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드림 엔터테인먼트 (3)
없을 때는 몰랐는데, 확실히 편하다.
소속사라는 게 단지 법적인 문제만 해결해주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며칠만 기다리시면 곧 코디가 배정될 겁니다.”
김호준이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검은색 일색의 유니폼. 조리복으로 환복하고 나서 내가 물었다.
“스물다섯이라고 했죠?”
“예. 재작년에 전역한 후 SMK 엔터테인먼트에서 1년간 일했습니다.”
“앞으로 계속 볼 사이인데, 말 편하게 하는 게 어때요?”
“그럼 저야 좋죠. 앞으로 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래. 잘 지내보자.”
“예. 형.”
간단히 호칭 정리를 하고 나서 차에서 내릴 때였다.
“형. 전 요 앞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전화 줘요.”
“언제 끝날 줄 알고. 그냥 퇴근해.”
“아녜요. 그게 제 일인데요. 혹시라도 시키실 일 있으면 어제든 연락 주시고요.”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아서, 알았다고 하곤 차 문을 닫았다.
멀어지는 차를 보다가 돌아서 호텔로 들어갔다.
그때, 톡이 날아든다.
- 어디예요?
이하연이다.
씩 웃으며 답톡을 보냈다.
- 지금 막 내렸어요. 호텔로 들어가는 중. 다이아몬드 홀이라고 했죠?
그렇게 물었는데, 답톡이 안 온다.
대신 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다.
“예, 하연 씨.”
- 지금 엘리베이터 앞이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내려갈게요.
“그럴 필요 없는데.”
그러자, 그녀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제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
크큭. 귀엽기도 하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끼며, 알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로비에 남아있진 않았다.
어차피 기다려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보고 싶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천천히 걸음을 옮겨 1층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문이 열렸다.
다섯 명쯤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에 유난히 도드라지는 여자가 보인다.
뽀얀 피부에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칼, 그리고 오뚝한 코 위로 보이는 커다란 눈. 저 여자가 내 여자라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진영 씨!”
얼른 내려서 팔짱을 끼는 이하연. 그녀가 더없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좋아라 한다.
“조리복 입은 거 처음 보는데, 진짜 잘 어울려요!”
“그래요? 안에서 갈아입으려다가 그냥 귀찮아서 입고 왔는데. 괜찮아 보여요?”
묻기 무섭게 엄지를 들어 보이는 그녀였다.
“어! 저기…… 서진영 아냐?”
“맞네! 갓솁이네! 근데, 웬 조리복?”
“촬영 있나 보지.”
“윽! 설마 여기도 찍는 건 아니겠지?”
“왜? 오징어라서?”
“아 몰라! 나 화장도 제대로 안 했는데.”
“호호호. 언젠 하고 다녔고?”
사방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살짝 민망해져서 얼른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왜 그래요?”
“좀 창피해서요.”
“예? 제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주위에서 자꾸만 아는 체 하는데,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내 말을 들은 이하연이 까르르 웃는다.
다행인지, 우리 둘만 타고 있어서 누구 눈치 볼 필요는 없다.
“그럴 거 같으면, 이렇게 잘 차려입고 오면 안 되죠.”
“뭘요. 요리사가 조리복 입는 거야 당연한 건데.”
“어머! 이 남자 봐! 자기가 이렇게 입고 있으면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서 그래요?”
미치겠다.
자꾸만 입매가 휘어진다.
이러다 소리까지 내고 웃을까 싶어서 애써 참고 있을 때였다.
쪽!
내 볼에 뽀뽀를 한 뒤, 그녀가 새치름하게 얘기했다.
“멋진 모습은 나한테만 보여달라고요.”
“음, 이 정도론 약한데.”
“아, 뭐에요!”
얼굴을 확 붉히며 몸을 배배 꼬는 그녀를 보다가 결국 소리 내 웃고 말았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7층에 멈추더니 문이 스르륵…….
“……!”
내가 눈이 커져서 바라보고 있을 때, 중년의 멋들어진 남자가 입을 떡 벌렸고, 그 옆에 서 있던 여자도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이하연이 외쳤다.
여전히 내 팔에 매달리듯 팔짱을 낀 채로.
“엄마! 아빠!”
***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한다.
애당초 내가 되지도 않는 실력으로 감히 대그룹 총수의 파티 주방장을 맡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곤란한 상황과는 맞닥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니.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심했어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하연의 할아버지 생신 축하 파티 아닌가.
한데, 여기서 그녀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발칙하게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뽀뽀를 하다니.
뭐, 요즘은 초딩 애들도 유치하다고 안 할, 볼에 살짝 입술만 닿은 수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부모님들 눈에 마냥 좋게만 보일 리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뽀뽀한 후에 이하연이 얼굴을 붉히고 있고, 난 바보처럼 얼굴이 풀어져서 헤벌쭉하고 있는 모습이었다는 건데.
역시 이 상황만 보더라도 충분히 이상하게 보일 법한 것만은 분명하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래도 지난번에 봤다고 아버님…… 그러니까, 이상훈 사장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본다.
“잘 지냈나?”
단순하게 인사만 오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어째 싸늘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
“처음 뵙네요. 서진영 셰프죠?”
이하연의 어머니는 더없이 우아한 모습으로 내게 묻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허리까지 숙여 보인 뒤였다.
“오늘 잘 부탁하네.”
원래대로라면 사장씩이나 되어서, 파티를 책임질 요리사가 누구인지까지 관심을 가질 턱이 없을 터인데…….
이하연이 말해둔 듯하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더 있다간 숨이 막힐 것만 같아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런 나를 이하연이 쫄래쫄래 따라오길래 물었다.
“바쁜 거 아니에요?”
“제가 바쁠 게 뭐 있어요.”
“손님도 맞아야 하고…….”
“대충 인사할 분들한테 다 했어요. 그리고 진영 씨랑 있는 게 더 좋은걸요.”
“저야 좋지만, 그래도 좀 그러네요. 할아버님 생신이신데. 그러지 말고 가서 말벗도 해드리고 하세요.”
혹여 기분이 상할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얘기했더니, 그녀가 날 지긋이 바라본다.
그러더니 불쑥 손을 내밀어 내 볼을 쓰다듬는다.
화들짝 놀라서 누가 볼세라 뒤로 주춤 물러나자, 그녀가 키득거린다.
“겁도 많아라. 착하기도 하고.”
“자꾸 그렇게 놀릴 거예요?”
“감히 이렇게 예쁜 여친을 쫓아낸 벌이에요.”
혀까지 쏙 내밀곤 돌아서며 그녀가 덧붙였다.
“그럼 이따 봐요.”
남들 모르게 손으로 키스까지 날리곤 사라지는 그녀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전엔 안 그러더니, 요즘 들어 부쩍 스킨십이 늘었다.
뿐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적극적으로 바뀐 거 같고.
뭐, 그렇다고 해서 부담스럽다거나 한 건 아니고, 단지 좀 민망하다는 정도지만.
고개를 한차례 흔들곤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뛰다시피 걸음을 빨리해 다가갔다.
고윤수 주방장님이셨다.
“벌써 와 계셨네요.”
“늙은이래 원래 잠이 없는 법이디.”
아침도 아닌데, 무슨.
설마 농담이신 건가?
“파티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습니다만.”
“왜? 살 떨리네?”
“솔직히…… 그러네요.”
“아새끼래. 내래 몇 번이나 말하디 안칸. 니래 다 좋은데, 기 간이 너무 작은 게 문제야, 문제.”
웃으면서 말씀드렸다.
원래는 안 오셔도 될 건데, 나 때문에 오신 거니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답잖은 소리! 내 식구래 내가 챙기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네? 좀 있으면 진호도 올 거다.”
어!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는데.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가 뭐라고…….
다들 이렇게까지 해주는 건지.
왜인지 목이 자꾸 메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을 때였다.
“니래 부엉이가? 왜 눈알이 벌게져서는 기라고 앉았니? 얼른 가서 일 보라.”
“예!”
돌아서는데 눈앞이 살짝 흐려진다.
시큰거리는 코를 소매로 훑으며 불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오늘 처음 보는 스탭들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늘, 잘 부탁합니다.”
고윤수 주방장님이 내 뒤에 버티고 서계셔서 그런가, 누구 한 사람 날 무시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
저녁 7시.
5개의 섹터로 나뉜 각 주방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그에 반해 홀 안은 여유롭기만 하다.
브람스인가?
열 명 남짓한 실내악단의 연주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고, 정·재계의 굵직굵직한 인사들이 모여 대현 그룹 총수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다.
개중에는 김진숙 회장도 보였고, 언젠가 보았던 이하연의 고모인 H 백화점 대표 이주영도 있다.
조금 난감했던 건 김서연도 이곳에 와 있었다는 거였는데, 다행히 아직까진 마주치지 않았다.
반가운 사람도 있었다.
“야, 뭔 땀을 그렇게 흘려! 육수야? 정신 차려 인마! 메인이 이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데?”
준석이 형이 반쯤은 놀리는 말투로 타박하는 소리를 들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훑었다.
그러곤 땀이 흠뻑 밴 수건을 한쪽으로 던져 놓곤 막 구워진 스테이크를 접시에 담았다.
“아, 몰라 몰라.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고요! 적당히들 좀 먹지. 추가 주문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이리 줘, 나머지 플레이팅은 내가 할게. 넌 가서 오븐이나 확인해.”
“형! 제가 형 사랑하는 거……. 억!”
“그 입 다물라!”
준석이 형이 입술을 잡아당겨 비틀고 있을 때, 한청이 다가왔다.
“오빠. 아이스크림 다 떨어졌는데, 새거 어딨어요?”
“그거? 저쪽에 가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한청은 잽싸게 움직이고 있었다.
와, 발 빠른 거 봐라.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한정식집인 금화각 후계자라더니.
과연 일머리 하나는 타고났지 싶었다.
“후우, 여기요! 7번 테이블, 13번 테이블, 18번 테이블 부탁합니다!”
서빙을 보는 직원에게 부탁하고 나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준석이 형이 다가와 묻는다.
“그래서 쟤, 본선 갈 거 같냐?”
아니 이 형은 또 무슨.
갑자기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여기서 웬 방송 얘기를 하는 거람.
내가 흘겨보자, 준석이 형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집사람이 궁금하다고 하길래…….”
“휴, 형!”
“응?”
“제가 점쟁이예요? 여기 확 자리 깔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경연에 참가하는 건 한청인데. 저 그냥 심사위원이거든요?”
“그렇지. 심사위원.”
“쯧, 실력만 보면 무난하게 본선 진출할 거 같은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도 진출하면 좋겠다. 녀석, 꽤 기대하는 눈치더만.”
“그러니까요. 아무래도 쟨 요리사감이 아니라니까요.”
“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말도 마세요. 지난번에 같이 광고 찍은 거 아시죠?”
“알지.”
“그때 보니까…….”
한숨을 길게 내쉬자, 준석이 형이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씩 웃었다.
“아주 그냥 물 만난 고기더라고요. 쟤! 타고 났다니까요.”
“호오! 그래?”
자기 일도 아니면서 저렇게까지 관심을 갖고, 그걸로도 부족해 기쁘다는 눈빛을 해 보이는 형이다.
참네, 누가 보면 한청이 친동생인 줄 알겠네.
하긴, 저런 점이 준석이 형의 매력이지.
“어쩌면, 이번 기회에 아예 연예계로 진출할지도 모르죠.”
“크크큭.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 한청이가 또 한 미모 하잖냐.”
“요즘 팬들도 많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좋네. 주방 출신 중에 두 명이나 스타가 되고.”
“나참. 스타라뇨. 저 그런 거 아니라고요.”
“아니긴. 자식 되게 쑥스러워하네.”
잠깐 짬이 생겨서 형이랑 이렇게 티키타카하고 있지만, 이 시간이 더없이 즐거웠다.
원래대로라면, 평소에도 주방에서 이처럼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요리를 해야 하는 건데…….
어쩌다 보니, 본업이 뒤로 밀려서는.
한숨이 나올 판이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이게 다 미래를 위한 투자.
무엇보다도 나레이션의 요구대로 강형식을 돕기 위한 것도 있으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뭐가 되도 되겠지 하고.
***
전화를 든 채 쳐다보는 장동일 상무.
그의 눈빛을 받은 강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동일 상무가 한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곤 숨을 크게 몰아쉬며 수화기 너머로 지시했다.
“시작해.”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부디 성공하기만을 바라는 장동일 상무가 전화기를 내려놓자, 이번엔 강형식이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그가 앉아 있는 소파 주위로 한동안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