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요리사입니다만. (1)2021.11.28.
32명의 본선 진출자가 결정되었다. 그중 가장 기대가 되는 건 역시나 토미 김이었고, 한청과 유수아가 속한 팀이 떨어지지 않은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후우, 이러다가 쓰러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요즘 얼마나 바쁜지 주방일에 거의 매일 빠지다시피 했고, 얼마 전 등록한 헬스장엔 근처도 못 갔을 정도였다.
“오늘도 오늘이지만 앞으로가 더 큰 일이네.”
방송을 끝내자마자 바로 빠져나온 나는 그대로 차를 몰아 혜화동으로 향하는 중이다. 이사벨라를 만나기 위해서. 마로니에 공원 뒤쪽 길에 있는 작은 건물. 2층으로 올라가자 문에 KANG’S STUDIO라고 쓰인 글자들이 보인다.
“오셨어요!”
한차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난 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윤주 팀장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그녀는 잡지사 ‘더 센스’의 편집장이지만, 한편으로는 보그 본사의 신임 디렉터인 이사벨라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는 잡지사들이 외주로 촬영을 맡기는 상업지 전문 스튜디오이고. 그렇다고 해서 남윤주 팀장이 이사벨라 지인 자격으로만 여기 와있는 건 아니었다. 한국에도 보그 지사가 있지만, 나와는 그다지 친분이 없던 터라 일종의 윤활유로서 그녀가 이 자리에 동석하게 된 셈이다. 좀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인데, 그런가 보다 했다. 하긴, 지난번에 더 센스 인터뷰 때에는 이사벨라가 객식구도 와 있었으니까. 나로서야 남윤주 팀장이 있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고 좋으니까 뭐.
“미스터 서!”
오늘도 이사벨라는 그저 반갑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내 팔을 부둥켜안은 채 한쪽으로 이끄는 그녀로 인해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런 나를 남윤주 팀장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 인터뷰는 무사히 끝났다. 오늘 처음 인사한 보그 한국지사의 직원이 한국인인지라 묻고 답하는 건 그리 어려움 없었다. 덕분에 인터뷰 자체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는데, 대신 사진 촬영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기야 사진을 대충 막 찍으면 모르겠지만, 컨셉에 맞춰서 옷 갈아입고 머리 만지고 심지어 화장까지 하고 난 뒤에 찍다 보니 그럴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건 더 센스 때처럼 상의 탈의처럼 난감한 요구를 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카메라맨의 요구는 집요할 정도였고, 그때마다 뻣뻣한 몸을 움직여 포즈를 취하는 건 고역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때마다 날 보며 꺅꺅거리는 이사벨라와 어딘지 모르게 볼에 홍조를 띠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남윤주 팀장 때문에 민망하기도 했고. 아무튼, 2시간가량이 지난 후 우리는 KANG’S STUDIO에서 나올 수 있었다.
“설마 이대로 집에 가자는 건 아니겠죠?”
오호! 이제야 알겠구만. 남윤주 팀장이 어찌 보면 억지에 가깝게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를.
“회식이라면,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저 오늘 무지 피곤한데…….”
“노우우우우! 이럴 순 없는 거예요! 제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이사벨라가 길길이 뛴다. 그 옆에선 남윤주 팀장이 양념 치듯 바람을 불어넣었고. 결국 난 그녀들과 함께 고깃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2시간가량 흐른 뒤, 보그 직원들과 스튜디오 팀원들까지 합쳐서 도합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함께 노래방에 와 있었다. - 조금씩 잊혀져 가네. 머물러 있을 사람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가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마이크를 내려놓자, 내 옆에 꼭 달라붙어 있던 이사벨라가 방긋 웃는다. 후우, 이러다가 화장품 냄새가 몸에 밸까 두렵다.
“와아! 진영 오빠, 노래 잘한다!”
어느새 친해져서 말까지 놓게 된 남윤주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잘하긴. 예전에 좋아하던 노래라 하도 들어서 그런 거지.”
이렇게 말하며 이사벨라에게서 거리를 벌리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전화가 와 확인해 보곤 흠칫했다. 이사벨라가 자꾸만 내 곁을 지키려는 터라 안 그래도 살짝 불편하게 느끼던 참인데…….
“아, 잠시만요.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일행들에게 말하곤 룸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조용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아예 밖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나 참, 여보세요라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 지금도 바쁜 건가요?
이하연이었다.
“아뇨, 아뇨. 일은 다 끝났고요. 지금은 사람들하고 회식 중이에요.”
- 힘들겠다앙.
“그, 그렇죠 뭐.”
- 그래도 힘내요!
“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런 내게 그녀가 물었다.
- 아, 내일이죠?
“예?”
- 방송이요. 같이 볼까요?
“아……. 예. 그렇긴 한데…… 내일은 촬영이 있어서요.”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괜스레 권태홍 감독이 원망스럽다. 후우, 그놈의 재촬영. 괜히 한다고 했나? ……라고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일은 일이고, 연애는 연애지.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얼른 말했다. 최대한 이하연이 기분 상하지 않게.
“죄송해요. 대신 다음 주에는 꼭…….”
- 일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예. 내일은 어쩔 수 없지만…….”
- 괜찮아요.
“…….”
- 저 내일 쉬는 날이거든요.
“……?”
“여기요!”
그녀의 회사 근처에 이르러 차에서 내려 손을 들자 그녀가 화색을 하고 다가왔다.
“설마 어제, 밤새운 거예요?”
“조금 잤어요.”
차에 타는 그녀의 얼굴이 푸석푸석한 느낌이라서 물었더니, 역시나다. 참네, 회사에 잘 곳이 어딨다고. 직원 휴게실 정도는 있겠지만, 그녀의 직책상 따로 맘 편히 쉴 곳이 있을 리 없다. 회장님 정도 되면야 사무실 한쪽에 일하다 잠시 쉴 만한 공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도착할 때까지 다섯 시간은 걸릴 테니, 좌석 젖히고 한숨 푹 자요.”
“어떻게 그래요. 운전하는 사람 졸리게.”
“걱정 마요. 저 이제 좀 익숙해졌다니까요.”
“풉.”
“응? 왜 웃어요?”
“아뇨. 그냥. 옛날 생각나서요.”
뭐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떠올렸다. 그녀와 나눴던 대화들이. 운전할 줄 모른다는 나에게 자신은 자전거를 탈 줄 모르니 쌤쌤이라고 했지. 흠, 그래도 옛날이라고 하기엔…….
“작년 말이군요.”
“예. 시간 진짜 빨리 가는 거 같아요.”
미소짓는 그녀를 보며 나 역시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한눈을 팔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그러게요. 그때만 해도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킥하고 웃더니 말한다.
“전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요?”
“아! 그, 그래요?”
“당연하죠. 이제 와서 말이지만, 진영 씨 딱 제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처음 본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신호를 줬는데도 반응이 없길래 얼마나 속상했다고요. 진짜 그땐 어찌나 답답하던지……. 생각 같아선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니까요!”
말해놓곤 까르르 웃는 그녀. 차창을 통해 햇살이 은은히 비쳐드는 가운데, 귀엽기만 한 그녀와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여자와 단둘이 가는 여행이라니. 뭐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쁘다. 저녁까지 촬영이 잡혀 있어서 계속 같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일은 아침부터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통영에선 뭐가 맛있다고 하더라. 대게가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지난번엔 시간에 쫓겨서 맛도 못 보고 그냥 올라왔었는데, 잘됐다. 이참에 그녀랑 대게도 사 먹고, 해변도 거닐고, 또 기회가 되면 제트스키도 타야겠다. 그렇게 흐뭇한 심정으로 열심히 페달을 밟은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다 왔어요?”
한숨 푹 자서 그런지, 아까보단 나아진 얼굴로 물어오는 이하연을 보며 대답했다.
“그렇게 좋은 호텔은 아닌데, 괜찮겠어요?”
촬영지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혹여라도 사람들 눈에 띌까 봐 고른 장소였다. 그러다 보니 내가 예약한 호텔이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
“에이, 괜찮아요. 어디든 어때요. 저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럼……. 이제 어쩔까요?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그러고 나서 좀 돌아보죠. 해변 쪽으로도 가보고.”
“4시부터 촬영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긴 한데…….”
촬영시간은 4시. 지금은 2시가 좀 안 된 시각이었다. 밥을 먹기엔 충분하지만, 데이트하기엔 조금 어중간한 시간이다.
“밥부터 먹고 생각해요, 우리.”
내 팔짱을 껴오는 그녀를 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이지,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여자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여자냐 남자냐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나로서는 함께 있는 사람이 배려심이 많으면 더없이 좋은 일일 수밖에 없다.
“가요!”
씩씩하게 날 끌고서 어디론가 가는 그녀에게 물었다.
“뭘 먹을지는 정하고 가야죠?”
“대게 먹자면서요.”
응?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그녀가 큭큭 거리더니 말했다.
“아까 차에서 중얼거리던데요? 대게 먹고 싶다고.”
*** 밥을 먹고 나서 잠시 시내를 구경하다가 헤어졌다. 내가 촬영하는 동안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있으라고 했지만, 이하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먼저 체크인하고 호텔 방에서 일하겠단다. 다음 주에 있을 회의 자료나 다듬는다나. 대신 오늘 방영할 방송은 꼭 같이 보기로 하곤 촬영장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서둘러서 촬영을 끝내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런 마음 때문인지, 도착하자마자 얼른 권태홍 감독을 찾았다.
“어서 와요. 오는데 힘들진 않았어요?”
“일찍 출발한 덕분인지 그리 막히지 않더군요.”
“그거 다행이네요.”
다행스러운 점은 따로 있었다. 김서연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음, 근데 난 왜 그걸 걱정하는 걸까? 순간 든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권태홍 감독이 갑자기 물어왔다.
“저어, 근데 서 셰프. 혹시 제트스키 탈 줄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