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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고르디우스의 매듭 (2) (199/204)

#199. 고르디우스의 매듭 (2)

묻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강 회장님이 물은 뒤다.

별 뜻 없이 그렇게 물은 걸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대답부터 할 일이었다.

“예. 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서 말입니다. 아마 조금 있으면 다들 나올 겁니다.”

다급히 인사부터 하곤, 아까 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나를 강 회장님은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주방을 한차례 둘러보고 계셨다.

그사이 난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잔뜩 굳어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고.

그럴 수밖에.

지금 눈앞에 계신 분은 무려 삼한 그룹의 총수다.

정·재계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닌 재벌가의 주인이란 얘기.

뿐만 아니다.

일단 내 고용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친한 친구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잔뜩 굳어서 눈알만 돌려가며 강 회장님을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예?”

“아니네. 주방이 깨끗하다고 했을 뿐이네.”

“아! 그, 그렇습니까?”

군대는 한 발짝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나지만, 왜인지 이해가 된다.

이제 갓 전입해온 신병은 연대장은커녕 중대장 앞에만 서도 저절로 말을 더듬게 된다지?

지금 내가 딱 그짝이다.

강 회장님이 무슨 말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린다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김진숙 회장이나 강 회장님이나 다 같은 회장님인데, 어째 무게감이 다르다.

당연히 눈앞에 서 계신 강 회장님이 훨씬 더 거대하게 느껴진다.

얼어붙다 못해서 망부석이라도 된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굳어 있는 동안, 강 회장님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넘어간다.

동시에 생각했다.

서진영!

너 이것밖에 안 돼?

누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냐고.

생각해 보면, 눈앞에 있는 사람도 그저 사람일 뿐이잖아?

그렇다고 재벌 총수들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지난번에 이하연의 할아버지도 뵀고, 언젠가 팔순 잔치 때는 진 회장도 보지 않았냐고.

거기에 김진숙 회장하고는 틈만 나면 만나서 차를 마시는 사이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뭘 이렇게 떨고 앉았는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 긴장할 필요 없잖아?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뭘 바라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강 회장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진다.

응?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살짝 치켜떴을 때, 강 회장님이 말씀하셨다.

“진즉에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네만.”

“……?”

“고맙네.”

“……예?”

나도 모르게 되물었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웃으실 뿐.

강 회장님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날 지긋이 바라보고 계셨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왜 긴장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강 회장님이 뭘 얘기하고 싶어 하시는지.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

강형식.

내게 어떤 불이익이 생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기껏해야 쫓겨나기밖에 더하겠냐고.

하지만 나는…….

강형식의 친구이면서, 또한 가장 가까운 지인이기도 하다.

사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당연히 내가 실수해서 자칫 밉보이기라도 하면 욕은 나만 먹지 않는다.

굳이 나레이션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강형식을 응원하고 있는 나였으니까.

동시에 지금 눈앞에서 미소를 보내고 있는 이의 마음도 와닿는다.

흡사 손자라도 보듯 기꺼운 웃음을 보여주는 강 회장님.

그 미소가 이렇게 얘기하는 듯하다.

- 앞으로도 그 아이를 잘 부탁하네.

……라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말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진짜…… 친구라면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얘기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힘닿는 데까지는 돕겠습니다.’

신기한 일이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한 얘기일 뿐인데.

강 회장님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계셨다.

아니면, 입으로 내뱉은 얘기가 마음에 드셨던 걸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지만, 흡족하단 표정이 되신 강 회장님은 이내 몸을 돌리셨다.

그러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아, 괜찮다면…….”

말씀하셨다.

“오늘 아침은 미역국으로 먹고 싶군.”

  

***

진짜 놀랍다.

나레이션의 그 신통방통함은.

이러니 누군가 나더러 점쟁이네 뭐네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하지.”

고윤수 주방장님이 오셨더라면 그분께 말씀드렸겠지만, 오늘은 안 나오신다고 하기에 김진호 셰프한테 얘기했더니 크게 고심하지 않으시고 바로 대답하신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 회장님이 직접 와서 부탁한 거니까.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예.”

“그럼, 아침 메뉴는 간단히 하도록 하지. 미역국만 끓이고 계란말이랑 김치만 내가는 거로.”

지시가 떨어지자, 이내 주방 안이 부산스러워졌다.

준석이 형이 소고기를 써는 동안, 내가 미역을 불리기 시작했고 그 사이 한청이 달걀을 깼다.

그렇게 한참 만에 식사 준비를 마쳤을 때, 강 회장님을 비롯해 강씨 집안 가족들이 하나둘 내려왔다.

그중에는 두 사람, 강윤식과 강형식도 보였다.

헛 참.

나 같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볼 만도 한데.

둘 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들이다.

딱히 친밀감을 표시하거나 인사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잡아먹어 안달 난 표정은 아니었다.

마치 서로 아무 상관없다는 듯 모른 척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채로 식탁을 둘러싸더니 안성댁 아주머니와 혜순이 누나가 내간 미역국을 한 술 두 술 떠먹기 시작했다.

그러길 얼마간.

강 회장님이 물었다.

“희아는 언제 간다고?”

최윤희.

강형식의 사촌 누나. 듣기로는 음악을 전공했는데 잠시 귀국한 상태였고 머잖아 다시금 파리로 떠난다고 들었다.

“한 달 정도 있다가 나갈 겁니다.”

대답을 들은 강 회장님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때부터 손주들에게 하나둘 근황을 묻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강윤식에게 이르렀을 때, 정작 그에겐 묻지 않고 강구철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곧 인사이동이 있다지?”

“예. 오는 유월에 발표할 생각입니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강 회장님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곤 다시 묻는다.

“본부장 자리도 해당되나?”

“그렇진 않습니다.”

“흠, 박종수 부장이었던가?”

“예.”

“그럼 이렇게 하지. 박종수 부장은 이번에 퇴임하는 철강 사장 자리로 발령내고, 대신 그 자리엔…….”

잠시 뜸을 들이던 강 회장님이 강윤식에게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윤식이가 가도록 해.”

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떻게 보더라도 강윤식에게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당사자인 강윤식의 눈에 희열이 비친다.

동시에 강윤식의 아버지인 강구철 사장 역시 기쁘다는 표정이었고.

그에 반해 강형식은…… 무표정이다.

그때였다.

“이참에 형식이도 진급해. 실장 자리 꿰차고 앉은 지 3년이면 이제 그럴 때도 되었잖아?”

또다시 경직되는 공기.

그러거나 말거나 강 회장님이 얘기했다.

“김 이사에겐 내가 말해놓을 테니, 그런 줄 알고.”

강윤식과 강형식을 차례로 훑어보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샌가 강 회장님이 앉아 계셨던 자리엔 빈 그릇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원래 아침나절에 녀석을 만나는 일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점이라서 녀석이나 나나 바쁘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겨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지라, 주방에서도 강 회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다 들려왔던 까닭이다.

당연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 앞 벤치에 나란히 앉은 채로 물었다.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이해가 가질 않아서 그러는데, 괜찮은 거냐?”

캔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며 강형식이 대답한다.

“들은 거야?”

“듣고 싶어 들었나?”

“하긴. 비밀도 아니지.”

“글쎄. 그건 네 입장이고. 알려지면 주식이 널뛰듯 할걸?”

“어디 가서 말할 거 아니잖아?”

당연한 걸 묻는다.

내가 그렇게까지 입이 싸지도 않거니와, 그런다고 해서 떡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럴 이유가 없다.

“그래서, 뭔데?”

“뭐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강형식이 피식하고 웃더니 빈 캔을 저만치 떨어져 있는 휴지통에 냅다 집어 던진다.

깡!

안타깝게도 캔은 휴지통 모서리에 맞고는 튕겨 나와 바닥을 구른다.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캔을 들어 안으로 집어넣었고.

하는 김에 내 것도 버리고.

그때, 강형식이 되물어 온다.

“나쁠 건 또 뭐 있어?”

돌아서니, 녀석이 벤치에 눕듯이 다리를 뻗대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너 혹시 알렉산더 대왕이 잘라버렸다는 매듭 이야기 아냐?”

“뭐? 고르디우스의 매듭?”

“어? 아네?”

“참네. 그거 요즘 초등학생도 아는 이야기거든?”

“진짜?”

글쎄다.

이름까진 몰라도 대강의 내용이라면 알지 않을까?

고르디우스의 매듭.

전설에 의하면 프리기아 왕국에는 왕이 없었는데, 어느 날 테르미소스의 신탁에 ‘테르미소스에 우마차를 타고 오는 자가 왕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 내려왔다. 그러다가 시골 농부였던 고르디우스가 우마차를 타고 테르미소스 성에 들어왔고, 결국 그가 왕이 되었다. 이후 왕위를 물려받은 미다스가 자신과 아버지가 타고 온 우마차를 프리기아의 신 사바시오스에게 바치며 이 우마차를 신전 기둥에다가 매우 복잡한 매듭으로 묶었는데, 그때부터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왕이 되리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크크큭. 진짜 웃기지 않냐?”

“뭐가?”

강형식은 낄낄거리더니 툭툭 내뱉고 있었다.

“얼마나 빡쳤으면 칼로 잘라버렸겠냐고.”

이상한 해석이긴 한데.

말이 되긴 하네.

프리기아로 진군한 알렉산더 대왕이 그 전설을 듣고는 매듭을 풀려고 매달렸다가 결국 풀지 못하고 칼로 매듭을 잘라버렸다는 이야기.

결국 신탁대로 아시아의 왕이나 다름없게 되긴 했지만, 정상적으로 풀지 않아서일까? 그의 사후에 제국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고 말았다.

“나라도 열 받긴 했을 거야.”

납득한 얼굴로 말했지만, 더 이상 대꾸가 들려오지 않는다.

뭔가 싶어서 바라볼 때, 강형식이 한숨을 내쉰다.

아까처럼 웃지도 않고 더 이상 장난스러운 표정도 아니다.

그런 채로 녀석이 말했다.

“할아버지께선 다 알고 계셨던 거지.”

“……?”

“그러니까…….”

“…….”

“이렇게 묶어버린 걸 테고.”

무슨 말이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다시 물으려던 찰나였다.

“방금 연락받았는데…….”

녀석이 한층 무거워진 어조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계열사 간 주식거래를 엄금하셨다고 하더라.”

음…….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현재 강형식이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만은.

“그럼 어떻게 되는데? 아니, 어떻게 할 건데?”

내가 묻자, 녀석이 날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한껏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뭘 어떡해?”

“.....”

“칼로 잘라버리면 되지.”

***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명패에는 강충삼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직책은 회장.

요즘 트렌드처럼 유리로 만들거나 한 것은 아니어서 세련된 맛은 없었지만, 대신 검은 바탕에 자개로 새겨진 글자가 꽤나 고풍스럽고 권위적으로 느껴진다.

그 명패를 강 회장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껏해야 명패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저걸 손에 넣으려면 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씨앗을 뿌리고 지켜만 본다.

그것이 자신처럼 맨바닥에서 빈손으로 성을 일구는 자가 아닌, 선대의 성과를 고스란히 물려받기 위해 태어날 때부터 ‘투쟁’이라는 숙명을 짊어진 아이들의 운명이니까.

한 명에겐 삼한 전자의 본부장이란 자리를.

또 한 명에겐 삼한 식품의 부사장이란 자리를 주었다.

그리고 계열사 간 주식거래도 금지했다.

물론 법적으로 금지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룹 내에서의 금지령이다.

하지만 누가 감히 회장의 엄명을 따르지 않을 건가?

그런데도 기대가 된다면 이상한 일일까?

두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

“쾌도난마라고 했던가?”

칼을 뽑을지 아니면 순순히 칼을 바꿔 차고 따를지.

어느 쪽이든, 혈기왕성한 아이들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는 재미.

강 회장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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