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꼬우면 함 뜨던가?
“지금, 뭐, 뭐라고…?”
방금 전까지 노발대발하던 콘웰 백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결투 선언이 이뤄졌는데, 기사들은 뭘 하고 있는 거지?”
그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회의장 곳곳에 선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 그게….”
“뭐야,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처음 겪는 돌발상황에 당황한 기사들이 우왕좌왕했다.
라인란트의 이름을 지고 있으나, 그들 중 태반은 방계의 재원으로 육성한 자들.
자신들을 키운 방계의 백작과 나 중 누구의 말에 따라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는 것이겠지.
“뭣들 하고있나-!”
우왕좌왕하던 기사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정복을 차려입은 듄켈의 일갈이었다.
“라인란트의 후예가 결투를 선언했다.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이는건가?!”
상관인 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카아앙-!
수십 자루의 검이 동시에 땅을 찍는 소리.
그제서야 좌중에 모인 귀족들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감지한 듯했다.
“기, 기다리시오 클라인 공자! 결투재판이라니! 그건…!”
다음에 할 말이 뭔지는 절로 짐작이 갔다.
이미 사문화된 조항이다. 잊혀진 옛 관습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겠지.
‘빠져나가게 둘 줄 알고?’
짧게 그를 비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북부의 영주를 자처하는 자가, 북부의 오랜 전통을 거부하는 겁니까?”
“그, 그것이…!”
내 말을 들은 콘웰이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앉은 이들은 털가죽 옷을 입은 늙은 노병(老兵)들.
이미 제국 측과 영합한 라인란트의 방계가 아닌, 중립을 표방한 지방 토호들이었다.
‘일을 여기까지 키운 덴 그만한 이유가 있지.’
곧바로 반박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콘웰 백작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거부할 테면 해봐라. 저 꼰대들이 방계를 어떻게 생각할지.’
북부 지방의 토호들은 라인란트 공작가가 생기기 이전부터 이 땅에 뿌리내린 자들.
옛 관습과 전통에 목숨을 거는 원리주의자들이다.
“허, 그 오래된 관습을 잊지 않고 있던 이가 있었다니.”
“저 칼소리를 듣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상대로, 그들은 이 상황이 뜻밖이라는 듯 흥미로운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크으….”
그들의 표정을 살핀 콘웰 백작이 침음성을 냈다.
이미 제국 측 인사와 영합한 방계를 고깝게 보는 토호들이 많은 상황.
그런데 이 결투재판까지 거부한다면, 방계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난감한 상황에 놓일 터였다.
‘이 회의가 선언된 시점에서, 너흰 내 손바닥 안에 들어왔단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와 콘웰 백작의 설전을 지켜보던 아버지, 하인켈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대 때부터 내려오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그렇게 말한 하인켈은 나와 콘웰 백작을 번갈아 본 뒤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했다.
“라인란트의 적통의 선언이 입증된 바, 7대 라인란트 공작이 이 결투재판을 보증한다.”
“고, 공작 전하…!”
공작 본인의 승낙이 떨어지자 방계 측 인사들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법규에 따라, 이제까지 제시된 모든 증거와 혐의는 효력을 상실하고 재판의 결과만이 죄의 유무를 판가름한다.”
하인켈의 목소리에 머리를 감싸 쥐던 콘웰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방금까지 본가에서 제시한 의혹들도…?”
“예외 없이 전부 불문에 붙인다.”
그 말에 콘웰 백작의 광대가 올라갔다.
‘오히려 잘 되었다 생각하겠지.’
용병을 고용한 흔적. 그리고 둘째 공자인 나와 단 둘이서 사라진 경위까지.
따지고 보면 이 사건에서 불리한 것은 내가 아닌 방계 측이었다.
‘원래같았으면 3~4년까지 판결을 지연시키고, 제국을 통해 사건을 흐지부지 끝낼 생각이었겠지.’
지루하고, 또 번거로운 작업.
그런 상황에 내가 제 분에 못이겨 결투를 신청한 꼴이니, 저들로써는 오히려 행운이라 여길 터였다.
“하, 하하하! 좋습니다! 예, 좋아요!”
호탕하게 웃어보인 콘웰 백작이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왔다.
내막이 어찌되었든, 그 또한 자식을 잃은 아비.
날 곱게 돌려보낼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을테지.
“재판은 일주일 후. 저희 측에서는 대전사로 란델 경을 보내려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콘웰 백작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검술도, 사령술도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고.
방계 세력의 한 축인 백작 본인을 죽여버리게 되면, 다른 방계들은 몸을 사릴 터였다.
‘정당히 주목받는 선에서 관심을 끊고, 내 세력을 키울 시간을 벌어야 해.’
그렇게 생각한 난 고개를 끄덕였다.
“란델이라니, 그림델의 란델을 말하시는 겁니까?”
그러는 사이, 대전사의 이름을 들은 듄켈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역시 아시는군요. 듄켈 경. 실력이 아주 출중한 친구입니다.”
“북부의 결투에 제국 기사를 내보내시는 겁니까?”
“제국 기사라니요? 이젠 엄연히 저희 콘웰 가문의 기사입니다.”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듄켈이었지만, 콘웰 백작은 능청스레 대꾸할 뿐이었다.
“아는 이름이야?”
“그림델 평원 전투에서 활약한 기사입니다.”
“북부에도 이름이 알려질 정도인데, 제국을 냅두고 왜 여기까지 온 건데?”
내게 귓속말하는 듄켈에게 그렇게 묻자, 떨떠름한 표정의 듄켈이 말했다.
“파문되었습니다. 귀환길에 민가를 습격해서, 그곳의 미망인을….”
“하, 끼리끼리 노는군.”
그렇게 귓속말하는 사이, 콘웰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내게 물었다.
“헌데, 공자께서는 대전사를 부르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눈가를 좁혔다.
“대전사라면?”
“듄켈 경은 공작 전하의 직속이니 적합하지 않을 테지만…. 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대전사를 임명하는 조건은 결투자의 혈족, 혹은 그에게 충성서약을 한 기사에 한한다.
‘델라인. 날 이용해 라인란트의 후계자를 끌어낼 생각이군.’
그 와중에도 이런 술수를 떠올리는 걸 보니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그 말대로입니다. 콘웰 백작.”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아, 진짜 제발 좀.’
그곳에는 주먹을 꽉 쥔 델라인이 서 있었다.
“클라인이 달튼을 죽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지만, 그렇다 해도 제 동생의 진술에 거짓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시다면?”
잔뜩 열이 오른 델라인을 보자 콘웰이 곧바로 그를 부추겼다.
‘신체능력과 검술 재능. 그 반만이라도 정치능력이 따라올 것이지….’
정적을 앞에 두고 표정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델라인.
형제라고 챙겨주는 건 고마운데, 이래선 되려 놀아나는 꼴이다.
“제가 대전사로 나가, 동생의 무고를…!”
“대전사는 지정하지 않습니다.”
델라인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서둘러 못 박았다.
“클라인, 무모한 짓이야!”
“이건 내 일이야. 형은 관련 없어.”
“네 일인데 그게 어떻게…!”
계속해서 날 말리는 델라인이었지만, 난 콘웰을 향해 단호하게 힘주어 말했다.
“결투는, 제가, 직접, 나섭니다.”
결투재판에 있어서 당사자의 의사는 절대적.
결투를 공증한 공작조차도 개입할 수 없다.
“하, 그것 참…. 용감하신 결정이시로군요.”
단호한 내 대답에 입맛을 다신 콘웰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회의장을 떠났다.
“당일 날 대전사를 말씀해주셔도 괘념치 않을 테니,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공자님! 하하하!”
그렇게 말하며 사라지는 콘웰을 보며, 난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클라인! 너…!”
회의장에 모인 이들이 나간 후.
내게로 다가온 델라인이 내 양 어깨를 붙잡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결투라니! 넌…!”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생각 없이 벌인 일 아니야. 승산도 있고.”
그렇게 말하며 델란엘의 손을 치웠다.
그 와중에 내 시선은 델라인의 어깨 너머에서 날 보는 아버지, 하인켈 공작을 향해있었다.
“…….”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공작인 하인켈의 보증이 아니었다면, 이 재판은 성사조차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내 모습을 본 하인켈은 고개를 끄덕인 뒤 회의장 밖으로 걸어갔다.
그가 향한 방향은 연무장이 있는 곳.
그것이 뜻하는 의미는 간단했다.
‘증명하라는 거군. 내가 결투에서 이길 수 있을지.’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날 설득하려는 델라인을 보았다.
‘그래. 어차피 집안을 뜯어고치려면, 늦든 빠르든 내 패를 보여주긴 해야 하니까.’
이종족의 배에서 나온 서자.
게다가 어릴 적 자신을 아키몬드라 칭한 저주받은 아이.
그런 날 이제까지 살려준 인간들을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 말 좀 들어 클라인! 지금이라도 대전사를…!”
“형님.”
난생처음 듣는 호칭에 델라인이 말을 멈췄다.
“야, 너 방금, 형님이라고…?”
‘때마침 이 녀석한테 뽑아낼 것도 있으니, 좀 치고받아도 문제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난 그를 향해 말했다.
"혹시 대련 한번만 해 줄 수 있어?"
***
연무장 한편.
하인켈은 연습용 블런트(Blunt) 롱소드를 든 델라인과 클라인을 보고 있었다.
“후회하십니까?”
자신에게 묻는 목소리에 공작이 옆을 보았다.
“듄켈.”
검은 머리를 뒤로 넘긴 기사가 그에게 다가와 있었다.
“못난 아비지. 자식이 죽으러 간다는데 말리기는커녕 등을 떠밀었으니.”
“…공자님께서는 죽지 않으실 겁니다.”
듄켈이 그렇게 말했지만,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클라인은 검을 다룰 줄 모르네.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그렇다면, 어째서 허락하신 겁니까?”
듄켈의 질문에 하인켈이 말했다.
“죽은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 나선 아이를,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막을 수 있겠나.”
콘웰과 클라인 사이에서 벌어질 결투재판.
그러나 그 주된 쟁점은 클라인의 암살혐의가 아닌, 클라인의 어머니인 클레어 공후의 명예였다.
“원래 같았으면, 내가 대전사로 나갈 생각이었네.”
“전하.”
“알고 있네. 사사로운 감정으로 내가 나선다면, 공작가의 위신은 더 떨어질 테지.”
그렇게 말하는 하인켈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교회에 있던 클라인을 공작가에 들였을 때,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
옛날 일을 떠올린 하인켈이 주먹을 쥐었다.
저주받은 이민족의 자식, 아키몬드의 환생이라며 천대받던 공자.
그런 클라인을 살린 것도 모자라, 다시 한 번 감싸려 한다면 지금 남아있는 본가 측 지지기반이 흔들린다.
그것이야말로 방계가 원하는 대로 놀아나는 꼴일 터.
“결투에서 승리한다면, 그들도 생각을 달리 할 겁니다.”
듄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클레어 공후의 명예회복을 위한 결투.
만일 클라인이 승리한다면. 콘웰의 파벌은 클레어 공후를 이민족의 여인이 아닌, 공작가의 귀부인으로 대우해야 한다.
방계의 기세를 꺾은 클라인의 입지 역시 상승할 터.
그렇지만 하인켈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정규 기사일세.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 않은가.”
마력을 다루는 기사와, 그렇지 못한 일반인의 차이는 분명하다.
갓 임관한 평기사라 할지라도 정병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이 기사일진데, 상대는 수많은 전선을 거친 정규 기사.
검을 들어본 적 없는 클라인에게는 불가능한 싸움이었다.
“결국, 난 클라인의 죽음을 방관해야 할 걸세.”
자식의 목숨을 대가로 가문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 그 무력감이 하인켈의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가문을 지키겠다. 굳게 다짐한 주제에,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군.”
그렇게 말하는 하인켈의 얼굴에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하아압-!”
카캉!
그러는 사이, 클라인에게 달려든 델라인이 노도처럼 검격을 퍼부었다.
자신이 직접 나가겠다, 고집부리는 클라인을 단번에 제압할 속셈이었다.
카앙-!
정면으로 검을 후려쳐 자세를 무너트리는 것과 동시에 중단 찌르기.
뒤이어 곧바로 검로를 틀어 클라인의 몸을 사선으로 베었다.
캉-!
청명한 쇳소리와 함께 클라인의 몸이 멀찍이 날아갔다.
“지금, 델라인의 검로를 전부 막아낸 건가?”
클라인의 싸움을 지켜보던 하인켈의 눈이 커졌다.
델라인의 검에는 웅혼한 마력이 가득 담겨있는 채였다.
“정규 기사라 할지라도 저것을 세 번 맞으면 검을 들기가 힘들 정도일 텐데, 어떻게…?”
‘아오 허리야….’ 라고 말하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클라인.
그것을 본 하인켈은 물론, 델라인의 표정 또한 이상해졌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 전하.”
듄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함께, 자세를 가다듬은 클라인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키리리릭?!
기괴한 소리와 함께 클라인의 검이 움직였다.
정면 정타, 중단 찌르기, 그리고 사선으로 이어지는 완벽한 검로.
방금 전, 델라인이 펼친 검술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크으?!”
당황한 델라인이 급하게 검격을 막아내는 사이, 클라인은 곧바로 한 스텝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잠깐만, 설마 저 기술은…?”
델라인을 거리 안에 집어넣은 클라인이 자세를 잡았다.
검로, 방향, 힘의 작용점까지.
피잉-!
클라인이 휘두른 검이 파공음을 냈다.
집중하지 않았다면 하인켈조차 놓쳤을 지도 모르는 엄청난 속도였다.
“말도 안돼…!”
클라인의 움직임을 본 공작은 눈을 의심했다.
그가 창안하고 수련한 유성검의 비기가, 클라인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클라인 도련님은…. 애초에 지는 싸움을 안 하시는 분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