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드림 엔터테인먼트 (2)
“잘 부탁드립니다!”
목소리 한번 우렁우렁하다.
어찌나 큰지, 복도가 다 울리고 있었다.
“저도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가시죠.”
“아, 근데 대표님도 가시는 겁니까?”
“저희 드림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방송인이시잖습니까? 당연히 제가 직접 가야죠. 소속되신 후 체결하는 역사적인 첫 계약인데.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 혹시 부담스러우신 겁니까?”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김성한 대표는 참 말을 잘한다.
단순히 유창하다는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을 잘 살핀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닳고 닳은 느낌이라기보다는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함을 담고 있다.
그게 더 신뢰감을 가지게 만들고 있고.
“아뇨. 그냥 궁금해서 물은 겁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십시오. 다 말씀드릴 테니.”
“흠, 드림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연예인이나 방송인이 몇 명이나 됩니까?”
“가만있어 보자.”
복도를 지나쳐 회사를 나온 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김성한 대표는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소속 연예인들을 꼽기 시작했다.
“가수 3명에 배우 4명, 그 밖에 MC와 앵커들 포함해서 5명. 여기에 서진영 셰프님까지, 총 13명이네요.”
생각보다 많다.
그만큼 준비되어 있다는 얘기겠지.
“언제 시간 되면 다 함께 식사나 한번 하시죠. 아마 보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인간성 하나만은 이거인 분들이거든요.”
그가 엄지를 척하고 치켜세우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잠시 후, 강형식이 보내준 변호사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운전대는 아까 인사한 김호준이 잡고 있었다.
***
소속사가 생겨서 그런 걸까?
일이 한결 쉽고 빠르다.
김성한 대표와 함께 온 팀장이 백화점 측과 계약하는 사이 우리는 민선혜 실장의 안내를 받아 현장을 둘러보았다.
“본관과 동관은 4층 통로로 이어져 있고요, 지하 쇼핑몰을 통해서도 오갈 수 있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지하 5층까지 있는 주차장은 백화점과 함께 쓸 수 있도록 했고요.”
말이 백화점이지, 복합 쇼핑단지라 할 수 있다.
지하에 영화관까지 있으니 말 다 했지.
“신도시라고 하더니, 거주 인구나 많은가 보죠?”
갑자기 궁금해져서 묻자, 민선혜 실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마치 안 물어봤으면 섭섭할 뻔했다는 표정으로.
“거주 인구는 작년 기준 50만 명이 넘고요, 평일 유동인구까지 포함하면 70만 정도 될 거예요.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이 부근에 테크놀러지 단지가 조성되어 있어서 제법 큰 회사들이 많거든요.”
70만 명이나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하긴, 그 정도나 되니까 이런 대규모 복합단지를 조성한 거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민선혜 실장이 말한다.
“저희 여기에 돈 많이 쏟아부었어요. 망하면 안 된다는 얘기죠. 저도 사활을 걸고 자리 옮긴 거고. 그러니까, 서 셰프님께서 잘해주셔야…….”
무슨 얘기를 하나 들어보다가 막판에 내게로 불길이 옮겨붙길래 나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굳히자, 민선혜 실장이 참지 못하고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노, 농담이에요, 농담.”
손까지 내저으며 웃고 있는 그녀를 보다가 헛기침을 해 보였다.
***
“괜찮더군요.”
“그러게요.”
“개장하면 꽤나 이슈가 될 겁니다. 규모 면에서나 시설 면에서나 국내 최고라고 하니까.”
“생각보다 커서 좀 놀랐습니다.”
“그런 곳의 홍보를 책임지시는 분이 서 셰프님이시죠.”
김성한 대표와 대화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사레가 들린 듯 마른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들 이럴까?
자꾸만 부담을 주네.
괜히 맡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희 드림 엔터테인먼트도 잘 부탁합니다.”
“아, 아뇨. 제가 부탁드려야…….”
“물론 저희는 서 셰프님을 서포트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 점은 염려 놓으시고요, 앞으로 저희를 믿고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활약을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그렇게까진.”
“부담 가지라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지금까지처럼만 해주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회장님께서 바라시는 바도 그럴 테고요.”
“아, 예……. 그럼 다행이지만.”
얘기를 계속 나누다 보면 또 어떤 얘기가 나올지 무서워져 얼른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풍경이라고 해봐야 마른 들판과 간간이 보이는 집들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며 그저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었다.
***
회의실 안의 공기는 무겁기만 했다.
두 사람 중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안은 심각했다.
아니, 중차대하다.
‘서 셰프의 선택’이란 브랜드 확장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정작 신경 써야 할 일은 바로 그 브랜드의 상품이건만.
장동일 상무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강형식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도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말문을 여는 그였다.
“정말 할 생각이냐?”
벌써 몇 번째 같은 질문인지 모른다.
“예.”
“후우, 너도 알고 있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 될 거다.”
왜 모르겠는가.
아무리 그동안 망나니 아닌 망나니로 겉돌았다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가 집안의 장손이었다.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본 것만 해도 어지간한 사업가보단 나을 터다.
세간에선 그걸 두고 흔히들 사업 감각이라고 부른다.
그 촉이 지금 강형식을 몰아붙이는 중이었고.
“물러나선 안 될 때라고 느꼈습니다.”
“…….”
“녀석한테 꼬리를 붙였습니다. 그게 무얼 뜻하겠습니까? 지금 당장에야 손을 쓰지 않겠죠.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요?”
그가 묻고 있었지만, 장동일 상무는 좀처럼 대답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생각해도 강윤식은 선을 넘었다.
딱히 이렇다 할 정도의 협박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일종의 경고였다.
서진영에게 꼬리를 붙였는데, 막말로 강형식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일.
게다가 이번에 강윤식이 계획한 대로 삼한 전자가 한서 사운드의 손을 들어주면, 강윤식은 단번에 삼한 전자의 실세로 등극하게 될 터다.
설사 그 정도까진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강형식을 떨쳐낼 정도의 힘까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과연 어떻게 나올까?
승자로서 아량을 베풀까?
지금까지 해온 바를 봐도 그렇고, 당장 서진영에게 미행을 붙이고 사진까지 찍은 걸 봐도 그렇다.
모르긴 몰라도 칼을 빼 들 것이다.
언제든 자기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강형식을 그대로 두고만 볼 강윤식이 아니란 얘기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강형식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걸 이해 못 해서가 아니었다.
“지금 가진 자금으론 부족한 것도 알고 있겠지?”
“이미 연락을 취해놨습니다.”
“음……. 과연 그들 중 몇이나 넘어오겠나?”
“많이도 필요 없습니다. 30%만 있으면 됩니다.”
강형식의 얘기에 장동일 상무는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한 말로 강형식의 의중을 확실히 알아챘기 때문이다.
“너, 지금…… 하아,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알죠.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건데 모를 리가 있습니까?”
“알면서 그래? 그건…… 네가 가진 전부야! 그걸 다 털어 넣었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럼, 끝이겠죠. 하지만요, 그걸 움켜쥐고 있다고 한들 뭐가 달라집니까? 강윤식이 그냥 놔둘까요? 아뇨. 그런 놈이 아니란 걸 잘 알지 않습니까? 저요, 이번 일로 확실히 알았습니다.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요!”
“…….”
“지금 가지고 있는 자금만으로는 삼한 전자의 주식 1%로도 손에 쥘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건 기회지 않습니까? 녀석이 깔아준 판 위에서 춤 한번 시원하게 춰보려고요!”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장동일 상무가 낯빛이 어두워진 채 물었다.
“자신 있냐?”
강형식이 서늘한 눈빛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보아온 그 어떤 태도보다 단호한 모습이었다.
“무조건 제가 이깁니다.”
***
다음 날부터 시작된 일정은 말 그대로 강행군이었다.
하나하나 계약할 때는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스케줄이 꽉꽉 들어차 있던 것이다.
“오늘 저녁에는 대현 그룹 회장님 생신 파티가 예정되어 있고요. 내일은 <맛있는 도전> 촬영일입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아, 미안한데요. 주말엔 좀 봐주시죠. 누굴 보기로 해서요.”
오늘부터 날 케어해주기로 한 김호준이 씨익하고 웃는다.
내가 이하연을 만나고 있다는 걸 알고 저러는 걸 테다.
하아, 오늘은 간신히 아침 식사만 준비하고 나오는 길인데 이러다간 조만간 주방엔 들어가지도 못하겠다.
“그럼, 삼한 식품 쪽에 연락해서 일정을 뒤로 미루겠습니다.”
“부탁드려요.”
“그리고 내일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오셔야 합니다.”
“예? 왜요?”
“아직 회사에 전담 메이크업이 없어서요. 청담동 쪽에 미용실이랑 메이크업 준비해놨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프로니까요.”
끙. 저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고개를 한차례 내젓고는 좌석 등받이에 털썩하고 몸을 묻었다.
편하긴 편하네.
흔히들 연예인 차라고 부르는 승합차는 넓고 쾌적하다.
좌석도 다른 차에 비해서 크고 안락했고.
“거기 냉장고 있으니까, 목마르시면 꺼내 드세요.”
김호준이 운전대를 잡은 채로 말하고 있었다.
시선을 던져 내려다보니, 손잡이가 보인다.
슬쩍 손을 뻗어 열어보니 냉장고 안에 갖가지 음료가 들어있다.
“설마 술까지 있는 건 아니겠죠?”
“그다지 즐기시진 않는다고 들어서요. 원하시면 구비할까요?”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헬스장 갔다가 식사하고 나서 바로 H 호텔로 갈 겁니다. 도착할 때까지 30분 정도 걸릴 테니, 피곤하시면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시죠.”
“……그래요.”
편하긴 참 편한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걸까?
그렇다고 하루 종일 붙어서 케어해주는데 불평할 수도 없고.
잠시 드림 엔터테인먼트 쪽에 말해서 헬스클럽 같은 데는 혼자서 다녀도 된다고 말할까 하다가 포기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여러모로 불편했던 걸 떠올린 까닭이었다.
***
헬스를 마치고 식사까지 끝내고 나니 어느덧 2시였다.
슬슬 H 호텔로 가야 할 시간.
짐작건대 오늘 저녁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이 되겠지만, 그래도 살짝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통영에 갔다 온 후 이하연을 처음 보는 날이다.
별다른 이유 없이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렇게 히죽히죽 웃고 있을 때였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오병수 말입니다.”
앞쪽에서 들려온 얘기에 정신이 번쩍 났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김호준은 여전히 운전대에서 손을 놓지도 않은 채로 잘만 얘기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소송 걸겠다고 하니까 바로 꼬리 내렸답니다.”
이미 사진이 든 메모리 카드는 드림 엔터테인먼트에 넘겨준 후였다.
그걸 증거로 삼아 으뜸 심부름센터를 압박하고 있는 모양인데…….
“혹시 제가 거기 들어갔다가 나온 걸 본 사람이 있거나 하진 않나요?”
걱정하고 있던 바를 물었더니, 김호준이 웃는다.
“영세해서 그런지, 아니면 위장이랍시고 일부러 그렇게 허름한 건물로 들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CCTV 하나 없더라고 하더군요. 근방에 카메라가 있기는 한데, 워낙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고……. 어쨌든 간에 문제 될 건 없습니다. 뭐, 사무실 들어가서 만지신 물건에 지문이 남아있긴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불법 침입죄의 증거가 될 순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다만, 그래도 찜찜한 건 사실이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회사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요.”
내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건지, 김호준이 확신에 찬 음성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생긴 건 참 순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눈치가 빠른 듯하다.
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차가 막혀서 그런가.
H 호텔까지는 40분 정도 가야 한다고 하니, 그동안 잠이라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