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스캔들 (2)2021.12.08.
스캔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느닷없는 일격이다. 절로 의아해졌다. 스캔들이라는 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을 정도의 부도덕한 사건을 총칭하는 것인데, 그런 일이 나한테 벌어진다고?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높고 저명한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임을 고려하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요즘 들어 부쩍 내 이름도 많이 알려진 상황이니 스캔들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된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알려지면 부도덕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걸까? 그 의문은 이어지는 나레이션에 의해 간단히 풀렸다. - 서진영 모르게 뒤를 쫓던 이들이 이하연과 함께 있던 모습을 적나라하게 촬영하였으며……. 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하연의 이름이 나올 때부터 설마설마했는데, 누군가 미행했던 모양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제 이하연과 함께 통영에 내려갔을 때 사진이 찍혔다는 얘기다. 하아, 그럼 이거 나만 문제가 아니잖아? 아니 따지고 보면 나보다 이하연에게 더 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나야 아이돌처럼 연애 금지조항 따위가 붙은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눈 한 번 질끈 감고서 공개 연애를 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하연은 다르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대현 그룹 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손녀다. 워낙 손이 귀한 집안이고, 그중에서도 여아보다 남아가 월등히 많아 어릴 때부터 이하연이 행여나 다칠라, 혹여 감기라도 들어 아프기라도 할까 봐 벌벌 떨던 집안 어른들이라고 했다. 그런 집안이 심지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한평생 노력해도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궁금해하기 마련이고, 우연찮게 접하게 된 뒷소문으로나마 그 호기심을 자극하면 무서울 정도로 불타오르는 법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하연’의 연애 소재는 더할 나위 없이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란 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내가 있고. 후우, 어쩐다? 나 몰라라 하기엔 사안이 너무 크고, 그렇다고 직접 나서기엔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니, 대체 어떤 놈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거지? 괘씸하기도 하고, 울화도 치밀어 인상을 팍 구겼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리 방도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일단은 강형식과 의논해봐야 하나? 갈수록 뜨거워지는 머리를 억지로 식히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였다. -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응? 나레이션이 주소를 말해준다. 말할 것도 없이 사진을 찍어갔다는 자의 주소일 터다. 한숨을 흘리며 차를 꺾었다. 왜 사진을 찍었는지, 그 사진을 언제 어떻게 이용할지는 모르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스캔들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적거릴 여유 따윈 내게 없었다.
*** 한서 사운드 건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강윤식은 조금 전까지 검토하던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내며 턱을 쓰다듬었다. 까칠까칠한 수염이 만져졌다. 벌써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가고 있는 건지. 시시각각 보고되는 서류를 검토하고, 또 그에 따른 방안을 내놓아야 하는 만큼 일분일초가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서 사운드와 관련된 사안은 중요하다. 그럴 수밖에. 계획대로만 된다면, 향후 삼한 그룹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질 테니. 어쩌면 그의 아버지인 강구철 사장보다도 입김이 세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핸드폰 사업과 관련된 일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더라도 삼한 전자에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하다. 하물며 사운드 기술을 책임지는 사안인 바에야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경쟁사인 LZ 전자가 세계에서 알아주는 정상급 기술 즉 디스플레이 액정과 사운드 테크놀로지를 무기로 어떻게 해서든 하이엔드 핸드폰 시장에 진입하려고 애쓰고 있는 이때, 삼한 전자가 그동안 미흡하다고 평가받던 음향 쪽 기술까지 확보하는 문제는 그룹 총수인 할아버지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안이었다.
“이제 와서 뒤집기는 힘들겠지.”
이미 서류는 올라갔고, 임원들의 사인까지 받은 마당이다. 거기다가 회장인 할아버지의 결재도 목전이다. 회의를 통해서 내부적으로 승인 나면 곧바로 팀이 꾸려질 테고, 그때부터 거래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 형태가 인수가 될지 아니면 양자 간 협약이 될지는 아직 결정 나지 않았지만, 한서 사운드가 사실상 자신의 소유임을 고려하면 어느 쪽으로 결정 나든 상관없다. 그가 노리는 것은 금전적 이득이 아니니까. 영향력의 확대. 그토록 바라던 일이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제 사흘만 더 버티면 마음 편히 집으로 들어가 발 뻗고 쉴 수 있을 터다. 그때가 되면 그동안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아내에게도 신경을 써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강윤식의 입가에 미소 한줄기가 스쳐 갔다. 얼마 후면 자신에게 주어질 달콤한 과실을 미리 맛보고 있던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스윽, 스윽. 손가락이 터치스크린을 두드리고 미는 사이 화면이 바뀌며 문자 메시지 하나가 떠오른다. 사진 확보.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보고였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물론 지금 당장 그 사진을 이용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모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일테면 보험이다. 현재로서는. 밑에 직원들을 시켜서 알아낸 바로는 강형식이 놈과 함께 또다시 잔머리를 굴리며 작당하는 모양인데……. 그까짓 식품. 삼한 전자를 넘어 그룹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핸드폰 사업에 비하면 구멍가게나 다름없다. 그래도 혹시라도 모르는 일이니까, 철저하게 대비한다는 의미에서 이처럼 뒷구멍을 파고들었을 뿐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봤을 때, 강형식도 강형식이지만 서진영이라는 놈은 간특하기 짝이 없으니까. 뭐, 안 되면 나중에라도 녀석을 쳐낼 때 쓰면 되겠지. 혹은 협박하거나. 어느 쪽이 되었든 대현 그룹이 얽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목줄이 되어줄 것이다.
“일단 하나는 묶었고.”
톡, 톡, 톡…….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던 강윤식이 픽하고 웃었다. 찰나 자신이 강형식 따위를 너무 신경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강윤식이 핸드폰을 내려놓고선 다시금 서류를 집어 들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눈을 빛내며 서류 속 글자 하나까지 꼼꼼하게 검토하는 그였다. *** 나레이션이 사라진 뒤였다. 우선은 강형식에게 전화를 걸며 나레이션이 알려준 곳을 향해 차를 몰았다.
“아,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거야?”
계속해서 신호음만 가다가 안내메시지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길 세 차례. 더 전화를 해봐야 소용없겠다는 판단에 음성 메시지만 남겼다.
“난데, 이거 들으면 연락 줘. 급한 일이야.”
문자로 자세한 얘기를 하긴 뭐하고, 음성으로도 설명하자면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 남긴 메시지였다. 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삼십 분 안에 연락이 오리란 생각으로 전화를 끊고선 차를 몰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내 예상을 빗나갔다.
“후우, 자는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벌써 새벽 한 시를 넘겨 시침은 두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서 셰프의 선택’을 확대 개편하기로 하면서 일 분을 한 시간처럼 쓰고 있는 걸 알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쯤 되면 내일 연락하는 게 맞을 터다. 그렇긴 한데……. 문제는 내일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거다. 난 차 안에 앉은 채로 도로 건너편 건물을 노려보았다. 리모델링을 하긴 했는데, 건물 자체가 워낙 노후된 탓에 어딘지 모르게 허름하게 느껴지는 곳의 3층이었다. 워낙 좁은 땅에 건물을 올린 탓인지, 층당 면적도 그리 넓지 않았고 그렇기에 ‘으뜸 심부름센터’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는 사무실도 한 층을 통으로 쓰고 있었다. 한마디로 계단을 뛰어오르면 문 하나만 가로막고 있다는 얘기다. 불이 꺼진 거로 봐선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문만 열 수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서 그 문은 어떻게 열 건데? ……하고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갑자기 들려오는 BGM에 눈을 치떴다가 이내 씩 하고 웃고 말았다. *** 철컥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헐. 이게 이렇게 쉽게 열린다고? 근처 편의점에서 구입한 실핀 두 개로 나레이션이 하라는 대로 꿈지럭거리길 10여 분 만에 해낸 일이었다. 나 완전 소질 있는 거 아냐? 속으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손잡이를 움켜쥐었다가 이내 움찔했다.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걱정 때문이었다. 혹시 안에 사람이 있는 건 아닐지. 다른 보안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지 등등.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다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만일 내가 걱정하는 대로 뭔가 있다면 나레이션이 알려줬을 테니까. 문을 따는 순간 나레이션이 사라져버렸다는 건, 한편으로는 더 이상 날 가로막는 방해요소가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문손잡이를 돌려 잡아당겼다. 삐걱하는 마찰음이 들리며 컴컴한 어둠이 날 맞이했다. 어디 있을까? 활처럼 바짝 당겨진 긴장감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들며 마른침이 넘어간다. 아무래도 책상 쪽에 있겠지? 창문을 통해 비쳐드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사무실을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우려했던 것처럼 다른 보안 장치가 있거나 하진 않았다. 하기야 딱 봐도 흥신소에 불과한데, 얼마나 귀중한 자료가 있다고 몇 겹씩 보안 장치를 해두었겠는가. 덕분에 한결 쉬워졌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창가 앞에 놓인 소파를 지나쳐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달그락달그락. 서랍을 하나씩 열면서 들려오는 소리가 제법 크다. 순간적으로 멈칫하긴 했지만, 그래도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진 않았다. 이미 모두가 퇴근하고 텅 빈 사무실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후우, 그래도 떨리긴 한다. 이거……. 불법이라면 불법인데. 이래도 되나 싶다가도 허락 없이 내 뒤를 캐고 또 사진까지 찍은 놈들이니, 따지고 보면 피장파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법에 의지해 경찰을 부른다고 해서 사태가 해결될 거 같지도 않으니, 결국 최선은 몰래 들어와 사진 혹은 사진 파일이 담긴 USB 따위를 가져가는 것일 테다. 그렇게 한참을 뒤지던 나는 눈을 홉뜨지 않을 수 없었다. 책상 오른쪽 맨 아래 서랍. 열쇠 구멍이 보였지만, 웃기게도 잠겨 있지 않다. 다시 한번 마른 침을 삼키며 서랍을 열었다. 빙고. 서류봉투들이 보였고, 그 옆에 USB가 굴러다니고 있다. 서둘러 USB를 꺼낸 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모니터를 켰다. 그러곤 컴퓨터를 켰는데……. 오오, 엄청 조용하다. 게다가 빠르다. 부팅이 3초 만에 끝나고 바탕화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흥신소라서 그런가? 허름한 사무실에 비해 고사양의 컴퓨터를 사용하는 듯하다. 어쨌든 나로서는 좋은 일이다. 잽싸게 USB를 꽂고 클릭해본다. 그리고 실망. 미친! USB 안에 파일이 달랑 세 개 들었는데, 세 개 모두 동영상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틀어보니 전부 야동이다. 와씨, 완전 헛다리 짚었네.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워져 눈을 깜빡였다. 분명 사무실 어딘가에 있을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다 컴퓨터를 뒤지기 시작했다. 바탕화면엔 쓸데없는 파일만 있어 문서 폴더나 기타 다른 폴더를 열어보던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나레이션 말로는 분명 사진이라고 했으니, JPG 파일이나 그 밖의 이미지 파일일 게 분명하다. 어디 있을까?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을 멈춘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며 나도 모르게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렸는데……. 어! 그 사이 눈이 어둠에 길들여졌는지 아까보다 좀 더 잘 보이게 된 사무실 안. 책상 옆쪽에 세워져 있는 책장 한가운데 놓인 DSLR 카메라가 보였다.
느낌이 온다. 씨익 웃으며 손을 뻗었을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갑자기 들려온 BGM. 그리고 이어지는 나레이션. - 약속이 있어서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던 오병수는 원래대로라면 집으로 들어갔을 테지만, 잊어버리고 사무실에 두고 간 서류를 챙기기 위해서 다시 돌아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