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드림 엔터테인먼트 (1)
모르는 남자다.
스쳐 지나가듯 본 게 아니라면, 한번 본 인물은 어지간해선 잊어버리지 않는 나였다.
그런데도 머리에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면 면식이 없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상대방도 내가 초면일 터. 그럼에도 남자는 내게 살갑게 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어젯밤 일로 신경이 날카롭던 나로서는 경계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시죠?”
살짝 날이 선 질문에도 남자는 그저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이 느물거린다기보다는 어쩐지 사람 좋은 미소였다.
“아, 이런. 제가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죄송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만.”
양복 상의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낸 남자. 건장한 체형에 40대쯤 되어 보이는 그가 내게 명함을 내민다.
받고도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계속 살펴봐도 여전히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어 우선은 명함부터 살피기로 했다.
드림 엔터테인먼트 (주)
대표 김성한
드림 엔터테인먼트? 들어본 적 없는 곳인데…….
명함을 보자, 의문이 가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의아해졌다.
그때, 남자…… 김성한 대표가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성한입니다.”
“…….”
“김진숙 회장님께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음, 혹시?”
그제야 뒤늦게 떠올랐다.
엊그제 박 실장과 나눴던 얘기들이.
근시일내 날 케어해줄 기획사 대표와 만나게 될 거라고 했던.
“서진영입니다.”
“하하하. 한국이 좁긴 좁네요.”
“……?”
“이렇게 오다가다 만날 정도라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으시겠죠?”
대답하지 않자, 김성한 대표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내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늘어놓는다.
“오병수, 38세. 서울 가리봉동 거주. 서른 살 때까진 경찰로 재직했고, 뇌물수수 사건으로 옷을 벗은 후 으뜸 심부름센터 운영 중이고, 대체로 기업들 뒤를 봐주며 살아가는 중이죠. 3년 전쯤 이혼하고 딸이 하나 있는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요즘 부쩍 돈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무슨 얘기를 하나 싶어서 듣고 있다가 으뜸 심부름센터라는 말이 나오길래 눈을 크게 뜨곤 김성한 대표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일로 걱정 많으신 거로 아는데요.”
멍한 표정이 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심정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발걸음마저 멈추었다.
그런 나를 그가 은근한 표정으로 보며 계속해서 얘기했다.
“원래대로라면 박 실장에게 말씀드려야겠지만, 아무래도 그분 손까지 가는 건…… 서진영 셰프님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실 거 같아서요. 하하하, 아시다시피 김진숙 회장님께서 또 한 성질 하시지 않습니까? 뭐, 이런 문제는 되도록 조용히 처리하는 게 나을 테니까요.”
“어떻게?”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 측 일이라는 게 회사에 소속된 연예인들, 음……. 서진영 셰프님은 연예인은 아니지만, 오히려 더 중요한 자원이시기도 하니까 더욱 신경이 쓰이죠, 어쨌든 회사 소속 연예인들이 마음 편히 활동할 수 있게 해드린다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그냥, 계약 전에 저희가 보여드리는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웃음기 머금은 얼굴과 함께, 그러면서도 예의는 잃지 않는 모습으로 그는 살갑게 얘기하고 있었다.
마치 믿어달라는 얘기를 온몸으로 하는 듯했다.
“아무튼, 어제 일은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혹여라도 법적인 분쟁이 생기더라도 저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또, 통영에서처럼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주변 정리도 확실히 해놓을 테니 염려하시지 마시고요.”
“그건…… 감사하네요.”
“아뇨. 저희 일인데요, 뭐. 그럼. 바쁘신 거로 압니다. 조만간 정식으로 인사하는 거로 알고.”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를 보다가 쓰게 웃고 말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아니 드림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날 케어하기 시작한 것이.
마주 인사하고도 돌아서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김성한 대표를 바라보았다.
***
혜암 아트홀로 들어가니, 세련된 인상을 주는 여자 한 명이 날 반갑게 맞아주었다.
민선혜 실장.
장희경 관장으로부터 스타힐 백화점 관련 업무 일체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여자였다.
“팬이에요!”
느닷없이 일격부터 지르고 보는 그녀. 방금까지 김성한 대표와의 만남으로 인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는 민선혜 실장 덕분에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 그, 그렇습니까?”
“이따가 가실 때 꼭 사인 부탁드릴게요.”
“그러죠.”
얼떨결에 대답하고 나서, 그녀가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방에 온통 유리벽으로 된 사무실 한가운데서 커피 한잔을 나누면서 듣는 얘기였다.
“보시면 알겠지만 성원시 신도시 분교지구에 개장할 예정이고요, 완공은 3주 후인데 인테리어까지 포함하면 아마 지금부터 두 달은 걸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금방이네요.”
“관장님께서 관심이 지대하시거든요. 덕분에 삼한 건설 쪽에서 전격적으로 뒤를 봐주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죠?”
“그렇긴 하네요.”
“예. 자, 여기 보시면요. 1층에는 화장품 매장과 귀금속 매장 그리고 명품관을 비롯해…….”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금세 김성한 대표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다.
물론 어젯밤 있었던 일…… 으뜸 심부름센터에 대한 일들도.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끝났다.
***
전속 모델이 된다는 건, 단순히 광고를 찍는 것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일단 하는 일이 많았다.
TV나 매체 광고는 말할 것도 없고, 개장과 동시에 걸리게 될 건물 외부 배너에 얼굴이 실리게 된다.
거기에 전단지나 소식지에도 내 사진이 들어가고, 심지어는 이벤트 광고에도 매번 나서야 한단다.
기간은 3년.
그동안 타 백화점과는 계약할 수 없고, 분기별로 일 년에 4차례 계절 변화에 맞춰 1회씩 정기적인 광고를 찍어야 한다는데…….
“거의 한 달에 한 번은 광고를 찍어야겠는데요?”
“음, 그렇게까진 아니지만, 비슷할 거예요.”
민선혜 실장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고기를 뒤집었다.
어쩌다 보니 고깃집까지 함께 오게 된 터였다.
“얼른 드세요. 식으면 기름 굳어서 맛없어요.”
불판 위에 있던 살치살을 내 쪽으로 밀며 하는 말이었다.
남동생 대하듯 하는 걸 보니, 주변 사람들을 살뜰하게 챙겨줘야 속이 풀리는 누님 성향의 여자인 듯하다.
뭐, 챙겨주니 나로서는 나쁠 것도 없지만.
핏기가 가실 만큼만 적당히 구워진 소고기를 날름 집어 먹으며 물었다.
“계속 담당하시는 거 아니죠?”
“예? 아, 고기 탈까 봐 집중했더니, 잘 못 들었네요.”
“앞으로도 절 담당하시게 되는 건가 해서요.”
“아, 그 얘기였어요?”
그녀는 고기를 뒤집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고요. 본격적으로 팀이 꾸려지면 그쪽에서 담당하게 될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나 뵙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니고요. 일 년에 한두 번? 아니다. 분기에 한 번은 뵙겠네요.”
“아트홀 소속이 아니신가 보죠?”
“예? 호호호. 아녜요, 그런 거. 원래 삼한 그룹에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쪽으로 옮겨오게 된 거죠. 지금이야 여기서 근무하고 있지만, 한 달 뒤부턴 성원시로 출근하게 될 거예요.”
“아, 그러시구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해맑게 웃던 그녀가 갑자기 핸드백에서 폰을 꺼내서 전화를 받았다.
“아, 자기야. 죄송해요. 잠시만요.”
일어나 저만치 걸어가는 그녀를 보다가 픽하고 웃고 말았다.
애인인가 본데, 순간적으로 변하는 표정을 보니 나한테 보여주던 미소는 업무용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이하연이 떠오른다.
가만히 핸드폰을 꺼내 톡을 확인했다.
아까 세 시간 전에 온 거 말고는 없다.
- 식사했어요? 난 지금 업체분하고 먹는 중인데.
톡을 보내고 1분도 되지 않아서 답톡이 날아온다.
하여간 빠르다니까.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톡을 보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톡이 날아든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 아직 안 끝났을 거라고 생각해서.
- 배고파요!
- 진영 씨가 끓여준 된장찌개 먹고 싶어.
- 하아, 바빠서 또 햄버거.
- 나중에 애 낳으면, 절대 이쪽 일은 안 시킬 거임.
- 뭐 먹어요?
- 날도 덥고 힘든데, 고기 먹지.
- 우리 주말엔 고기 먹으러 갈까요?
- 아님, 삼계탕?
반은 투덜거림이었고, 또 반은 내 걱정이다.
이하연은 가끔 자기가 집착이 강한 것 때문에 내가 빨리 질리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곤 하는데, 글쎄다.
집착이 이런 거라면 그다지 싫지 않은데?
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걸 느끼며 답톡을 보냈다.
- 안 그래도 고기 먹는 중이에요. 걱정 말고 하연 씨도 든든하게 식사해요. 햄버거 같은 거로 때우지 말고.
그렇게 톡을 보내놓고 고개를 드는데, 눈앞에 민선혜 실장이 빙글빙글 웃고 있다.
다 안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 톡이 와서.”
따지고 보면 내가 먼저 보낸 거지만, 그런 거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차례 웃어 보이곤, 그녀가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번 주 끝나기 전에 현장에서 한번 뵀으면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바쁘시면 다음 주로…….”
“아뇨.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곤 이내 다시 말했다.
“이왕이면 그때 계약도 하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좋죠. 안 그래도 관장님께서 서진영 씨랑 언제 계약할 거냐고 하셨거든요.”
***
민선혜와 헤어진 다음 날, 권태홍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편집 중인데, 영상이 기가 막히게 나왔다나?
좋아서 전화했다면서 다음 주까진 끝날 거 같다면서 그때 식사나 같이하자고 하길래 알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난 강남의 모 빌딩에 와있다.
“계약 기간은 7년. 삼한 그룹과 관련된 업무를 제외하고 방송과 광고를 비롯해 일체의 활동에 드림 엔터테인먼트가 지원하며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게 됩니다. 정산 기간은 따로 두지 않으며, 계약과 동시에 비율에 따라 한 달에 한 번 정산하며…….”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해서 말해주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만큼 세심하다는 거겠지만, 한편으로는 저 문구 하나하나가 날 옭아맬 수도 있기에 귀담아듣는 중이다.
뭐, 강형식이 보내준 변호사가 대동해서 듣고 있으니 불안하진 않지만.
“이상입니다.”
드림 엔터테인먼트 팀장이라고 하는 남자가 말을 맺고 나자, 김성한 대표가 예의 그 웃는 낯으로 물어온다.
“문제없으시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변호사를 바라보자,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대로 계약하면 되겠네요.”
“자, 그럼. 도장 주시죠.”
가지고 온 도장을 건네고,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계약이 끝났다.
이로써 나는 드림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연예인…… 아니, 방송인이 된 것이다.
“대현 그룹 회장님 파티가 5월 30일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아, 혹시 그것도…….”
“아뇨, 아뇨. 모든 활동에 대한 최종결정권은 서 셰프님께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걱정 말고 진행하시면 됩니다.”
“다행이네요. 이미 약속을 해버린 거라서.”
“아, 혹시라도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그렇다고 회사에서 지원을 안 한다는 건 아닙니다. 차량이나 그밖에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지원할 겁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아참, 말씀드린다는 게 깜빡했는데……. 매니저까진 구했는데, 코디는 아직…….”
“코디요?”
“방송 출연 때도 그렇고 광고 촬영이나 기타 활동에서도 꼭 필요하니까요. 가끔 협찬이 들어오기도 하고요.”
“……그렇습니까?”
“얘기는 이쯤하고. 성원시라고 했나요? 괜찮으시면 그쪽으로 움직이면서 마저 얘기하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알겠다고 하고 일어선 후 김성한 대표를 따라 방을 나섰다.
한데, 문밖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마른 체형에 키가 훌쩍 큰 이였는데, 눈매가 서글서글한 게 참 착하게도 생겼다.
그 남자가 내게 꾸벅 인사를 해보는 걸 보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였다.
“아! 인사들 하세요. 여긴 오늘부터 서진영 셰프님을 서포트할 김호준 매니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