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 뿌리가 같다고 한 나무는 아니다 (3) (193/204)

#193. 뿌리가 같다고 한 나무는 아니다 (3)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떠오르는 건 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설마 강윤식?

나도 모르게 몸이 경직된다.

그러니까 뭐야?

한뿌리라는 건 할아버지인 강 회장님을 말하는 거고, 고욤나무와 감나무는 각각 자신과 강윤식을 얘기하는 건가?

그래서 둘이…….

핏줄이 같아도 절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눈이 커지는 건 물론이고, 입까지 살짝 벌어진 채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강형식이 날 보며 픽하고 웃는다.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얼굴로.

그러더니 맥주캔을 입으로 가져가며 툭툭 내뱉는다.

“표정 보니, 지금 네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 만하군.”

“……형식아.”

이건 아니라고 본다.

피 터지게 싸우는 것도 좋다.

어차피 그 방법 말고는 딱히 다른 길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천륜을 저버리는 건 아니라 본다.

방금 그 말이 어째 강형식이 더이상 선을 지키지 않겠다는 의미로 들려서 섬뜩했다.

리미트가 해제된 폭주 기관차를 보는 듯하달까.

그래서 끝 모를 질주를 앞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그런 내 심정을 이해한 걸까.

녀석이 맥주캔을 내려놓더니 다시 말했다.

“아냐, 그런 거.”

“……뭐가 아닌데?”

“후우, 너무 빙빙 돌려 말했나?”

한숨까지 푹푹 내쉬더니, 심각해진 나와는 달리 강형식은 담담한 표정으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랑 강윤식 얘기가 아냐.”

“어, 그래? 그럼 뭔데?”

“삼한 전자.”

“……?”

“그리고 삼한 식품.”

“아!”

뒤늦게 녀석의 얘기를 알아듣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만 하다.

일단 강윤식 얘기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만.

대체 무슨 뜻으로 고욤나무와 감나무 얘기를 한 거지?

눈을 가늘게 해 보일 때, 녀석이 물어왔다.

“순환 출자 구조라고 알지?”

안다.

재벌 기업의 계열사가 순환적으로 서로 출자해서 계열 기업의 지배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한국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자본 구조다.

사실상 이 방법을 통해 재벌들이 겨우 몇 퍼센트도 안 되는 주식으로 기업들을 쥐고 흔드는 것이고.

“대충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룹을 형성한 기업에 있어서 이 구조는 마법이나 다름없어. 지주회사가 한 줌도 안 되는 지분만으로 계열사의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니까. 뭐, 그것도 제대로 설계하지 않으면 애당초 경영권은커녕 지분 방어도 제대로 못 해낼 테지만. 그 때문에 그룹 안에서도 이에 관련된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거지.”

“그런데 그게 왜?”

“들어봐.”

곧이어 그의 입에서 환상형 순환 출자 구조라든가 사다리형 출자 구조, 그밖에 다단계형 순환 출자 구조 등 나로서는 좀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잠시 다소 어려운 개념을 듣다 간신히 이해하곤 물었다.

“그러니까 뭐야? 한마디로 불법과 합법을 넘나든다는 거네?”

“그렇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문제가 없어야 하니까. 하지만 대체 누가 그 속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겠어? 공시한 주식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소유주가 밝혀지지 않은 건? 거기에 차명까지 포함하면 구조는 훨씬 더 복잡해지는데. 그러니 공정위에서도 골치를 썩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 위에선 재벌들과 국가 간에, 계열사에 대한 지배와 소유에 대해 합법과 불법을 놓고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다.

별것 아닌 듯 말하지만, 그 결과는 별것 아닌 게 아닐 터다.

녀석의 말처럼 마법이나 다름없는 순환 출자 구조에 불법적인 정황이 포착되는 순간, 해당 계열사는 순식간에 잘려 나갈 테니까.

음,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난 강형식이 하고자 하는 얘기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쥐어짰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쉽사리 나올 결론은 아니다.

결국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아, 내가 오늘 엄청 피곤하거든? 스무고개 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냥 좀 말해주지?”

피식.

녀석이 또다시 웃는다.

그러더니 의자를 질질 끌어 내 곁으로 가져와 앉더니 얘기한다.

“일종의 사슬이란 거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 이렇게 얘기하면 되려나? 아무튼, 삼한 물산이 순환 출자 구조를 통해 삼한 전자와 삼한 식품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이상, 같은 식구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거지.”

음, 같은 식구처럼?

그 얘긴…….

“그래. 그 사슬이 끊어지는 순간…….”

“…….”

“같은 나무가 아니게 된다는 거지.”

“……!”

사슬을 잘라 내?

난 또다시 눈을 치켜뜨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빤히 보다 물었다.

아니,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설마, 독립하려고?”

녀석이 싱글싱글 웃고 있다.

그런데 눈은 웃지 않는다.

고요하지만, 그 안에 든 건 불꽃이었다.

소리 없이 타오르는 불꽃.

그 상태로 맥주캔을 한쪽에 내려놓고 어딘지 모르게 차가워진 음성을 내뱉었다.

“아니.”

“……?”

“방금 그 말은, 재벌이라면 출자 순환 구조라는 사슬이 끊기는 걸 태생적으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걸 얘기한 거고.”

“그럼?”

“난 그걸 무기로…….”

어느새 녀석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상태였다.

말투에서도 더 이상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상태로 녀석이 싸늘하게 얘기했다.

“한번 삼켜보려고. 삼한 전자를.”

***

녀석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

머릿속이 복잡한 게 헝클어진 실타래 같다.

뭔 말을 그렇게 복잡하게 하는 건지.

흠, 아닌가?

녀석으로선 최대한 쉽게 얘기한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알 듯하면서 모르겠다고나 할까.

강형식이 했던 말을 빌려서 생각해보자면…….

그러니까, 어느 쪽이 고욤나무고 또 감나무인지는 몰라도 삼한 전자와 삼한 식품이 지주회사인 삼한 물산, 정확히는 그 총수인 강 회장님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면 지금 강형식은 두 회사가 언제든 같은 나무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한 거 아닌가 싶다.

순환 출자 구조가 끊기는 순간, 같은 그룹이 아니게 된다는 얘기.

그 말은 곧 삼한 전자의 주식과 삼한 식품의 주식이 비슷한 비율로 다른 계열사에 넘어가 있다는 말이고.

물론 주식 자체의 가치야 차이 나겠지만, 그거야 외부에서 볼 때나 그런 거고, 내부적으론 비율상의 문제일 뿐이다.

결국 경영권 방어 혹은 공격을 위해 필요한 지분만 확보하면 게임 끝이란 건데…….

“이건 뭐…… 적과의 동침도 아니고.”

골치가 아파져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숙소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한차례 멈춰 섰다.

“그래서 같은 나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끝까지 대답해주지 않은 강형식을 떠올리며 픽하고 웃고 말았다.

아, 몰라.

그런 골치 아픈 얘기, 녀석이나 실컷 하라고 해.

나는 그냥 내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 거지.

그러다가 가끔 이렇게 한 번씩 강형식의 얘기를 들어주면 되는 거고.

찝찝하긴 하지만, 이렇게밖에 내릴 수 없는 결론에 어깨를 으쓱이곤 숙소로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지친 몸으로 침대 위로 올라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젠장, 씻어야 하는데…….

띄엄띄엄 이어지는 의식을 느끼며 막 눈을 감을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아, 진짜 귀찮게.

하필이면 지금 들려오는 건데?

인상을 팍 구기며 중얼거렸다.

“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레이션이 들려온다.

예의 그 나직나직한 아나운서의 톤으로.

- 삼한 건설은 삼한 전자 주식 1%를 소유하고 있다. 또한, 삼한 금융 역시 삼한 전자 주식 0.8%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무래도 방금까지 강형식이 서슬 퍼런 기세로 출사표를 던지며 하던 얘기를 하려는가 본데.

그런 얘기는 내일 하지?

오늘 좀, 아니 많이 피곤하니까 어지간하면 좀 자게 내버려 두라고.

못마땅한 마음에 구시렁거렸지만, 나레이션은 상관없다는 듯 계속해서 들려왔다.

- 그리고…….

뭐, 뭐?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는…….

- C 마트는 삼한 건설의 지분 2%를 소유 중이다.

어?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레이션이 들려온다.

그 얘기 중 내 이목을 끄는 건…….

공교롭게도 삼한 식품이 C 마트의 지분 0.3%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거기에 더해 삼한 금융이 C 마트의 계열사이며 내 소속사이기도 한 드림 엔터테인먼트의 주식을 무려 2%나 가지고 있다고 하고.

“뭐, 뭐야!”

벌떡 일어난 나는 멍한 눈빛이 되어 중얼거렸다.

“삼한 건설이 삼한 전자 1%, 삼한 금융이 삼한 전자 0.8%. 그런데 C 마트는 삼한 건설 지분 2%를 가지고 있고, 반면 삼한 식품은 C 마트의……. 아우, 씨! 더럽게 복잡하네!”

이미 잠은 저만치 달아나 있다.

덕분에 맑기만 한 머리.

하지만 워낙 복잡한 셈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갈수록 헷갈리기만 한다.

결국 난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어쨌든 그 소리잖아!

“모르겠고! 강형식한테 김진숙 회장님 명함 주라는 얘기잖아!”

***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송국에 도착한 나를 맞이한 것은 발랄하기만 한 박신영 작가의 웃음소리였다.

“오랜만에 뵈니까, 막 반가운 거 있죠!”

“그렇게 오랜만은 아닌 거로 아는데요?”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또다시 까르르 웃고는 내 곁에 바짝 다가선 박신영 작가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스튜디오로 걸어가며 묻는다.

“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잠 못 잔 사람처럼.”

“……티 나요?”

“예. 완전.”

눈을 깜빡이며 내 얼굴을 살펴보던 박신영 작가가 손으로 입까지 가려가며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다크서클!”

“예?”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어욥!”

욥?

작가님 왜 이러세요?

국어사전은커녕 인터넷에서도 잘 쓰지 않는 말을 듣고는 어처구니가 없어 쓰게 웃는데, 그녀는 개의치 않고 얘기한다.

“요즘 많이 힘드신가 봐요.”

“뭐, 쫌.”

“보약이라도 챙겨 드셔요. 그러다가 쓰러지면, 어떡해요?”

“그래야 할까요?”

“쯧, 안 되겠네. 진짜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요. 제가 진짜 용한 한의원을 알고 있거든요? 언제 한번 저랑 같이 가요. 안 그래도 저희 남편 약 한번 지어 먹이려고 했는데…….”

“음, 근데 보약은 여름에 먹는 거 아니라고 하던데.”

“에이, 그거야 애들 얘기고요. 가면 의원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니까 그러네.”

그런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진짜로 약을 지어 먹을 생각까진 없으니까.

어쨌든 신경 써줘서 고맙긴 하다.

“서 셰프님! 응? 작가님도 계셨네?”

그때, 저만치서 우릴 발견한 한진석이 달려오며 소리친다.

“흠흠, 에브리원, 굳모닝……. 아, 굳이브닝인가?”

객쩍은 농담을 던지곤, 곧바로 박신영 작가와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그였다.

나 참, 둘이 무슨 영혼의 단짝이야?

아주 신나서 떠들어대고 있다.

그러는 동안, 스튜디오에 도착. 안으로 들어가자 스탭들이 보이고, 촬영 감독님과 함께 서서 뭔가 심각하게 얘기 중인 신현정 PD도 보인다.

“들으셨어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날 발견하곤 고개를 숙여 보이는 피디님. 그런 그녀에게 눈인사하곤 돌아서는데, 한진석이 뜬금없이 물어온다.

“뭐가요?”

“아, 못 들으셨구나.”

얼굴이 헤벌쭉한 게, 잔뜩 풀어져 있다.

그러다가 벌레 들어갑니다.

“무슨 얘기인지?”

“게스트 말이에요, 게스트.”

안 그래도 의아하긴 했다.

원래 촬영 전에 알려주곤 했는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기에 무슨 일이 있나 했지만, 신현정 PD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싶어 잊고 있었다.

“누군데요?”

궁금하긴 하다.

그래서 물은 참인데…….

“아! 저기 오네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한진석이 온몸으로 웃으며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스피너스입니다!”

응?

걸그룹 스피너스?

얘들 아직 해체 안 했나?

눈을 껌뻑거리다가 인사했다.

“예. 서진영입니다.”

그런 내 눈에 익숙한…… 정확히 말하자면 TV를 통해 얼굴만 알고 있고, 가끔 얘기를 듣던 여자, 헤나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눈을 빛내며 내게로 달려든 것도 그때였다.

“어? 어?”

한진석이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스피너스의 헤나가 내 손을 덥석 움켜잡는다.

어딘지 모르게 간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외치고 있었다.

“진짜 진짜 너무 뵙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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