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본선 진출? (4)
1조 바닷가재 타르타르, 새우 버터구이, 양 갈비 스테이크.
2조 광둥식 깐풍기, 쏘가리 탕수육, 죽순 볶음요리.
3조 밀푀유 나베, 봉골레 술찜, 그리고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해물탕.
4조 신선로, 궁중 잡채, 두부 완자 튀김.
이상이 각 팀이 최종적으로 내놓은 요리들이다.
경연이 시작되고 2시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그중 바닷가재 타르타르와 쏘가리 탕수육, 궁중 잡채와 밀푀유 나베를 만들 때 내가 투입되었다.
후우, 요리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이들 중 두 가지는 나로서도 처음 만들어보는 거라 만일 나레이션의 도움이 없었다면 헤맸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나레이션이 일러준 대로 요리를 하다 보니 큰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다.
아마 겉으로 보기엔 꽤 자연스러웠을 터다.
“이제 시식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각 조별로 부스를 옮겨 음식을 먹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진석의 멘트에 따라 팀들이 움직였다.
1조가 2조의 부스로, 2조가 3조로, 3조가 4조로 움직이는 식이었다.
그 후엔 다시 밀리듯 부스를 옮겨 또다시 시식하게 될 테고.
물론 나 역시 음식 맛을 보기 위해 1조로 다가갔다.
4조에 속해 있던 한청이 날 반갑게 맞이한다. 그중에는 헤나도 있어서 반짝이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어디 볼까요?”
한진석이 자신의 팀원들이 3조와 함께 4조가 만든 요리를 맛보고 있을 때, 난 4조 팀원들과 함께 1조의 요리를 맛보기 시작했다.
우릴 따라붙은 VJ의 카메라를 막지 않는 각도에서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놀렸다.
먼저 바닷가재 타르타르.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맛이다.
적당히 다져진 살을 소스와 함께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자, 랍스타 특유의 바다내음과 함께 생크림의 풍미가 가득 퍼진다.
식감 또한 마찬가지.
사각거리면서도 진득한 느낌.
그런 가운데 고소하고 향긋한 맛이 물씬 느껴졌다.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얘기했다.
“좋군요.”
내가 만들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날고기 특유의 비린내가 날 수도 있는데, 플랑베로 잡냄새를 날려버려서 그런가 역한 냄새는 없네요. 게다가 랍스타가 주는 고소함과 함께 씹는 맛도 일품인데, 비스큐 뮤슬린 소스가 더해져 부드럽기까지 하네요.”
내 품평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새우를 버터에 구운 건데요. 간단한 요리인 만큼 집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걸 보게 될 시청자들은 군침 꽤나 흘릴 터였다.
그만큼 새우 버터구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요리다.
만들기 쉬운데, 맛은 기가 막히니까.
하긴 새우라는 식재료가 워낙 좋은 재료긴 하지.
단, 손질이 귀찮고 먹을 때도 손이 많이 가는 게 문제지만.
하지만 새우 버터구이의 경우엔 먹기 좋게 잘 다듬어져 있어, 그냥 집어먹으면 되니 그런 문제도 없다.
“맥주 땡기는데요?”
씩 웃으며 말하자, 다들 따라 웃는다.
다음으로 양 갈비 스테이크.
메인 디시다.
육즙이 흘러나와 윤기가 좔좔 흐르는 모습도 대단하고, 냄새 또한 보는 이의 식욕을 자극하고 있다.
이 때문에 랍스타가 줄 수 있는 화려한 비주얼을 포기하고 맛으로 승부한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토미 김이 주도해서 만들어낸 양 갈비 스테이크의 맛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육즙이 살아있는 미디움레어 스테이크에 고기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풍미를 살려주는 소스까지. 점수를 주자면 100점 만점에 120점이다.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저 흡족한 표정을 해 보였을 뿐.
이어서 2조의 부스로 옮겨 광둥식 깐풍기, 쏘가리 탕수육, 죽순 볶음요리 순으로 맛을 보았다.
그중 한청 등을 놀라게 만든 건 쏘가리 탕수육이었는데, 당연한 결과다.
뼈를 발라낸 쏘가리에 전분과 달걀노른자, 그리고 후춧가루를 버무린 튀김옷을 입혀 튀겨 그 위에 소스와 함께 잣을 뿌려놓았으니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다.
바삭한 식감에 고소하면서도 입안에 꽉 채우는 생선 특유의 맛. 손이 많이 가는 만큼 최고급 요리임이 틀림없다.
다만…….
중국요리에 대한 인식이 문제다.
맛도 좋고 싸다는 건 장점이지만, 쉽게 먹을 수 있기에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공정한 심사에 장애가 된다.
그나마 쏘가리 탕수육은 한국에선 좀처럼 먹기 힘든 요리이긴 하다만.
“벌써 3조네요.”
3조의 컨셉은 퓨전요리.
그래서 그런가, 부스엔 국적을 망라한 요리들이 보인다.
그중 하나인 밀푀유 나베는 쉽게 말해서 배추에 소고기를 얇게 저며 싸서 국물을 넣고 끓이는 음식이다.
맛은 샤브샤브와 비슷한데, 먹으면서 고기가 질겨지지 않도록 재빨리 끓는 국물에 고기를 익혀 먹는 샤브샤브나 훠궈와는 달리 미리 익혀서 먹는 요리라고 할 수 있다.
봉골레 술찜의 경우엔 조개와 다진 마늘, 그리고 각종 향신료를 버무려 와인을 넣고 쪄낸 음식인데, 비주얼은 좀 약해 보여도 입에 넣는 순간 꼭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음식이다.
말할 것 없이 맛있다.
하지만 3조는 한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맛을 보게 될 이들이 요리사라는 점.
그들이 놀라기엔 입이 너무 고급이다.
이 정도로는 강한 인상을 남기기 어렵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3조가 만든 또 다른 음식, 정체를 알 수 없는 해물탕은 합격점을 줄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매콤한 국물만으로는 큰 점수를 얻기 힘들 터였다.
“마지막이네요.”
4조의 부스로 들어가며 말하자, VJ가 카메라를 들고 따라오며 침을 삼킨다.
그만큼 눈앞에 차려진 요리들은 화려하기 짝이 없다.
약한 불에 올려진 채 끓고 있는 신선로.
색색의 채소와 지단으로 물든 채 시식자의 눈을 사로잡는 궁중 잡채.
으깬 두부와 채소로 만든 바싹 튀긴 두부 완자 튀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음식들은 맛까지 좋았다.
역시 한청인가.
아직은 어린 만큼 금화각 출신의 금지옥엽으로서 한식 말고 다른 요리도 잘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을 텐데,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린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오늘 나온 요리 중 가장 입맛을 사로잡은 요리가 아닐까 싶을 만큼.
“근데, 잡채에 왜 당면이 없나요?”
모든 시식이 끝나고 난 뒤, 한진석이 물었다.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슬쩍 눈길을 돌려보니 한청도 궁금한 듯 날 보고 있다.
쯧, 나레이션이 시킨 대로 했다고 이실직고할 수도 없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원래 당면은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음식입니다.”
“오! 그런가요?”
한진석의 추임새에 고개를 한차례 끄덕인 뒤,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한마디로 말하면, 당면이 들어왔을 때 우리 왕실은 이미 사라진 뒤였죠.”
뼈아픈 역사.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잡채의 ‘채’는 채소를 일컫죠. 그리고 잡채는 채소, 버섯, 고기 등의 재료를 볶아서 무치는 숙채를 말하고요.”
“그럼 원래 잡채엔 당면이 들어가는 게 아니란 얘기네요?”
“맞습니다. 잡채는 미나리, 도라지, 버섯, 고사리 등 채소와 함께 삶은 닭고기나 고기를 한데 모아 만드는 모둠 요리인 셈이죠. 그러니까 이게 맞습니다. 특히 궁중요리라고 부르려면요.”
그제야 한진석을 비롯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은 석상처럼 우뚝 서 있을 뿐, 함께 즐거워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조와 4조가 승자라면 나머지 팀이 패자.
아무래도 중국식 요리와 퓨전 요리로는 높은 점수를 얻기 힘들 듯하다.
예상대로였다.
“결과 발표합니다!”
두구두구두구!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모두가 숨을 죽였다.
방청객들까지 말없이 손을 모으고 지켜보는 가운데, 한진석이 상기된 표정으로 스튜디오 안을 훑어보았다.
이번에는 그 특유의 장난도 치지 않고 있다.
당연하다.
발표 결과에 따라 대망의 본선 진출자가 정해지는 것이므로.
하아, 다 좋은데 지켜보기 힘들긴 하네.
금방이라도 울듯 눈시울 붉어져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수아. 보고 있자니 짠하기만 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누군가 올라간다면, 누군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경쟁인 것을.
“1조! 전원 본선 진출합니다!”
와아아아아아!
첫 번째 진출자, 8명이 나왔다.
토미 김을 중심으로 참가자들이 환희의 함성을 지르길 몇 분. 그들이 진정하는 기미를 보이자, 축하 인사를 보내던 한진석이 다시금 마이크를 잡았다.
“4조! 축하합니다!”
예상에서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한청이 주도해서 한식을 요리한 4조가 본선에 진출한 것이다.
빛이 있다면 어둠도 있는 법.
한청과 함께 팀원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쥔 채 방방 뛰고 있을 때, 2조와 3조의 팀원들은 침울하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흑!”
결국, 어디선가 시작된 훌쩍임이 스튜디오를 나직하게 울리는 가운데 촬영이 막을 내렸다.
***
보고를 마친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물러나 빠져나간 뒤였다.
책상을 등진 채 창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던 강 회장이 속내를 알 수 없는 눈길로 도심을 내려다보았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건물이 보인다.
그 사이 사이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간 도로들. 그리고 붉고 푸른 신호등과 함께 색색으로 수놓고 있는 차들. 길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은 어디선가 끊임없이 밀려왔다가 또 밀려가고 있다.
불과 오십 년 전만 해도 폐허나 다름없던 곳이 이렇게 바뀌었다.
아니, 이십 년 전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날이 발전하다 못해 이젠 대한민국 국민의 20% 이상이 살고 있으며 유동인구까지 포함하면 그 이상인 도시.
서울의 풍경은 예전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기적이라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속도로 발전해온 만큼 부작용도 많았지만, 예전엔 흔하게 사용하던 ‘보릿고개’란 단어가 이젠 책에서만 볼 수 있는 시쳇말로 변해버린 게 요즘인 풍요롭기만 한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이다.
그렇게 따지면 굳이 경쟁이란 걸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과거와 비교해 기회가 줄어든 까닭에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 만큼, 자신이 살아온 시대만큼은 아니어도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한시도 쉴 수 없는 아이들. 녀석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가 끓는다.
그래서였다.
그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고 바깥으로 도는 아이가 안쓰럽기만 했던 것은.
어린 나이에 청천벽력같은 사고로 조실부모하고 인생을 포기한 듯 망나니처럼 떠돌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손자. 그런 손자를 그저 볼 수밖에 없던 건, 다른 아이들에게도 공평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깨물기도 전에 아픈 손가락이었지만, 그래서 더욱더 야멸차게 외면한 까닭이다.
그런 아이가 제힘으로 껍데기를 깨려 하고 있다.
한서 사운드라…….
‘그 녀석이나 이 녀석이나.’
강윤식이 암중으로 한서 사운드의 경영권을 장악한 건 이미 알고 있다.
그걸 바탕으로 삼한 전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것도 알고 있고.
하지만 강형식의 행보는 뜻밖이었다.
특히나 서진영이란 아이가 녀석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트리거가 되어준 것도 놀라운 일이었고.
이래서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고 하는 건가.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보고받기도 전에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만큼 삼한 그룹의 정보력은 더없이 훌륭했으니까.
역시나 예상대로, 강형식이 제기한 한서 사운드 경영진 사임 건은 압도적인 차이로 통과되었고, 조만간 새로운 경영진이 꾸려질 터다.
그렇게 된다면 강윤식은 낙동강 오리 알이 되는 셈이고, 반대로 강형식은 더없이 훌륭한 조력자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강윤식과의 경쟁에서 이기긴커녕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조차 요원하기만 하다.
그걸 알면서도 덤볐다?
강 회장은 이 또한 알고 있었다.
강형식이 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그 막대한 재산을 어디에 쏟아붓고 있는지.
도박이라면 도박이겠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더는 사내에서 강형식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게 될 터였다.
손자인 강윤식은 물론이고 둘째 아들인 강구철 역시 마찬가지.
어쩌면 그때가 되면 자신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거다.
경영권 승계 여부는 둘째치고, 일단 대주주인 셈이니.
그렇기에 궁금했고 또한,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한참 동안 자신의 손자에 대한 상념에 빠져 있던 강 회장은 또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끔 집에서 밥 먹을 때나 한 번씩 보던 청년.
작년 이맘때 처음 집에 들인 후, 잊을 만하면 들려오던 소식에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들어가 있던 이름 석 자.
시작도 그 청년이었고, 지금도 그 청년……. 아마 강형식의 가장 강력한 우군은 그일 터다.
서진영을 떠올린 강 회장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