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본선 진출? (2)
시간은 딱히 제한 두지 않았다.
그렇다곤 하지만, 다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 가지 요리를 하려면 제법 많은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에 불과해서 그런 걸까.
아직 날 찾는 조는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여유롭게 스튜디오 안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왼쪽부터 원을 돌듯 1조, 2조, 3조, 4조.
1조엔 토미 김이 있었고, 2조엔 신흥 다크호스인 이중호라는 청년과 함께 유수아가 있었으며, 4조엔 한청이 있었다. 3조엔 이렇다 할 정도로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지만 대신 팀워크가 좋고 각 팀원의 실력이 평균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꽤 흥미로웠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시청자 또한 그럴 것이다.
방청객들이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스탭들이 짜준 대진표가 아닌데도 그동안 경연을 통해 존재감을 뽐내던 이들이 하나둘씩 나뉘어 각 팀으로 흩어져 있다.
그렇다 보니 당사자들이야 어떤지 몰라도 보는 이들은 즐거울 수밖에.
다만…….
아무래도 토미 김이 있는 1조가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나머지 세 팀 중 한 곳이 본선에 진출한다는 말인데.
그럼 유수아나 한청, 두 사람 중 하나는 떨어진다는 얘기.
쯧, 내 입장에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도 어쩌냐고.
공정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마음으로만 응원해 주는 수밖에.
그나저나 요리를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한 시간?
되도록 그 이상은 안 걸리면 좋겠는데.
재료를 다듬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빠듯한 시간이지만, 그래도 음식의 맛을 생각하면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 게 좋을 터다.
촬영 시간이 길어지면 방청객들이 힘들어진다는 것도 문제고.
가능하겠지.
뭐, 코스 요리도 아니니 순차적으로 만들 필요도 없을 테고.
어디 보자.
1조에는…….
스튜디오 뒤쪽에 있는 음식 재료 선반과 냉장고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식재료를 가져가는 팀원들이 보인다.
블랙타이거 새우에 그뤼에르 치즈, 저기 저건 양갈비랑 바닷가재인가?
은연중에 팀의 리더로 자리매김한 토미 김이 이끌고 있어서 그런지, 재료부터 화려하다.
방송국 측에서 준비해둔 식재료들이 아주 고급은 아니지만, 희귀한 것들만 빼곤 어지간하면 다 있다고 해도 될 정도니 저 정도 세팅도 가능한 거겠지.
그만큼 JTL 측에서 <맛있는 도전>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방증이기도 할 테다.
하긴, 몇 차례 방송이 나간 뒤 사실상 금요일 저녁은 <맛있는 도전>이 시청자들의 안방을 평정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언니, 표고버섯이 빠졌어요!”
한청의 음성이 들려와 시선을 돌려보니, 헤나가 눈을 토끼처럼 크게 뜨곤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하여간…….
청이 쟤는 가끔 보면 신기하다니까.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언니 동생 하며 저렇게 서슴없이 지내는지.
은근 사회성이 높다.
그나저나 뭘 만들……려는 지는 한눈에 알 수가 있다.
쇠로 된 화통.
딱 봐도 신선로다.
짙은 붉은 빛깔 고기는 쇠고기일 테고.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신선로는 맛도 좋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물론 제대로 만들려면 재료 다듬는 시간과 밑 재료 만드는데 제법 시간이 걸리지만.
봐라.
한청을 비롯한 4조 팀원들은 한 사람도 노는 사람이 없다.
누군가는 고기를 얇게 썰어 양념장에 무치느라 여념 없고, 또 누군가는 두부를 으깨는 게 완자를 만들 모양이다.
개중에는 지단을 부치는지 프라이팬 앞에서 열심히 뒤집개를 놀리는 이도 보인다.
심지어 헤나와 나머지 한 명. 스피너스의 멤버도 정신없이 움직이긴 마찬가지.
그러고 보면 다른 조들도 그렇다.
다들 음식을 만들지 못하는 탓에 대체로 재료를 나르고 있지만, 몇 명은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조리기구를 휘두르는 이도 보인다.
안타깝게도 헤나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참가자를 보조하는 중이다.
그래도 이마에 땀에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열심히 하는지라, 그 모습 자체로 예쁘게 보인달까.
저 정도 열정이면 뭘 해도 성공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게다가 건성이 아닌 진심까지 느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화이팅을 외치게 만드는 그녀다.
“반죽은?”
“곧 끝나. 국수는 어때?”
“여기도 잘 돼가.”
“오케이! 그럼 쭈꾸미만 볶으면 되는 건가?”
“그건 좀 있다가. 일단 전기 화덕부터 가열하고.”
팀워크가 좋은 3조는 누구 한 사람 도드라지는 이가 없는 대신에 손발이 척척 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분위기도 좋아서 고함 한번 지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팀원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오죽하면 스피너스 멤버와 한진석조차 위화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달까. 마치 원래부터 한 팀이었다는 듯 자연스러워, 보는 내가 다 놀랄 정도다.
저 정도면 지금 당장이라도 주방을 통째로 맡겨도 될 거 같다.
유수아는 어쩌고 있나?
3차 예선 때부터 부쩍 실력이 늘어 지금은 어지간한 요리사 저리 가라 할 정도가 된 리더 이중호였지만, 그렇다고 유수아가 묻히는 건 아니다.
작은 체구와 귀여운 인상만큼이나 살가운 태도로 팀원을 대하는 건 물론이고 이제껏 단 한 번도 찡그리지 않는 표정으로 항상 웃으며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 요즘 인터넷에서 그녀를 두고 여동솁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알 것 같다.
한데, 대체 뭘 만드는……. 아, 깐풍기인가?
소스를 졸이는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오는 걸 보니 깐풍기는 깐풍기인데 광둥식인가 보다.
거기에 가지를 잔뜩 튀기는 게, 유린 가지 튀김을 하는 건가.
아무래도 2조는 콘셉트를 중국식으로 잡은 모양이다.
각 팀의 콘셉트가 서로 겹치지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들 눈치 게임을 했나 보다.
하기야 같은 요리를 만들면 비교당하기 쉽고, 그러다 보면 사소한 실수조차 크게 부각될 테니 그런 사태는 웬만하면 피하는 게 낫겠지.
한차례 스튜디오 안을 돌며 참가자들과 게스트, 그리고 MC인 한진석이 한데 어우러져 요리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던 난 시간을 확인해 본다.
경합을 시작한 지 20분.
각 팀은 어느새 재료를 다 다듬고, 대부분 조리를 시작했다.
그중 토미 김이 이끄는 1조가 가장 빠른 듯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팀들이 느리다는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어느 팀을 선택하든, 저들을 데리고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데 문제가 없을 듯 보인다.
안타까운 건, 네 팀 중 두 팀은 무조건 탈락이라는 건데…….
할 수 없지.
애당초 이 프로그램이 오디션을 표방하는 만큼 모두가 웃을 수는 없는 거니까.
가만히 저들을 지켜본다.
팔짱을 낀 채로 참가자들을 응원하는 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터다.
삐익-.
버저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 것도 그때였다.
미리 약속된 신호.
3조에 속해 있으면서도 MC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은 한진석의 멘트가 이어졌다.
“오! 갓솁을 호출하는 소리인가요? 어느 팀에서 갓솁 찬스를 쓴 걸까요? 아! 1조입니다!”
애초에 스피너스가 7명뿐이라서 깍두기처럼 끼워져 조리대 앞에 선 그였지만, 예능감은 어쩔 수 없는지 열심히 움직이면서도 입만은 제대로 털고 있었다.
“과연 뭘 만들고 있기에……. 와! 이거 반칙 아닌가요?”
호출이 온 1조 쪽으로 움직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반칙은 아니지.
음식 재료도 공평하게 개방하고 있었고, 무슨 요리를 할지는 각 팀에게 자유롭게 맡겼으니까.
그렇긴 해도 1조가 만들고 있는 요리는 나머지 팀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도마 위에 떡하니 올려져 있는 랍스타는 눈에 보이는 비주얼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었으니까.
1팀이 차지하고 있는 부스에 도착해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 10시 47분.
아직 점심도 먹기 전인 시간.
어딜 가더라도 다들 바쁘게 움직이며, 일과의 대부분을 처리하는 때이기도 하다.
후우, 잘하고 있으려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한서 사운드의 임시총회가 열리는 날.
삼한 식품에서 임시총회의 소집한 거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그 뒤에는 강형식이 있을 터다.
잘은 모르지만, 녀석이 말한 것과 관련이 있겠지.
쯧, 여기서 걱정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때문에 아침부터 지금까지 되도록이면 그 녀석과 연관된 문제는 생각지 않으려 일부러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임시총회가 열리기로 되어있는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타르타르를 만들려고 하는데 가능할까요?”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내게 토미 김이 물어오고 있었다.
단정한 머리 스타일에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서구적인 외모와 함께 꼿꼿한 체형. 거기에 더해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워 보이는 눈빛이 인상적인 청년이다.
몇 년 더 지나서 연륜까지 더해지면, 꽤나 카리스마 넘치는 요리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째서인지 김진호 셰프가 떠올라 속으로 웃으며 물었다.
“메인이 아닌 모양이군요.”
“예. 메인은 양갈비로 하려고요.”
“흠, 타르타르라……. 나쁘지 않군요.”
일반적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행히 내가 할 수 있는 요리이기도 하고.
이번엔 굳이 나레이션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겠군.
조리대 앞에 섰다.
그와 동시에 잠시나마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강형식의 얼굴이 흩어졌다.
“소스는?”
내가 묻자, 토미 김이 대답했다.
“비스큐 무슬린과 살사로 가려고 합니다.”
적어도 맛에 있어서만큼은 최상의 조합을 이뤄줄 소스들이다.
그걸 교과서처럼 정확하게 얘기하는 토미 김을 한차례 보고는 소매를 살짝 끌어올렸다.
***
상암동에 있는 JTL 방송국 예능 스튜디오에서 한창 <맛있는 도전>이 촬영 중이던 때에 역삼동과 삼성동을 잇는 도로, 테헤란로에 위치한 한 빌딩 안에서는 제법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문제없겠죠?”
한서 사운드의 대표인 최명식. 그의 물음에 이사 한 명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미 조치 끝났습니다. 사내 임원 주식도 확실히 해두었고 유보금을 풀어 조금이나마 매입까지 해두었습니다.”
“백기사 쪽은요?”
“국민연금공단을 비롯해 다들 긍정적입니다. 희망 투자증권 쪽이 조금 불안했는데, 막상 접촉해보니 순순히 알겠다고 하더군요.”
최명식은 그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강윤식이 손을 쓴 거겠지.
컨퍼런스 룸 안을 둘러보는 그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참가한 주주들의 면면이 익숙하다.
흔히들 개미라고 부르는 개인 투자자들이 배제되었다곤 해도 꽤 많은 이들이 보인 상황이었지만, 이미 서류를 통해 파악하고 있는 주주들이었다.
그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은 끝에 최명식은 비로소 안심했다.
대부분이 이쪽에 우호적인 이들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늘 임시총회의 결말은 결국 자신이 의도하는 쪽으로 나게 되어있다는 얘기다.
‘강형식이라고 했던가?’
지난 며칠 동안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 남자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저 우스울 뿐이다.
아마도 놈은 그저 자신만 상대하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덤벼든 거겠지만, 우습게도 자신 아니 한서 사운드 뒤에는 강윤식이 있다.
물론 오늘 여기에 자리하진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드러낼 수 없기에.
삼한 전자가 한서 사운드를 협력사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자칫하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서였다.
그래서일까.
강형식 쪽 그러니까 삼한 식품 쪽에선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하다.
하기야 그걸 안다면 이렇게 무턱대고 덤벼들진 않았겠지.
어찌 되었든, 덕분에 두 사촌 간의 싸움을 볼 수 있게 됐다.
한 명은 몰락한 전 황태자. 또 한 명은 안 그래도 입지가 튼튼한데 얼마 전 한서 사운드를 통해 또 한 차례 도약한 현 황태자.
따지고 보면 싸움이 될까 싶을 정도로 힘의 차이가 극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재미없다는 건 아니다.
더욱이 지금은 그동안 걱정하던 문제까지 싹 다 사라진 상황 아닌가.
말 그대로 쇼타임이다.
자신은 그저 느긋한 마음으로 두 명의 황태자들이 물고 뜯고 싸우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될 일이다.
물론, 한쪽에선 그 상대가 누군지 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상관없지. 나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니까.’
마지막 점검을 통해 한결 마음이 편해진 최명식은 얼마 전 보았던 강형식의 사진을 떠올리곤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물었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 모른다.
이번 기회에 주주들에게 회사의 주인이 누군지, 설사 실질적인 주인은 따로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누가 한서 사운드를 이끌어 나가는지 보여주는 것도 좋을 터다.
그렇게 최명식이 한층 깊어진 눈빛으로 소리 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강형식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