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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사슬 (1) (201/204)

#201. 사슬 (1)

김진호 셰프한테 양해를 구했다.

그러곤 잠시 전화를 하기 위해 주방을 나왔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질 않는다.

빨리 좀 받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 강형식에게 까닭 모를 화까지 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본에 있는데, 지금의 나로선 방도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대상을 바꿨다.

장동일 상무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쪽도 통화 연결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

자꾸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안내 메시지만 뜰 뿐, 받을 생각을 않는다.

그럴수록 초조해지고 불안감만 상승한다.

동시에 지금은 사라져버린 나레이션의 목소리만 귓가에 맴돈다.

사내 임원들의 명단.

그걸 저쪽, 그러니까 강윤식이 확보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게 그렇게나 심각한 걸까?

나로서는 모른다.

그럼에도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별거 아니라면 굳이 나레이션이 나섰을까?

아니라고 본다.

틀림없이 강형식의 계획에 문제가 생길 터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막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계속해서 연결되지 않는 핸드폰을 보다가 입술을 잘끈 씹었다.

***

 삼한 식품 빌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승용차 한 대가 서 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보닛 아래의 엔진은 식은 지 오래다.

그런 가운데 한 남자가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음흉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번엔 우리가 되돌려주는 건가?”

박철준의 얘기에 오병수가 묵직한 음성을 토해냈다.

“잔말 말고 준비나 제대로 해.”

으뜸 심부름센터에서 나온 자들이었다.

“근데, 정말 사무실 빈 거 맞아요?”

물음이 날아들었지만, 오병수는 묵묵부답이다.

그저 건물로 들어갈 준비에 한창이다.

“흐흐, 이렇게 차려입으니까 꼭 뭐라도 된 거 같네. 역시 난 길을 잘못 들은 거 같아. 이제라도 공부해서 대학이라도 가볼까?”

미친놈처럼 실실 웃으며 중얼거리는 박철준을 오병수가 눈빛으로 한차례 질책한 후 백미러를 보며 목에 맨 넥타이를 매만진다.

“와, 우리 형님 보소. 완전 사장님이네, 사장님!”

아닌 게 아니라 오병수의 모습 어디에서도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금테 안경까지 쓰고 있어서 그런가, 어떻게 봐도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으로 보인다.

박철준 역시 마찬가지.

오병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아치 냄새는 한결 가셨다.

그런 상태로 희희낙락하던 박철준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진짜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 차라리 복면 뒤집어쓰고 숨어들어 가는 게 낫지 않나?”

“보안카드나 잘 챙겨.”

“형님, 그 사람 믿어도 되는 거요? 난 당최 그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서.”

“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돈만 받으면 돼.”

“하긴.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데. 까짓 합니다. 언젠 우리가 앞뒤 재고 움직였냐고.”

잠시 후 차 문을 열고 내린 두 사람이 삼한 식품 빌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중 한 사람, 오병수의 한쪽 손에는 검은색 광택이 감도는 서류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

미쳤다, 미쳤어!

나레이션만 믿고 뛰쳐나오긴 했다만.

저녁 식사 준비가 한창인 상황에서 갑작스레 어딜 좀 갔다 오겠다고 말하다니.

하아, 진짜 잘려도 할 말 없다.

그런데도 김진호 셰프는 잠시 날 바라보기만 했을 뿐, 이내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그만큼 날 믿는다는 거겠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이래도 되나 싶었다.

만일에 하나…….

별일 아니라고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나레이션에게 화를 내고 말 거다.

아니지.

나레이션이 그럴 리가 없잖아.

분명 중요한 일일 거다.

급하게 차를 몰면서 중얼거렸다.

“후우, 그냥 박 실장님한테 연락할걸 그랬나?”

것도 아니면 매니저인 김호준이라도…….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사적인 일에 그들을 끌어들이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지난번처럼 도저히 해결할 방도가 없다면 또 모를까.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여유가 있는 상황.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나레이션의 경고대로라면 아직은 여유가 있다.

물론 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장동일 상무와 통화를 시도 중이긴 했지만.

“아! 상무님!”

그리고 그런 노력이 통했는지, 마침내 수화기 너머에서 장동일 상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카페 외야 테라스.

그곳에 앉아 지켜보는 중이었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건물을 빠져나오고 나서도 한참을 더 기다린 보람이 있던 것일까.

간간이 보이던 사람들도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오병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후 8시 30분.

더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했을 거고, 설사 남아 있더라도 마주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혹여라도 마주치더라도 문제 될 것도 없고.

나중에는 서류가 탈취된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땐 이미 상황이 끝난 뒤일 것이다.

그리고 뒷일을 책임져줄 사람도 있고.

“그 새끼, 혹시 나 몰라라 하는 거 아니요?”

“그만.”

오병수의 엄한 목소리에 박철준이 입을 다문다.

하지만 입을 삐죽거린다.

“일 끝날 때까지 그 입 열지 마라.”

건물 앞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당부를 한 뒤, 오병수는 박철준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원 한 명이 그들 두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그뿐이었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바로 대기업의 빌딩이었다.

더구나 9시가 조금 못 되는 시간은 어중간한 시각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 퇴근하지 못하는 이들도 몇인가 남아 있었고, 야근하는 직원들도 수시로 들었으며 간혹 외근을 나갔던 이들이 잠시 들리기도 하는 시간.

오병수가 이 시간을 택해 건물로 들어온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보안카드만 있으면 문제 될 건 없었다.

자연스럽게 통과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삑-.

목에 걸고 있던 보안카드를 대자, 버저가 울리며 가림막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오병수와 박철준은 마치 제집 드나들듯 통과해 엘리베이터까지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그 후부턴 일사천리.

경비원은커녕 무엇 하나 그들을 막아서는 건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을 향해 올라간 뒤, 십여 분 정도가 흘렀을까.

끼익!

정문 바로 앞에 차가 한 대 급하게 멈춰섰다.

그러더니 문이 열리며 누군가 얼굴을 디밀었다.

서진영이었다.

그는 불난 집에서 뛰쳐나오기라도 하듯 차 문을 활짝 열고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내달려 빌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그를 경비원들이 막아섰다.

“하악, 하악!”

서진영이 숨을 몰아쉬며 들고 있던 핸드폰을 그들에게 내민 것도 그때였다.

- 나, 장동일 상무요!

얼떨결에 서진영에게 넘겨받은 핸드폰에서 뜻밖의 음성이 들려오자, 경비원 한 명이 잔뜩 굳은 채 부동자세가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

두 사람이 장동일 상무의 사무실 앞에 이를 때까지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6층에 멈춰섰을 때도, 어둡고 긴 복도를 비상등과 불빛에 의지해 조용히 걸을 때에도, 모퉁이를 돌아 마침내 사무실 문이 보일 때에도 누구 하나 그들을 가로막지 않았다.

삐빅!

이명준으로부터 받은 보안카드를 가져다 대자, 고요하다 못해 으스스하기까지 한 복도의 공기를 전자음이 짧게 흔들었다.

“크큭, 개 치고는 일을 잘한다니까.”

늘 이명준을 강윤식의 개라고 일컫곤 하는 박철준이 내뱉자, 오병수가 눈을 싸늘하게 뜨고 바라보았다.

“아아, 알았어요. 입 닥치고 입으면 되잖아요.”

딸각.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릿한 웃음을 지워내지 않는 박철준을 잠시 바라보던 오병수가 문을 열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안을 살피곤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를 박철준이 뒤따랐다.

잠시 후, 그들은 책상 뒤 벽 상단에 위치한 액자를 떼어내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명준이 일러준 대로였다.

그곳에선 가로세로 50센티 정도 되는 금고가 있었다.

오병수가 뒤로 물러나자, 박철준이 나섰다.

이미 외워두고 있던 건지, 빠르게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삐비비비비비빅.

일곱에 이르는 보안코드를 누르자 마지막에 이르러 길게 울리며 문이 열렸다.

철컥.

그다지 크지 않은 금고문이었지만, 무게는 제법 나가는지 묵직하다.

박철준이 문을 열곤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다가 오병수의 눈빛을 발견하곤 금세 입을 다문다.

그러는 동안 오병수가 금고 안을 뒤졌다.

1분? 2분?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게 많지 않은 덕분일까.

금세 원하던 문건을 찾아낸 오병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철준은 또다시 휘파람이라도 불 듯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씩 웃어 보였다.

서류철을 펼치자 스무 명쯤 되는 이름이 줄지어 적힌 명단과 함께 그에 관련된 서류가 잔뜩 들어 있던 것이다.

그들이 가방을 열어 서류철을 챙기고 막 일어났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이어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잔잔하기만 하던 사무실의 공기를 흔들었다.

“헉! 헉!”

딸깍!

그와 동시에 스위치 올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불이 들어왔다.

“엇!”

놀란 박철준이 튕기듯 돌아서 바라본 곳에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가 서 있었다.

“너, 넌?”

오늘, 이곳에서 마주치게 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서진영이었다.

***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른다.

그런 걸 따질 여유도 없었거니와, 설사 그렇더라도 오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했다.

오죽하면 장동일 상무가 침음을 흘리며 내게 부탁했겠는가.

하필이면 회사에 다 와 갈 무렵 통화가 되는 바람에, 다른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고 할 틈도 없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겁을 먹거나 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정말 나레이션이 일러준 대로 놈들이 여기에 잠입했는가였다.

문을 열자 드러난 상황.

언제나 그렇듯 나레이션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두 명의 남자가 보였다.

이미 익숙한 얼굴들이다.

으뜸 심부름센터. 오병수와 박철준이라고 했던가?

나를 미행했던 자들이었다.

사진까지 찍었고.

그런 그들이 여기 있다는 건…….

그리고 아직 닫히지 않은 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금고.

그것으로 모든 상황은 이해된다.

내가 여기 올 줄 몰랐기 때문인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게 긴장을 지우려 애쓰며 말문을 열었다.

“그만하시죠.”

잠시 날 바라보는 남자들.

그중 하나, 박철준인가 뭔가 하는 남자가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싫은데?”

되묻는 그를 보다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제야 뒤쪽에 서 있던 경비원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로소 낭패한 표정이 되는 박철준.

한데, 그에 비해 오병수의 얼굴은 편안해 보이기만 한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뭐지?

이 정도 상황이면 전부 끝난 거 아닌가?

의아해져서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나?

그러는 사이에도 경비원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스총을 단단히 쥔 채, 조금만 허튼짓을 하면 바로 대응하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때였다.

파지지지직!

뭔가 지지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동시에 목에서부터 시작된 저릿한 느낌이 온몸을 흔들었다.

“끄으…….”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음을 흘리면서 무너져 내렸다.

그런 내 눈에 한 남자의 움직임이 보였다.

마치 번개처럼 들이쳐 두 명의 경비원을 동시에 공격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뒷목을 내려치고, 동시에 발을 뻗어 또 다른 이의 허리를 분질러버릴 듯 걷어차는,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콰직!

마지막으로 쓰러진 경비원의 머리를 무릎으로 찍으며 남자가 돌아서고 있었다.

이명준?

순간 깨달았다.

내가 무얼 놓치고 있었는지를.

그런 날 비웃기라도 하려는지 이명준의 입매가 휘어졌다.

명백한 비웃음.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화도 나서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그저 생각에 그칠 뿐이었다.

이명준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팍!

뭔가 머리를 가격하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번쩍하며 의식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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