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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고르디우스의 매듭 (3) (200/204)

#200. 고르디우스의 매듭 (3)

그날 아침, 할아버지인 강 회장이 한 얘기는 강윤식에게 있어서 의미가 깊었다.

그에게 본부장의 자리를 맡긴다는 것.

그것은 단지 승급의 의미만이 아니었다.

실장과 마찬가지로 본부장은 정식 직급은 아니지만, 적어도 삼한 전자에서만은 뜻깊은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왜냐면 본부장이란 자리는 사업본부 단위의 책임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개 사업본부는 기능 또는 편의에 따라 여러 개의 부서로 뭉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는데, 이때 부장 이상의 임원, 즉 이사가 맡게 되며 여러 부서의 부장 중 최고 선임자이기도 하다.

삼한 전자의 본부장이란 그런 자리다.

다시 말해 직급은 아니지만, 직책으로서 실장보다 좀 더 많은 권한이 주어지며 공식적인 이사 자리에 오르기 전에 실력을 평가받는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강윤식 입장에서는 고무적일 수밖에 없다.

그간 삼한 전자에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끌어다 쓴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서 사운드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며 분기탱천해 있던 그에게 강 회장의 지시는 말 그대로 전화위복이나 다름없었으므로.

한마디로 강 회장은 교통정리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강윤식에게는 삼한 전자, 강형식에게는 삼한 식품. 그렇게 둘에게 각자의 자리에서 이전보다 한층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만들어준 셈이다.

한편으로는 사촌끼리 공연한 다툼으로 힘 빼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해보라는 뜻으로 비칠 수도 있고.

하지만 강윤식으로서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 삼한 식품의 부사장보단 오히려 삼한 전자 본부장이 훨씬 더 막강한 실권을 지닌 탓이다.

그만큼 삼한 그룹에서 삼한 전자는 중추적인 기업이다.

말할 것도 없이 강윤식은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야말로 확실하게 강형식을 앞지르고 확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굳힐 수 있게 되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은 안타깝게도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다시 말해봐.”

강윤식은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이명준에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삼한 식품이 여러 경로를 통해 삼한 전자의 주식을 매입 중입니다.”

이명준의 얘기에 강윤식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친 거 아닌가 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물론 할아버지인 강 회장이 직접적으로 얘기한 건 아니다.

그렇긴 해도 회사 내부에 계열사 간 주식매매, 혹은 교환을 금지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거로 알고 있다.

그게 언제까지라는 구체적인 말은 없었지만, 삼한 그룹의 일원이라면 따르지 않을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랬는데…….

감히 강형식이 반기를 든 것이다.

적어도 강윤식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이명준을 가만히 보던 강윤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끝내 기어오른단 말이지?”

삼한 식품이 실질적으로 누구의 손아귀에 있는지 두말하면 입만 아프다.

자신의 사촌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가 물었다.

“증거는 확보했나?”

“증거랄 것도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물밑에서 작업한 것 같았는데, 며칠 전부턴 아예 대놓고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이명진의 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그만은 철석같이 믿는 강윤식이었다.

예전에 강형식의 차에 장난질해놓은 것도 이명진이었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강윤식의 말이라면 설사 그게 불법적인 일이라도 토 하나 달지 않고 수행해온 수족이었으니.

그런 이명진이 하는 말이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강윤식이 손짓으로 이명진을 가깝게 불렀다.

그 후, 다가온 이명진에게 강윤식이 은밀하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

“정말 괜찮겠습니까?”

강형식의 질문은 많은 걸 내포하고 있었다.

장동일 이사가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러모로 이편이 나아.”

“그래도 지금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얘기하는 강형식에게 장동일 상무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의심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지. 잠시 나가 있는 동안 일단락될 거다. 아마 일본에서 돌아오면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거고.”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현재까지 삼한 식품 이름으로 확보한 삼한 전자 주식은 2% 남짓. 거기에 차명을 동원해 손에 넣은 것까지 더하면 그 양은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삼한 그룹 전체에서 물밑 접촉 중인 임원들의 숫자만 스무 명이 조금 못 된다.

혹시 몰라 일본 출장을 핑계로 한국을 떠나고 있지만, 사흘 정도 있다 돌아왔을 땐 아마도 그중 절반 이상은 강형식에게 힘을 실어주게 될 터다.

그렇게 되면 그의 편에 서게 되는 이는 못해도 13명을 넘게 되고, 그 정도면 삼한 전자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에 꽤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강윤식, 아니 정확히는 강형식의 작은 아버지인 강구철 사장을 견제하게 될 힘을 얻게 되는 거겠지만.

그러기 위해 일단 지금은 한국을 떠나 있는 게 맞다는 판단이었다.

어차피 다 알게 될 일이라도, 그것이 비록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때로는 그런 것도 필요한 법이니까.

그래야 나중에라도 강 회장이 강형식에게 책임을 묻게 되는 상황이 올 때 조금이라도 봐줄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명분을 확보하는 일이다.

일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서.

그걸 알고 있지만, 강형식으로서는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었다.

일은 자신이 벌였는데, 막상 중차대한 시기가 오자 혼자서만 위험을 피해 도망가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그런 그의 속내를 헤아린 것일까.

“형식아.”

강형식의 이름을 부르는 장동일 상무의 음성이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대꾸 없이 바라보는 강형식의 눈빛이 살짝 흔들릴 때 장동일 상무가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어서 가라. 알고 있겠지만, 네가 무너지면 옷 벗을 사람이 한둘이 아냐.”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강형식은 한차례 눈을 감고서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눈을 떴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섰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강형식을 바라보는 장동일 상무.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이내 입술이 열리며 흐뭇하면서도 회한이 담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저만큼 큰 건지…….”

세월은 참…….

단순히 빠르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부모를 잃고 장례식장 한가운데 던져져 정신을 잃을 정도로 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장동일 상무가 돌아섰다.

“가지.”

공항을 빠져나오는 장동일 상무를 몇 명의 남자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

일이 좀처럼 손에 잡히질 않는다.

망할.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그러니까 그걸 왜 자르냐고!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다만, 대충 흘러가는 상황을 볼 때 강 회장님이 뭔가 특단의 조처를 내린 거 같은데.

그럼 그냥 그 지시대로 따르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매듭을 푸는 건지, 아니면 오히려 더 복잡하게 엉키게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

자르긴 뭘 자르냐고.

한마디로 제 할아버지에게 개기겠다는 거 아냐?

아 진짜! 자기가 무슨 사춘기 반항아야?

편할 길 마다하고 왜 그러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도 안 되고,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친구라 해도 말이다.

“차라리 말을 말든가.”

몰랐으면 지금처럼 골치 아프지도 않지.

그래놓고선 일본으로 내빼?

진짜 기가 막힌다.

한숨을 푹푹 내쉬곤 주방으로 들어갔다.

“너 담배 피우냐?”

준석이 형이 느닷없이 물어온다.

“예? 그게 무슨?”

“잠시 바람 쐬고 온다더니, 뭘 그렇게 오래 있다 와?”

“아, 그게…… 그냥 좀 머리 아픈 일이 있어서요.”

“뭔데 그래? 아, 혹시 그거 때문이냐?”

“……?”

“청이한테 들으니까, 이번에 떨어진 애 중에 네가 마음에 들어 하던 애가 있다며? 걔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음, 한청 이 녀석……. 보기보다 입이 싸네?

내가 쳐다보자, 저만치 서 있던 한청이 흠칫하더니 재빨리 시선을 돌리곤 모르는 척한다.

나 참. 그런다고 없던 일이 되냐?

고개를 내저으며 얘기했다.

“수아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요. 걔가 떨어진 게 좀 아깝긴 하죠.”

사실이다.

사촌 여동생과 이름이 같아서 그런지. 아니면 작년에 주방장님 지시로 아우라지에 다녀올 때 기차에서 만난 인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이 가는 건 맞다.

그렇긴 하지만, 녀석이 예선에서 떨어진 게 아까운 건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다.

“실력이 좋거든요. 열심히 하는 게 예쁘기도 하고요.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그래도 나름 오디션인데 공정해야죠.”

“그래? 그럼 뭐가 그렇게 머리가 아프다는 건데?”

“친구 때문에 그래요.”

“응? 친구? 너 친구 없잖아.”

헐.

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준석이 형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니, 장난이 아니네?

기가 막혀서!

지금 이 형. 진심인 거야?

결국, 또 한차례 한숨을 내쉬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더 얘기해봐야 입만 아플 거 같아서.

그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오늘 메인디쉬는 가자미찜이니까, 쉬엄쉬엄해도 되겠…….”

김진호 셰프의 눈치를 보며 준석이 형이 말을 건네오고 있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나레이션 때문이다.

저녁 시간.

다섯 시가 넘어가고 있는 지금, 왜 갑자기 나레이션이 들려오는 걸까?

속으로 원인이 될 만한 건수를 몇 가지 떠올리고 있는 동안, 음악과 함께 낭창낭창한 나레이션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 강형식이 그룹 내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추진 중인 일은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어라?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였는데, 웬일로 알려주는 거지?

강형식이 속 시원하게 얘기해주지 않으니 대신 말해주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레이션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준석이 형이 뭐라 뭐라 떠들고 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어차피 반은 농담이고, 또 반은 객쩍은 소리일 테니까.

그 사이, 나레이션은 그동안 궁금해하던 것들을 이야기보따리 풀어내듯 얘기해주고 있었다.

- 첫째는 주식매입과 함께 주식 맞교환을 통해 삼한 전자의 지분을 확보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룹 내 임원들을 회유해 자신에 대한 지지를 부탁하는 것이다.

간단명료하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잘은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판단 같은데?

누가 뭐래도 삼한 그룹의 핵심은 전자 쪽이다. 그런 그쪽의 지분을 손에 쥔다는 건 그만큼 힘을 가지게 된다는 뜻일 터다.

또한, 임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그룹 내에서 목소리를 높이겠다는 것 역시 앞으로의 행보에 큰 힘이 되어 줄 거 같고.

자식!

매듭을 자르네 뭐네 하더니, 생각보다 온순한 방법으로 힘을 기르려나 보네.

흠, 근데 어떤 부분에서 그런 과격한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 거지?

조금 의아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도 나레이션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 한편, 이 사실을 알게 된 강윤식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당연한 일이겠지.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기분이 좋지 않겠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아니 무시하고 있던 강형식이 바짝 뒤쫓아 오고 있으니까.

그래서 뭘 어쩌겠어?

강 회장님이 지켜보고 있을 게 뻔한데, 예전처럼 차에 못된 장난을 친 것처럼 훼방 놓을 수도 없을 테고.

속으로 비웃고 있을 때였다.

- ……그가 이명진에게 내린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

이명진.

정확한 건 모르지만, 강윤식의 손과 발 같은 남자로 온갖 잡다한 불법적인 일마저 마다하지 않는,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강윤식의 지시를 수행하는 하수인이다.

그런 그의 이름이 들려오고 있었다.

- 오늘 밤 이명진은 강윤식의 사주를 받고 삼한 식품에 잠입해서, 현재 장동일 상무가 은밀하게 접촉 중인 사내 임원들의 명단을 빼돌릴 계획이다.

자, 잠깐.

뭘 빼돌려?

사내 임원들의 명단?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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