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거리에서 (3)2021.11.26.
당황하지는 않았다. 혹시 이런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대놓고 얘기할 줄은 또 몰랐네. 또 한편으로는 C 마트 그룹의 정보력이 놀라웠다. 강형식과 이 얘기를 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항간에 재벌들의 정보력이 국정원을 뛰어넘는다는 얘기가 있던데, 사실은 아닐지라도 그에 근접한 수준까지는 되는 모양이다. 상황이 이런데 이제 와서 감추는 건 오히려 비웃음만 살 일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이다. 방향은 정해졌지만, 어떤 요리를 어떤 방식으로 내놓을지는 논의단계에 불과하니까.
“아, 혹시나 해서 얘기하는 건데 불쾌해하진 말아요. 내가 서 셰프에 대해 관심이 많다 보니 박 실장을 비롯해 그룹 내 인사들이 워낙 적극이거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있는 김진숙 회장이었다. 그만큼 날 존중한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딱히 기분 나쁘거나 하진 않다. 오히려 그 반대면 반대지. 게다가 비즈니스잖아? 아무리 편하게 얘기하고 있다고 해도, 종국엔 거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젠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말했다. 너무 빙빙 돌리는 건 내 스타일도 아니거니와, 김진숙 회장처럼 영리하다 못해 영악하기까지 한 사람에겐 이편이 오히려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투자를 원하시지도 않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문제에 관해선 저한테 어떠한 권한도 없습니다. 물론 필요하시다면 한마디 정도는 거들 수 있겠지만, 제 능력으론 거기까지가 한계인 거 같네요.”
내 얘기에 김진숙 회장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내가 이래서 서 셰프를 좋아한다니까. 말하는 것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분명히 밝히지만 투자할 생각도 없고요.”
“……그럼?”
톡……톡……톡.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김진숙 회장이 불쑥 물어왔다.
“사업 얘기는 이쯤 해두죠. 오늘 서 셰프를 만나자고 한 건 이것 때문이 아니니까요.”
대꾸 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김진숙 회장이 긴장하지 말라는 듯 살짝 웃어 보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욕심내는 건 사람이에요. 그리고 요즘 들어 가장 관심이 가는 건 서 셰프고요.”
그러니까……다. 왜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거냐고. 어쩌다 보니 이름도 좀 얻고 나름 잘나가게 됐다고 하지만, 그래 봐야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아서 한숨을 내쉬자,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서 셰프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모르네.”
“……말씀해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뭐, 그건 내가 할 얘기는 아닌 거 같고. 봐요, 서 셰프. 내가 서 셰프를 단지 상품으로만 보고 기획사 얘기를 꺼냈을 거 같아요?”
섣불리 대답할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이 쉽게 묻는다고 함부로 대응했다간 자칫 우스울 꼴만 당할 수 있을 테니.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이유는 모르겠다만, 김진숙 회장이라면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내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되었다. 이번 일만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첫 만남부터 그랬다. KS 진 회장의 팔순 잔치에서 명함을 준 것부터가 파격이다.
“그렇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한차례 끄덕인 뒤, 김진숙 회장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죠.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사람. 그런데 희한하게도 서 셰프에겐 사람이 모여들더란 말이지. 마치 자석 같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필터까지 장착했는지, 그렇게 모여들 사람들 모두 진국이더라고. 그런데도 욕심이 안 날 수가 있나?”
“…….”
“서 셰프.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줘요. 옆에서 바람 넣는다고…… 그동안 보여준 모습으로 봐선 그런다고 흔들릴 거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쓸데없이 사업을 하겠다거나 억지로 일을 꾸미려 하진 말고. 뭐랄까, 그냥 하고자 했던 대로 묵묵히 밀고 나가요. 그러면 알아서 길이 열릴 테니까. 당연히 난 서 셰프 편이니, 서 셰프가 변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밀어줄 생각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후우, 이제야 김진숙 회장의 심중을 알겠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 셰프의 선택’을 두고 강형식과 사업적인 관계를 이어가더라도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말라는, 일종의 우려 혹은 충고일 터다.
“회장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제야 김진숙 회장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런 채로 그녀가 불의의 일격을 날렸다.
“그럼 이제…….”
“…….”
“강형식에게 명함을 건네주는 일만 남았나?”
*** 오랜만에 만나는 두 사람이 자리한 곳은 그다지 좋은 가게는 아니었다. 아마 그 둘을 아는 사람이라면 놀라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허름한 술집. 안주라곤 구운 고등어가 전부였고, 술 또한 막걸리가 다다. 그런데도 고윤수 주방장은 아련한 눈빛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여긴 참 변하는 거이 없디 않습네까?”
해방 직후였던가. 그때와 비교하면 많은 게 바뀌었지만, 그래도 느낌만은 그대로였다. 단지 허름하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뭐랄까, 힘들게 일과를 마치고 나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러 한잔 술에 시름을 달래던 그 느낌. 그게 고스란히 남아 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포댁이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름의 이 가게 원래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지만, 가게를 물려받아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켜온 사람이 다름 아닌 원래 주인의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시장하셨을 텐데, 오래 기다렸습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바짝 튀기다시피 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를 내왔다.
“솜씨는 여전하군.”
고윤수 주방장 앞에 앉아 있던 강 회장이 그윽한 눈길로 노인과 고등어 그리고 막걸리가 담긴 술병을 바라봤다.
“손님들이 잊지 않고 찾아주신 덕분이죠.”
한국전쟁을 겪으며 남편을 잃고 난 뒤에도 좌절하지 않고 이곳에서 아이 셋을 키워 공부를 시키고 결혼까지 시킨 여인이었다. 그중 한 명이 지금 삼한 그룹의 부장으로 있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예전의 고왔던 모습은 세월을 따라 흐려졌지만, 차분한 행동거지와 함께 나직나직한 말투는 여전하기만 하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한데 틀어 올려 쪽진 머리칼은 하얗다 못해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강 회장이 술잔을 들었다.
“천천히 드시라우.”
“그러지.”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들고 내리긴 몇 차례. 하지만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굳이 입이 필요한 게 아니란 걸. 서로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아왔기에 그럴 터였다. 그렇기에 이처럼 함께 술잔을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말이다. 그로부터 20분. 그사이 나눈 대화는 A4용지 한 장으로 요약해도 반도 못 채울 분량이었다. 그러고 나서 본론이 흘러나왔다.
“들으셨을 테디만, 기 아새끼들이래 제법 단단해뎠지 뭐임네.”
“그렇다고 하더군.”
운을 뗀 고윤수 주방장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꾸하던 강 회장이 가만히 술잔을 내려놓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 제 애미애비를 그렇게 보내놓곤 못내 아쉽고 불안하기만 했는데. 이제라도 마음을 다잡고는 저리 사람 구실을 하는 걸 보면.”
강형식의 얘기였다. 고윤수 주방장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차분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기쁨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옛말에 열손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고 했다. 강 회장에게 있어 강형식은 그런 손가락 중 하나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렇기에 함부로 말을 꺼내기 어려웠지만, 또한 그렇기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강형식뿐만 아니라 서진영까지 얽혀 있으니까.
“어드렇게 하실 생각입네까?”
고등어 한 점을 집으려던 젓가락이 멈칫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 회장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등어 살점을 떼어 입에 넣고는 씹었다. 마치 생각이라도 곱씹는 양 꽤 오랫동안. 그러다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고윤수 주방장을 바라본다.
“하나만 묻지.”
“말씀하시디요.”
“그 아이…… 제자인가?”
대답은 곧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차분하게 술잔을 들어 올려 입가에 가져갔다가 또다시 차분하게 내려놓고서야 말문을 열었다.
“가르친 게 있어야 말이디요.”
“…….”
“솔딕히 저도 신기할 때가 있슴네다. 왜인디는 몰라도 자꾸만 마음이 가는 거이.”
“그렇군.”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뒤, 강 회장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아이는 믿을 만한가?”
고윤수 주방장이 강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채로 한참이나 있다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한 가디는 분명하디요.”
눈을 피하지 않는 강 회장에게 고윤수 주방장이 단호하게 얘기했다.
“적어도 사람답다는 게 뭔디는 아는 놈입네다.”
*** 마지막 촬영은 스튜디오에서 하기로 되어있었다. 촬영 한 시간 전부터 방송국에 와있던 나는 의자에 기대앉아 한참 상념에 빠져 있었다. 어제 김진숙 회장과 나누었던 대화 때문이었다. 그녀가 했던 말을 요약하자면, 한마디로 ‘욕심내지 마라’였다. 납득이 간다. 김진숙 회장이 예상보다 날 더 아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해준 말들에 거부감이 들거나 반발심이 드는 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니까. 옛말에 한 우물을 파라고 했다. 아무리 재주가 많아도 오랜 시간 한 가지에만 집중한 사람보다, 적어도 그 분야에선 잘할 수가 없을 테니. 물론 누군가는 말할는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느냐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사라진 지금,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릴 것도 없고 또 다소 부정적인 방식이라도 돈만 벌면 장땡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땐 아직 어려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십분 공감한다. 무슨 일이든 십 년을 하고 하면 그제야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법이라고. 아직 나는 십 년을 완전히 채우지 못했다. 요리에 관심을 갖고 꿈을 키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억지로 헤아려도 이제 겨우 9년째다. 게다가 설사 10년을 채운다고 해도 그게 끝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10년을 채우고 나면 요리에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르겠다만, 오히려 그때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하는 건 너무 큰 비약일까? 어찌 되었든, 김진숙 회장의 얘기는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얘기라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래서 고민이다. 어젯밤 김진숙 회장과 대화를 끝내고 나서, 박 실장과 함께 기획사 문제로 잠시 얘기를 나눴지만……. 정말 나한테 기획사까지 필요한 걸까? 또한, 방송은 언제까지 하는 게 맞을까? 그 밖의 일들은? 이를테면 광고라든가, 인터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는 게 맞나? ‘세 셰프의 선택’에 관한 일도 나중에는 손을 떼는 게 맞지 않을까? 어제오늘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네요.”
한진석의 말마따나 모니터에는 네 명씩 한 팀을 이룬 16개 조가 방송국에서 준비한 차를 타고 상암동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유, 떨려. 난 이런 거 진짜 싫더라.”
윤정희가 눈살을 찌푸리자, 장경묵이 킬킬거렸다.
“다 그런 거죠. 붙는 사람이 있으면 떨어지는 사람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다들 열심히 했는데, 누군 떨어지고 또 누군 붙고…….”
“선배님은 진짜 마음이 여리신 거 같아요.”
한진석이 따뜻한 눈빛으로 윤정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서른두 명이 또다시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될 테다. 한마디로 그들이 받아들게 되는 잔 속에는 독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잔을 건네는 일이 바로 내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