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사슬 (2)
언제가 본 듯한 기분이 드는 남자 한 명이 등을 돌린 채 칠판에 뭔가를 쓰고 있다.
수식들이다.
방정식인 거 같은데…….
복잡하긴 하지만, 수준은 높지 않다.
잠시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등과 칠판, 그리고 수식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아이들이 보인다.
교실인가?
열 지어 붙어있는 책상마다 친구들이 앉아 있다.
희지?
착하고 예쁘장한 여자아이로 항상 타의 모범이 되었으며, 반장이기도 했던 아이다.
그 옆에는 성희도 보이고, 또 그 앞에는 진수도 보인다.
중학생 때인가?
그럼…….
이거 꿈이구나.
자각몽이다.
여기가 어딘지, 언제인지 분명하게 떠오른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수학 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평온하게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던 중이었다.
적어도 학교 안에서만은 이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타다다다닥.
복도에서부터 전해지는 다급한 발소리가 그 시작이었다.
드륵!
그리고 거칠게 앞문이 열리는 순간, 내 학창시절의 평온함은 종말을 맞았다.
“서진영!”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이 한껏 커진 수학 선생님은 보지도 않은 채, 담임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 표정…….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화가 난 듯, 혹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쪽을 보고 계셨다.
그 음성은 또 어떠한지.
그것은 차라리 절규라 해야 옳았다.
생전 처음, 피를 토하는 것 같다는 표현이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난 상황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는지 모른다.
하긴, 누군들 그 상황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영문을 몰라 눈만 크게 뜬 채 담임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얼른 따라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담임선생님은 처음으로 화를 내셨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교실로 뛰어든 선생님은 모두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게 달려와 억지로 끌어내셨다.
드륵!
책상이 밀리고 걸상이 넘어졌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했고, 또한 혼란스러웠다.
다만…….
그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있을 뿐.
그 점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왜인지 화가 잔뜩 난 듯 보이는 담임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복도로 나왔을 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떨리는 손.
그 손에서부터 이어져 뻗어 나간 팔과 어깨, 그리고 온몸이 격하게 떨리고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선생님은 화가 난 게 아니라, 울고 계셨던 거였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부, 부모님께서 교통사고로…….”
어렵사리 말문을 연 선생님이 전해준 소식이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아직은 삶의 무게를 알지 못하던 그 나이에도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곁에 계실 거라고 생각하던 두 사람.
그래서 가끔은 그 소중함을 모르고 투정도 부리고 버릇없이 굴기도 했던 부모님.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마지막 숨결을 거두기 전 내 이름을 신음 대신 흘리셨다던 어머니.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오는 트럭을 피하기 위해 끝까지 핸들을 꺾고 브레이크를 밟았던 아버지의 주검 옆에 놓인 상자에는…….
내가 몇 달 전부터 사달라고 노래를 부르던 게임기가 들어있었다.
그깟 게임기가 뭐라고…….
처참하게 부서진 차량과 상자째로 납작하게 눌려버린 게임기만 남겨놓은 채 두 분은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두 분은 없었다.
그것이 당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지, 진영아!”
정신이 먼저 무너졌고, 이내 몸이 무너졌다.
급격히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담임선생님의 절규가 귓속으로 파고들었지만, 그뿐이었다.
***
“정신이 드나?”
눈을 뜬 내게 들려온 첫마디였다.
“꿈이라도 꾼 건가?”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렸는지, 시야가 번지며 사물이 살짝 일그러져 보였지만 개의치 않고 물었다.
“날 어쩔 셈이지?”
목소리가 잠겨 있어서 그런가.
평소의 내가 아닌 듯 느껴졌다.
마치 갈고 또 갈아서 그 끝이 뭉툭해진 칼과 같은 느낌. 그럼에 날은 죽지 않고 서늘한, 그저 말뿐임에도 어째선지 날카로움을 감추고 있는 쇠처럼 느껴져 당사자인 내가 듣기에도 섬뜩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픽하고 웃더니 이명준이 비릿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글쎄.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지.”
“…….”
“그래도 뜻밖이야. 네가 거기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거든. 아, 아닌가? 생각해보면…… 늘 그랬지.”
마치 머릿속에서 뭔가를 뒤적거리기라도 하는 듯 눈을 치켜뜨고 약지로 이마를 긁던 이명준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몹시도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그랬지.”
“…….”
“차에 장난을 쳐뒀을 때도 이상하단 생각을 했지. 그 후에도 그렇고.”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말을 느리게 하며 눈가를 좁히더니, 이명준은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뭐, 궁금하긴 하지만 난 복잡한 건 질색이거든. 그러니 묻진 않겠다. 대신…….”
씨익하고 웃는 이명준. 그가 말했다.
“더 재밌는 걸 해보자고.”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느꼈다.
위험하다.
사지를 결박한 채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내 눈에 비친 이명준에게서 마치 한 마리 야수, 그것도 피에 굶주렸다기보단 먹잇감을 노리개 삼아 장난스럽게 툭툭 건드리는, 그런 맹수의 모습이 겹쳐졌다.
발톱은 세우고 있지 않지만, 장난감을 바라보는 듯한 그 눈빛에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도 남는 그런 잔인함이 깃들어 있었다.
***
장동일 상무에게서 연락을 받은 것은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한 시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전화가 걸려왔어도 수십 번은 더 걸려왔어야 할 시간이 지나고,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장동일 상무가 회사에 연락해 보안직원들을 사무실로 올려보낸 뒤의 일이었다.
거기다가 강형식이 일본에 온 김에 잠시 업체 미팅을 위해 전화기를 꺼두었던 게 가장 컸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강형식의 음성을 잔뜩 떨리고 있었다.
- 진정해라. 놈들도 생각이 있다면 그 아이에게 해코지를 하진 않을 거다.
“하아…….”
간신히 내뱉고 있는 숨조차도 떨리고 있었다.
강형식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진정하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눈앞은 시야가 흐려진 상태였고, 평소보다 좁아진 시야와 함께 먹물을 풀어놓기라도 한 듯 어두워진 채로 끊임없이 흰빛이 점멸하고 있던 것이다.
“사, 상무님. 안 됩니다. 녀석은 그렇게…….”
생각만으로도 두려워져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있자, 수화기 너머에서 호통이 날아들었다.
- 정신 차려!
“…….”
- 지금 그 아이가 믿을 거라곤 너 하나밖에 없다는 걸 몰라서 그래! 우리가 포기하는 순간, 그 아이도 끝이야!
추궁은 할 수 있다.
지금 당장에라도 강윤식에게 전화를 거는 것쯤 손가락 하나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일이 잘 풀린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놈들이 잠입했던 시각, 회사 내부의 CCTV는 지워져 있었고 경비원들 또한 정확한 인상착의를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증거가 없다.
이런 상황임을 잘 알고 있을 텐데, 강윤식이라고 순순히 인정할 리 만무하다.
“후우…….”
그래, 다 좋다.
다 좋은데…….
서진영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강형식은 숨을 골랐다.
길게 내뱉고 길게 들이쉬고.
천천히…… 천천히……. 호흡을 고르던 그가 몇 번의 시도 만에 간신히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 잡았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원래는 없던 계획이다.
아직도 임원들과는 물밑 접촉을 하는 중이었고, 저쪽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선 여전히 일본에 있는 게 나을 터다.
그러나 장동일 상무는 차마 그러지 말라고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강형식에게 있어서 서진영은 단지 사업 파트너만이 아니겠지만, 이 말을 뒤집으면 서진영이란 이름 석 자는 이제 삼한 식품의 핵심이기도 하단 의미였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이미 존재 그 자체가 브랜드였으며, 향후 강형식이 펼쳐나갈 계획의 중추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
더욱이 서진영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아마도 강형식은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지리라.
장동일 상무의 차분한 음성이 수화기 너머에서 날아들었다.
- 티켓이 준비되는 대로 연락하마. 이쪽도 서두를 테니, 넌 조심해서……. 후우, 좀 이따가 보지.
긴말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말하다 말고 전화를 끊는 그였다.
***
“지금 뭐라고 했어?”
김진숙 회장의 음성은 요새 들어 가장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그게…….”
침중한 표정을 한 채, 안경을 한차례 추켜올린 뒤 박 실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길지 않은 얘기의 끝에 김진숙 회장이 분노했다.
“미친 새끼들!”
백주대낮……은 아니었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납치라니!
그게 계획된 일이든, 아니면 우연이 겹쳐서 벌어진 사달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서진영이 납치됐다는 팩트다.
“후, 두 시간 전이라고?”
“예. 삼한 식품 쪽에서 급박한 움직임이 포착되어 알아보니…….”
“됐어. 것보다는 우리 쪽은 어떻게 하고 있지?”
“일단 회장님께 보고드리기 전 보안팀 직원들을 현장에 급파했습니다.”
“좋아. 지금 바로 비서실 동원하고, 서울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내!”
***
일파만파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파도가 만 개의 파도를 일으킨다는 뜻으로, 딱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구라고 하셨소?”
자정 무렵, 잠에서 깬 명제준 시장이 자신을 깨운 핸드폰을 귀에 대고선 되묻고 있었다.
- 삼한 식품 장동일 상무라고 합니다.
“으음, 그래요. 일전에 한번 본 것도 같구먼. 그래, 한밤중에 어인 일이요?”
이어지는 설명에 명제준 시장이 자리를 박차듯 상체를 일으켰다.
눈이 한껏 커진 그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뒤이어 나온 침음은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그 바람에 깨어난 아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명제준 시장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 되어 침대를 벗어날 뿐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언뜻 들으니까, 서 셰프 얘기 같던데?”
적어도 이 집안에선 서진영은 일개 요리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연예인이나 방송인도 아니었다.
산산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갔던, 화목했던 가정의 온기를 되찾아준 은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했으면 몰락할 뻔하던 명제준 시장의 정치 생명에 인공호흡기를 달아준 것도 서진영이었고.
아내가 저리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음……. 서 셰프가 납치된 거 같다는군.”
그렇기에 따져 묻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삼한 그룹쯤 되면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정관계 인사가 하나둘이 아닐 터.
그럼에도 명제준 시장에게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한 이유. 그 안에 든 사정 같은 건 모르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정계와 마찬가지로 재계 또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일상인 곳.
파벌이 있고,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정치와 모략이 판친다.
끝 모를 싸움은 어느 한쪽이 몰락할 때까지 계속될 거고, 현재 삼한 그룹 역시 그런 기미가 보인다고 들었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면 이쪽에선 믿을만한 패가 필요할 테고, 그런 패란 무릇 흔치 않은 법이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라도 절실했을 터다.
서진영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장동일 상무가 명제준 시장에게 연락한 이유였다.
“지금 가시게요?”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에게 아내가 서둘러 옷을 꺼내 내밀고 있을 때, 잠시 생각에 잠기던 명제준 시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 김 청장. 자는데 깨운 건 아닌지 모르겠소.”
잠시간 심각한 얘기가 오가고 난 뒤에야 명제준 시장이 집을 나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