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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스캔들 (1) (185/204)

#185. 스캔들 (1)2021.12.05.

호텔 방에 앉아 테이블 위에 한 상 차려놓은 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일 정도였다.

“매운탕까지 있으면 딱인데. 그쵸?”

이하연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물어왔다.

“취사가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죠. 다음에 꼭 해줄게요.”

“진짜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콧소리를 내며 웃는다.

“어, 시작한다!”

TV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이하연이 내 옆으로 와 찰싹 달라붙는다. 움찔. 안 그래도 아까부터 어색했는데, 이렇게까지 가깝게 붙으니 몸이 굳어버린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의식하게 된달까. 호텔 객실. 이하연. 그리고 밤. ……이라고 하기엔 아직 밝지만. 아무튼 지금과 같은 상황에 긴장되지 않으면 남자라고 할 수도 없을 거다. 반면 이하연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별생각 없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어! 그냥 떨어뜨린 게 아니네요?”

멍하니 있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야 정신을 차렸다. TV를 보니 화면에 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는 2차 예선에서 떨어진 참가자들이 있었고. 아, 저 때……구나.

“어머! 패자부활전? 그럼, 저 사람들 잘하면 또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곤 설명해줬다.

“탈락자들끼리만 모아서 다시 경합하는 거죠. 그래서 본선에 진출한 이들이랑 또 겨루는 거고.”

“원래 그런 룰이었어요?”

“아뇨. 저 때, 떨어진 사람들 보니까 좀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그녀가 날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내 뺨을 착 감싼다.

“이그, 누굴 닮아서 이렇게 착한지.”

“왜, 왜 이래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그녀가 싱긋 웃더니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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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러운 키스…… 아니, 뽀뽀에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런 내 귀로 그녀의 나긋나긋한,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 이건…… 상이에요.”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어 있는 건 조명 탓만은 아닐 것이다. *** 창밖에서 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얼마 후 누군가 계단을 밟고 오는 소리가 이어졌다. 손톱깎이로 손톱을 깎고 있던 오병수는 책상 위에 올려둔 발을 까닥거리며 문 쪽을 바라본다. 철컥. 문이 열리고 들어선 남자는 오병수의 짐작대로다.

“다녀왔어요.”

박철준. 영리하다기보단 영악하고, 살짝 찢어진 눈매만큼이나 얍삽하며 때로는 주먹질도 불사할 정도로 폭력적인, 오병수가 데리고 있는 유일한 부하직원이었다.

“제대로 찍었겠지?”

털썩.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딴소리다.

“하우, 더워 죽는 줄 알았네. 날씨 미쳤나 봐. 이러다 여름이 오기도 전에 쪄 죽겠네.”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하며 시답지 않은 소리를 늘어놓는 박철준을 오병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다가 다시 물었다.

“잘 찍었냐고.”

“아, 진짜. 찍었으니까 들어왔지, 안 그랬으면 여기 있겠냐고요!”

“가져와.”

투덜거리며 일어난 박철준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건넸다. 딸각딸각. 디지털카메라에 달린 방향키를 움직여 사진을 확인하는 오병수.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맨 얼굴은 왜 여자밖에 없어?”

“몰라요. 호텔 들어갈 때 여자 혼자 가더라고. 그 뒤론 잠깐 밥 먹고 왔고.”

박철준의 설명을 들으며 오병수가 다시금 사진을 넘겨본다. 커다란 선글라스에 야구모자를 쓴 남자와 같은 행색을 한 여자가 팔짱을 끼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는 게 보인다. 시간은 6시간 전. 사진을 찍고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다는 얘기다.

“아침까지 거기 있으라고 했잖아.”

“뭐 볼 게 있다고 거기 있어요. 이렇게 증거가 확실한데.”

박철준의 말대로다. 비록 여자가 혼자서 호텔로 들어갈 땐 서진영이 없었지만, 대신 두 사람이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통영에 도착할 때까지의 사진은 있었다. 거기에 더해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사진도 여럿이었고. 그땐 둘 다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상관없다. 옷을 갈아입지 않은 이상, 두 사람이 서진영과 이하연이라는 건 빼도 박도 못할 진실일 테니.

“형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뭐 한다고 사진까지 찍어가면서…….”

“말했잖아. 보험이라고.”

“보험은 개뿔. 그렇게 거슬리면 차라리 묻어버리든가 할 것이지. 그 양반 참 새가슴이네.”

“됐어. 우린 그저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대로만 해주면 돼.”

“하긴. 우리야 돈만 받으면 장땡이지. 후우, 나 땀을 너무 흘려서 그런데, 들어가 봐도 되겠수?”

“가봐.”

“오케이! 그럼, 먼저 가우.”

박철준이 사무실을 나가고 난 뒤, 오병수가 카메라를 다시 한번 확인하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현 그룹의 영애다. 서진영이야 별거 아니지만, 그녀…… 이하연을 건드려도 되는지. 찝찝한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하루 이틀 거래한 사이도 아닌 데다가, 이미 선금까지 받아버린 것을. 께름칙한 마음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어 잡념을 털어버리는 그였다. *** 자칫 어색할 뻔했는데, 금세 분위기가 풀린 건 전적으로 <맛있는 도전> 덕분이었다. 신현정 피디의 뛰어난 편집 능력이 돋보이는 방송이었달까. 탈락자들을 하나하나 인터뷰하고, 2차 예선을 통과한 참가자들까지 챙겨가며 흥미를 돋우더니, 화면은 3차 예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시작된 또 한 번의 경합. 두 명씩 짝을 지어 팀을 이룬 이들이 요리를 시작하고, 뛰어난 비주얼과 현란한 솜씨로 음식을 만드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그 모습을 이하연이 눈을 반짝이며 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막걸리를 홀짝거리고 회까지 먹어가면서. 그러길 한 시간. 어느 틈엔가 방송은 끝이 났다.

“아, 뭐양! 벌써 끝인 거야?”

혀가 살짝 꼬인 그녀가 귀엽게 투정을 한다.

“어! 쟤 떨어지는 거예요?”

예고편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 이하연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간다. 그러다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멈칫. 이내 스르르 내려오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전화가 걸려왔다.

“아,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곤 화장실로 들어갔다.

“예, 서진영입니다.”

- 박준혁입니다.

C 마트 박 실장이었다.

“말씀하세요.”

- 일정이 잡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 다음 주 수요일. 괜찮으시겠어요?

계약 얘기다. 음, 막상 기획사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까 좀 떨리네. 그나저나 진짜 괜찮은 건가? 따지고 보면 난 삼한 그룹 직원인데,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강형식이나 박 실장이나 괜찮다고 하고, 또 알아서 한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긴 하는데……. 에이, 몰라. 알아서들 하겠지. 이런 게 귀찮아서 기획사를 두려고 하는 건데.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 예. 그럼 그날 뵙죠.

전화를 끊고 나서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잘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지. 이제 와서 이런 생각하는 것도 우습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꼭 필요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서 돌아섰다. 그러곤 화장실을 나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아, 이제 뭐 하지? 아까 이하연이 내게 뽀뽀를 한 게 떠오른다. 급격하게 올라가는 체온.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진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너무 긴장돼서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화장실을 문을 열었다.

“하아…….”

이하연을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소파에 앉은 채로 곯아떨어진 그녀. 눈을 감은 채 쌕쌕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씻고 자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침대 위로 옮겨서 눕혀주려고. 그때였다. 스윽. 그녀의 팔이 목을 감아 왔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곤 얕은 숨을 내뱉었다. 흠칫. 놀란 내게 그녀가 말했다.

“좋아요.”

“…….”

“진영 씨……. 따뜻해서 좋아.”

  ***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가 점심 때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번 회의는 신규 브랜드 런칭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했으니까.

“다음엔 기저귀라도 차고 들어오라고 해야겠네요.”

마침내 회의가 끝났을 때 강형식이 장동일 상무에게 한 말이다.

“그러게. 회의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는데?”

“그만큼 직원들도 흥분했다는 거겠죠.”

그럴 만도 하다. 현재 시장 반응은 뜨겁다 못해 터질 것 같다. 출시한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주부들 사이에선 이미 ‘서 셰프의 선택’이 없어서는 안 될 필수템이 되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찌개를 끓이든 볶음을 하든 간에 한 방울만 넣으면 풍미가 확 살아나는데, 누군들 안 쓸까. 게다가 화학조미료도 아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재료는 천연. 맛도 맛이지만 영양 면에서도 타사 제품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 차이를 알아본 소비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며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양념뿐만 아니라 요리까지 상품을 확대하려 한다. 회의 안건으로 올라온 것을 보곤 직원들이 눈을 빛내던 걸 떠올리며 강형식이 웃었다.

“그나저나 너무 빠른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는 수 없지. 저쪽에서 또 언제 방해할지 모르니 그전에 확 치고 나가는 수밖에.”

“그렇긴 한데, 3개월 뒤에 출시라……. 녀석이 힘에 부칠 텐데.”

“잘할 거다. 워낙 성실한 친구니까.”

“후, 그렇긴 하죠. 책임감 하난 세계 1등인 녀석이니까요.”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복도를 걸어가다가, 장동일 상무가 머뭇거렸다. 뭣 때문에 그러나 싶어 강형식이 바라보자, 장동일 상무가 망설이다가 묻는다.

“일전에 얘기하던 거 기억나냐?”

“뭐 말씀입니까?”

“한서 사운드 말이다.”

눈을 가늘게 뜬 강형식이 되물었다.

“거기가 왜요?”

어느새 걸음을 멈춘 그에게 장동일 상무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얘기하기 시작했다. *** 호텔을 떠나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길. 보조석에 앉아 있는 이하연을 힐끔거려보지만, 그녀는 그저 라디오를 만지작거릴 뿐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설마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음, 술을 많이 마시긴 마셨지. 그렇다곤 해도……. 어젯밤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떡 삼키고 있을 때였다. 꾹. 내 볼을 살짝 꼬집는 손. 이하연을 보지도 않은 채 신음을 흘렸다.

“크윽, 아……파요.”

“그러게 누가 딴생각하래요?”

“제가 언제…….”

“그럼 아까부터 왜 자꾸 힐끔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건데요?”

“그, 그야……. 큼, 어제…….”

“어제?”

“아뇨. 그냥……. 하연 씨 예쁘다고요.”

“딴 여자 생각한 건 아니고요?”

“아우, 무슨!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정말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이하연이 방긋 웃으며 내 볼을 놔준다. 그러더니 불쑥 말하는 게 아닌가.

“이제 빼박이니까, 도망갈 생각 마요.”

“빼, 빼박?”

“어머? 이 남자를 어떻게 하지?”

눈알을 도르르 굴리다가 말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사과 같은 거 안 해도.”

“……?”

“아무한테도 안 뺏길 거니까.”

응? 이건 또 무슨? 의아해져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제가 말했던가요?”

“뭐를?”

“나요. 이제껏 내 거 누구한테 뺏겨본 적 한 번도 없거든요.”

  *** 서울로 올라와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 후, 서둘러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그녀와 나누었던 얘기들을 곱씹었다. 빼박.

“크큭…….”

웃고 말았다. 언젠가 강형식이 해줬던 말이 떠올라서. 레오파드라고 했던가. 그녀의 별명이.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 일들이 하나둘 떠올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긴 집착이 강하니까 그런 줄 알라던 그녀의 말도 기억난다. 그 얘기가 사실이었는지, 그동안 그녀는 집착 아닌 집착을 보여주었다. 뭐, 내 입장에서는 그저 귀엽기만 했지만.

“좋아해야 하는 거……겠지?”

다시 한번 히죽 웃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BGM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 두 사람에게 위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모자란 서진영은 실실 웃고 자빠졌다. 어? 이건 또 무슨 소리? 의아해져서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 원래 스캔들이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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