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스캔들 (3)2021.12.10.
오병수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가 누군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나레이션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곳 그러니까 으뜸 심부름센터 사장인 듯하다. 30초? 40초? 아무튼 1분이 채 못 되는 사이 내게 경고를 해준 나레이션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난 잠시 동안 멈춰 있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곤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오병수인지 뭔지 하는 작자가 여기로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은 대략 10분. ……이라고 나레이션이 말했다. 그에 비해 지금 막 뒤지기 시작한 카메라. 전원을 넣자마자 화면에 떠오른 사진에 나와 이하연이 찍혀 있다. 나참. 바로 옆에서 찍은 거처럼 보인다. 이 정도까지 찍으려면 대체 카메라에 얼마나 쏟아부어야 하는 건지. 하긴, 카메라에 달린 렌즈를 보니 곧바로 납득된다. 대포나 다름없는 망원 렌즈로 멀리서 우릴 찍었다고 생각하니 피가 식는다. 이래서야 마음 놓고 다닐 수도 없잖아. 아니지. 내가 뭐 죄지었나? 이번 일은 아무래도 대현 쪽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 보니 뜻하지 않게 늦은 밤에 남의 사무실을 뒤지고 있지만, 낮에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손 붙잡고 다니는 평소라면 남을 의식할 이유가 하등 없다.
“이거 복사를 어떻게 하지?”
카메라와 컴퓨터를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순간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복사를 왜 한단 말인가. 원본을 가져가야지.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 느낌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카메라 옆에 난 슬롯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그러곤 혹시나 몰라 컴퓨터를 다시 한차례 뒤졌다. 오병수인지 뭔지 하는 작자가 사진을 옮겨놨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행히 컴퓨터엔 찾는 사진이 없었다.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는 폴더가 수십 개 있었지만, 근래에 찍은 사진들은 아닌 듯하다. 게다가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진들이었고. 뭐, 불륜이든 뭐든 나하곤 상관없으니까. 잠시 후 몸을 일으켰다. 위이잉하는 소리와 함께 컴퓨터가 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사이 카메라를 원위치로 돌려놓고서 책상에서 떨어졌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병수가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 3분 남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탁탁탁탁. 처음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마음이 급해서 그런가 갈수록 걸음이 빨라졌다. 종국에 가선 거의 뛰다시피 해서 1층으로 내려온 나는 급히 건물을 벗어났다. 그러곤 막 차를 세워둔 곳으로 뛰어가려는 찰나였다. 부우우우웅. 저만치서 두 개의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달려오는 차가 보였다. 느낌상 오병수 차다. 아니나 다를까. 건물 앞에 검은색 승용차가 멈춰 서더니 남자 한 명이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떡대가 좋거나 하진 않았다. 드러난 윤곽만으로 판단하자면 어디서나 볼법한 평범한 남자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 걸음을 빨리했다. 혹시라도 들킬까 싶어서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렇다고 뛸 수도 없다. 자칫 의심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급함과 두려움을 꾹꾹 누르며 걸음을 내디디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아, 젠장! 하필이면…….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 새벽인지라 워낙 조용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이목은 집중된다. 돌아보진 않았지만, 오병수가 날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받아야겠지?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울 테니. 더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어, 그래.”
강형식이다. 미친다, 진짜. 전화를 하려면 좀 더 일찍 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이따가 할 것이지. 속으로 녀석을 원망하면서 통화를 이어갔다. 물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무슨 소리를 내뱉고 있는지 나조차도 모를 정도다.
“왜긴. 잠시 얼굴이나 보려고 했지? 응? 새끼가. 왜겠냐? 술이나 한잔하자고 연락한 거지. 그래? 그럼 지금은 힘들겠네?”
통화를 이어나가며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슬쩍 뒤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뛰기 시작했다.
*** 사무실 문 앞에 이른 오병수는 열쇠를 꺼내 들었다가 이내 멈칫했다. 뭘 보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눈빛이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바라보던 그가 슬며시 문손잡이를 잡아갔다. 그러곤 돌리는 순간,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뛰어들듯 들어간 오병수는 재빨리 책상 쪽으로 뛰어가더니 잠시 멈춰서 생각에 잠겼다. 잠시라곤 하지만 시간으로 따지면 겨우 10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조차도 무색할 정도로 오병수의 판단은 빨랐다. 책상을 뒤지거나 컴퓨터를 켜는 대신 그가 한 일은 카메라에 전원을 넣는 일이었다. 이어 그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또다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병수는 날듯이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탕탕탕탕탕탕!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온 그가 막 1층에 도착해 건물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급박하게 달음박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쫓아 시선을 돌린 오병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 30m나 될까? 으뜸 심부름센터가 있는 건물에서부터 내가 차를 세워둔 장소까지의 거리가. 그중 절반을 걸어서 왔고, 나머지 절반 그러니까 겨우 15m 남짓 뛰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심장을 터질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가까운 곳에 세워둘 것을. 혹시나 몰라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세워둔다는 게 오히려 내 발을 묶고 말았다. 아, 몰라. 숨이 턱턱 막히면서 머릿속이 하얗고 입에선 단내가 풀풀 난다. 이런 마당에 더 이상 제대로 된 생각이 이어질 리가 없다.
“헉! 헉!”
숨을 헐떡이며 뛰다 보니 차가 보인다. 이제 한 달음만 내달려 도착한 뒤, 차 문을 열고 올라타 시동을 건 후 여길 벗어나면 끝이다. 고지가 눈앞이란 생각 때문인지, 어디서 난 힘인지 속도가 올라간다. 삑! 삑! 뛰면서 꺼내든 리모컨을 누르자, 헤드라이트가 점멸하며 차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아!”
마침내 차 앞에 이르러 숨을 크게 몰아쉰 뒤, 막 차 문을 열려던 찰나였다. 뒤쪽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씨발새꺄! 너 거기 안 서!”
거친 욕설을 쏟아내며 달려오는 남자는……. 오병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남자가 악귀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날 향해 달려오고 있다. 젠장! 어째서 들켰냐는 의문 따윈 들지 않는다. 그저 한 가지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잡히면 말 그대로 엿 된다는. 서둘러 차 문을 열고 탑승한 뒤, 곧바로 시동을 켰다. 그러곤 핸들을 두 손으로 꽉 잡고선 액셀을 힘껏 밟는 순간이었다.
“야이 새끼야아아아!”
얼마나 크게 소리치는지, 창문이 올라간 상태에서도 들린다.
“후우……!”
순식간에 멀어지는 인형을 사이드미러로 보며 숨을 크게 내뱉었다. 아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진짜……. 다시 하라면 절대 못 할 것만 같았다. *** 무서운 속도로 멀어지고 있는 차를 보면서 오병수는 눈을 번뜩였다. 가로등이 있다지만, 워낙 어두웠고 자신이 뛰고 있는 반면 차는 시시각각 멀어져갔기에 번호판을 확인할 여력은 없었다. 그 바람에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닭 쫓던 개처럼 쳐다만 보아야 했다. 하지만 확인할 방도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하아, 씨발!”
욕을 내뱉은 뒤 오병수는 인상을 구겼다. 이미 낮에 강윤식에게 메시지를 보냈건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늦게 보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파일을 넘길 걸 그랬다. 쯧, 그러고 보면 그놈의 욕심이 화근이다. 제대로 값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에 파일을 가지고 있던 게 패착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어쩔 수 없지.”
한바탕 깨지긴 하겠지만, 그뿐이다. 사진이야 다시 찍으면 되고, 누가 가져갔는지는 카메라에 남아 있을 지문을 통해 알아보면 될 일. 경찰 쪽에도 선은 닿아 있고, 그쪽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면 한나절 안에 카메라에 남겨진 지문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속으로 잡히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서는 오병수. 그의 눈은 칼날이라도 깃든 듯 더없이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준석이 형의 질문에 난 흠칫 놀라서 바라보았다.
“예? 뭐, 뭐가요?”
“뭐긴 인마! 너 거울도 안 봐? 완전 시커멓잖아! 이거이거……. 아무래도 간 쪽이 문제인 거 같은데? 하아, 나참. 내 그럴 줄 알았다. 대체 얼마나 몸을 혹사시키길래 그러는 거냐? 안 되겠다. 너 이따가 점심 먹고 나랑 병원에 다녀오자.”
염려 가득한 형의 얘기에 난 쓰게 웃었다. 원인은 잘 알고 있다. 그제부터 어제까지 통영을 다녀온 뒤 쉬지도 않고 으뜸 심부름센터에 숨어들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게다가 밤새 한숨도 못 잤다. 혹시라도 날 잡으러 올까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보안체계가 잘 잡혀 있는 곳이 삼한 그룹 총수의 저택이었으니까. 문제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굴까? 대체 누가 날 미행하라고 시킨 건지. 이하연과 날 찍어서 뭘 어쩌려고 그런 걸까? 진짜 나레이션이 말한 것처럼 스캔들을 일으키려던 걸까? 근데, 그게 스캔들이 되긴 되나? 물론 사진이 공개되면 나로서야 난처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스캔들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좋지 않다는 건 분명한데……. 대체 누가 어떤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화도 좀 나서 밤새 한숨도 못 잤더랬다.
“괜찮아요. 어젯밤 생각할 게 많아서 잠을 좀 못 잤더니 그래요.”
“흠, 정말?”
“예. 아, 그리고 뭐가 얼굴이 시커메요? 와아, 진짜 뻥을 쳐도. 너무 심한 거 아녜요?”
“뭐야? 이게 하늘 같은 형님한테! 일로와! 어쭈! 도망가! 너 거기 안 서!”
그렇게 주방에서 아침 식사 시간을 보낸 뒤, 점심까지 준비한 후 저택을 나섰다. 생각 같아선 숙소로 들어가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다른 스케줄이라면 어떻게든 미뤄보겠는데, 오늘 약속은 하필 장희경 관장과 관련된 것이라서. 새로 오픈하는 백화점 모델 건으로 만나는지라 나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 도착합니다만.”
차를 몰아 혜암 아트홀 근방에 이르러 핸즈프리로 연락하자, 상대편에서 웃으며 조심해서 오란다. 음, 아직 만나보진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선 나쁘지 않은데. 나긋나긋한 음성이 상냥하게 느껴진다. 지난번처럼 남자…… 그러니까, 장희경 관장의 수족으로 보이는 자와 만나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나 보다. 아무래도 그 남자는 어쩐지 껄끄러워서…….
“그나저나 모델이라…….”
광고라면 광고인데,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형태. 그러다 보니 살짝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막막하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의문이 든다. TV나 잡지에 나오는 건 아니지만, 백화점에 막 내 사진이 걸리고 그러는 걸 텐데. 내가 그래도 되나 싶어서. 막말로 백화점은커녕 마트에서도 물건 살 일도 별로 없는 나였고, 숙소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이라고 해봐도 스무 벌도 되지 않는 내가 백화점 모델? 백화점 모델이라면 아무래도 좀 더 고급스러운 이미지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란 놈은 그 자격이 현저히 부족하다.
“알게 뭐냐.”
뭐, 상관없잖아. 판단은 저쪽에서 할 뿐.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란 생각을 하는 동안, 혜암 아트홀에 도착했다. 정문을 지나쳐 노상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삐익! 그런 후 차에서 내려 리모컨으로 문을 잠그고 막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서진영 씨.”
누군가 날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