였으니. 옆구리가 시릴 만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저택 한구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 내놓으라고 아우성인 모양인데, 어지간히도 충격이 컸나 보지?’
경계대상이었던 하인켈이나 델라인이 아닌 내가 한 일이니, 그럴 만도 했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복병이 튀어나온 격이니까.
“가지.”
“크, 클라인 도련님?!”
하인에게 더 들을 것도 없이,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말을 전해야 할 것은 공작 전하가 아니라, 클라인 공자님께….”
“그렇다 해도, 가문의 주인을 거치지 않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다니. 지나친 무례입니다.”
“하, 이것 참 답답한 사람들이!”
역시, 베크만을 위시한 하인들과 기사들이 내 방으로 향하는 길을 막은 채였다.
‘보통이면 상황을 정리하는 건 하인켈이었지만, 이젠 다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나섰다.
공후 본인이 온 것도 아니고, 사신이 온 상황.
굳이 하인켈이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거기까지!”
사뭇 진중한 목소리로 외치자 웅성거리던 현장이 조용해졌다.
“하, 하하! 클라인 공자님!”
그러나 날 알아본 사신은 곧바로 내게 달려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공자님! 사신으로 온 부켄이라 합니다!”
“그런데?”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지만, 그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헬리안 공후께서 긴히 전할 말씀이 있다 하셔서요. 여기, 서신입니다.”
그렇게 말한 부켄이 내게 양피지를 건넸다.
질 좋은 양피지에 금박이 씌인 실, 그리고 폴와이번 공작가의 인장으로 이뤄진 봉인.
‘초대장이군. 날 포섭할 생각이야.’
폴와이번 공작가를 등에 업은 헬리안은 방계 가문들의 일원을 포섭했다.
나와 같은 위치에 있는 이들.
계승권은 가졌으나 적통이 아닌 이들을 지원한 뒤, 가문을 장악하게 하여 세를 불린 것이다.
‘현 상황을 생각한다면,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내 입가에는 짙은 비웃음이 걸렸다.
“자, 어서 읽어보십시오! 공후 마마께서 공자님을 아주 높게 평가하셔서…!”
거절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저 기고만장한 얼굴을 보며 그 비웃음은 점점 더 농도를 더해갔다.
‘근데 말이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 발을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너희들 같은 버러지들한테 협력하느니, 그냥 북부를 밀어버리는 게 나아.’
그리고 그다음 순간.
난 발을 뻗어, 웃고 있던 그의 가슴팍을 걷어차 버렸다.
으직-!
갈비뼈가 부러지는 파열음과 함께 부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커, 억…?”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던 부켄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크, 클라인 공자님!”
“지금 무슨 짓을…!”
내 행동에 되려 놀란 듯, 하인들이 날 보며 재차 되물었다.
부켄 역시 같은 마음이었는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남의 집안에 흙발로 기어들어 온 주제에, 건방지게 어디에다 대고 큰 소리를 내는 것이지?”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 흠칫한 부켄이 목소리를 떨었다.
“그, 그게….”
“내가 지금 대답을 하라고 명했나?”
“윽…!”
그 말에 부켄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쇠퇴했다고는 하나, 라인란트는 제국의 3대 공작 중 하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부켄의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고모님의 사신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번만큼은 축객령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꺼져라! 날 만나고 싶다면, 북부의 주인을 대하는 예의부터 다시 배워서 오도록 해라!”
내 외침과 함께, 겁에 질린 부켄은 곧바로 등을 돌려 저택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다음 날 부켄 대신에 찾아온 것은, 폴와이번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