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거리에서 (2)2021.11.24.
오후 5시. 피크는 아니었지만, 푸드트럭 앞은 말 그대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아마 저녁 식사 시간대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평가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미 홍대를 거쳐 신촌, 종로까지 둘러보고 온 후여서 여기만 이런 게 아닌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한진석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 무섭네. 사람들 다 어떻게 알고 온 거람?”
장경묵이 혀를 내두르다가 갑자기 씩씩거린다.
“장사가 이렇게 쉬운 거였어? 와씨! 그럼 난 뭔데? 죽을 똥 싸면서 치킨집 열었다가 쫄딱 망한 난 뭐냐고!”
그가 재작년인가에 파닭인지 뭔지를 개업했다가 반년도 안돼서 문을 닫은 건 제법 알려진 얘기다.
“망한 건 아니잖아. 네가 하기 싫어서 관둔 거지. 너 그때 권리금 많이 받고 넘기지 않았냐?”
“뭐, 그러긴 했지.”
“그럼 된 거잖아.”
“하아, 진짜 이 형이 뭘 모르네. 장사가 진짜 잘됐어 봐. 내가 관뒀겠어? 차라리 개그맨을 관뒀으면 관뒀지.”
“그런가?”
“아, 몰라! 말 시키지 마! 나 지금 엄청 기분 나쁘거든! 나참, 누군 하루하루 피 마르는 심정으로 장사했는데, 이거 지금 말이 되냐고! 저 사람들이 줄 선 것 좀 봐!”
혀를 차며 억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장경묵이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나 한진석 그리고 윤정희까지 다들 알고 있을 터였다. 이 모든 게 다 방송빨이라는 걸.
“그래도 결국 맛이 관건이겠죠. 하루이틀 하고 말 거 아니면.”
“그렇긴 하죠.”
“얘! 넌 줏대도 없니? 왜 자꾸 이랬다저랬다 해? 그러니까 네가 안 되는 거야.”
보다 못한 윤정희가 한 소리 하자, 장경묵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선배님은 왜 자꾸 나만 가지고 그래요.”
“어우, 그만 좀 투덜대라, 얘. 진석아. 그러지 말고 얼른 가자. 이러다가 한 시간도 더 기다리겠다.”
“가시죠.”
윤정희를 앞세우고 푸드트럭으로 다가가는 한진석을 나와 장경묵 역시 뒤따랐다.
***
“어서 오세……!”
날 발견한 한청이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눈알을 또르르 굴린다.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지금 이 상황이 평가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뭘 그렇게 놀라?”
“아뇨. 오실 거라곤 생각지도 못해서.”
“놀라셨나 봐요.”
“이 재미에 몰래카메라 하는 거지.”
“응? 이거 몰래카메라였어?”
“아뇨. 선배님. 전혀요. 그런 거 아니에요. 경묵이가 또 혼자서 오버하는 거예요.”
“아유, 하여간 쟨 진짜 왜 저러는 거니?”
또 한차례 꾸지람을 듣고 마는 장경묵이었지만, 뻔뻔한 성격인지 그저 실실 웃으며 한청을 비롯한 참가자들에게 농담을 건네는 그였다.
“저희도 핫도그 하나씩 주세요.”
“어? 진짜요?”
“예.”
“우리 다른 가게…… 트럭에서도 하나씩 다 먹고 오는 길이에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배 터지기 직전이에요!”
한진석과 장경묵의 말을 들은 한청과 참가자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고 있었다. 눈치챈 거겠지. 단순한 시식이 아니라 채점 중이라는 걸.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긴장하지들 마세요. 오늘만 올 거 아니니까.”
부담을 덜어주려고 한 말인데, 오히려 부담이 가중됐던 걸까? 이젠 사색이 되어버린 참가자들이었다. 한청 역시도 입을 살짝 벌린 채 흔들리는 눈동자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4차 예선 미션 첫날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만 세 통을 받았다. 가장 먼저 걸려 온 것은 다름 아닌 이사벨라였다.
- 내일 오후에 도착하는 거 잊진 않았죠?
당연하다. 원래 좀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스케줄이 밀린 터라 안 그래도 빡빡한 일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지. 안 그랬다간 인터뷰가 엉망이 돼버릴 테니까.
“정말 마중 나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 문제없어요! 한국지사에서 공항으로 나온다고 했으니, 미스터 서는 전혀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래요, 그럼. 전 오후 8시까지 스튜디오로 가 있을 테니, 거기서 봬요.”
- 아, 나 막 떨리는 거 있죠. 내일이 무척 기대돼서.
이사벨라의 얘기에 웃으면서 말했다.
“조심해서 오세요.”
- 오케이. 그럼, 내일 봐요.
전화를 끊고 나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감독님?”
- 서 셰프! 지금 바쁜 거 아니죠?
권태홍 감독이었다.
“촬영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 잘됐네요. 아, 혹시 운전 중이셨어요?
“아, 잠깐만요.”
핸즈프리라곤 하지만, 이사벨라와의 통화와는 다르게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차를 길가 한쪽으로 멈춰 세웠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금 통화를 이어나갔다.
“잠시 정차했어요. 말씀하세요.”
- 다른 게 아니고…….
“……?”
- 혹시 재촬영 가능할까 해서요.
응? 재촬영? 잠시 생각에 잠기던 나는 금세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통영에 내려갔을 때, 나레이션이 들려오는 바람에 컨디션이 엉망이 되어버린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거절하기 힘들었다. 물론 그전에 물어보긴 했지만.
“그때 찍은 게 별로인가 보죠?”
- 그런 건 아니지만, 좀 아쉽더라고요. 확인해보니까.
“흠,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번 주는 주말까지 시간이 안 날 거 같은데?”
- 가능은 하다는 말씀이시죠?
“그럼요. 문제가 있다는데, 당연히 다시 찍어야죠.”
- 역시! 이래서 제가 서 셰프님을 좋아한다니까요. 아, 페이 문제는 KS 측에서 따로 연락이 갈 겁니다.
솔직히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았는데……. 뭐, 그렇게 해주면 나야 좋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촬영 스케줄 잡히면 연락 주세요.”
- 그럴게요. 얼른 알아보고 전화 드리죠.
권태홍 감독은 기분이 좋은지 노래라도 부를 듯한 음성으로 전화를 끊었다.
“괜히 미안해지네.”
따지고 보면 잘못은 나한테 있는데도 어째 저쪽에서 부탁해오는 모양새라 찝찝한 기분이었다. 다시 찍는 건 좀 더 신경 써서 찍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녀석에게 연락이 왔다. 기어를 풀고 막 차를 출발시키려던 찰나였다.
“어, 무슨 일?”
정신이 하나도 없네. 다시금 기어를 파킹에 놓고, 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다.
- 상무님께 말씀드렸더니 좋다고 하시더라고.
강형식의 얘기에 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일이 순순히 풀려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탓이었다.
“그럼 뭐부터 하면 되는데?”
- 우선은 레시피?
“음, 주말까지 주면 돼?”
- 그때까지 되겠어?
“전부는 힘들지. 하지만, 간단한 것부터라면 가능하지 싶은데?”
- 그 정도라도 감지덕지지. 안 할 거면 모를까 하기로 했으면 하루라도 빠르면 좋으니까.
“알겠다.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넘겨줄게. 그럼 되는 거지?”
- 그렇지. 그건 그렇게 하고. 레시피 보고 난 후에 샘플 작업해야 하니까…….
“샘플?”
- 샘플이라고 하니까 좀 그런데. 별거 아냐. 그냥 우리가 준비한 곳에서 레시피대로 요리해주면 돼. 나머진 회사 측에서 알아서 할 거고.
대충 알 거 같다. 아무리 간단한 요리라고 하더라도 간장이나 고추장과는 달리 레시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겠지. 실제로 맛이 어떤지는 둘째치고, 상업성이 있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뜻일 테다. 다 좋은데, 시간이 문제다.
“나, 요즘 바쁜 건 알지?”
- 알지.
생색을 내려거나 허세를 부리려는 게 아니란 걸 녀석도 잘 알 거라 믿는다.
“다음 주까진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을 거 같아. KS 쪽에서도 촬영 다시 하자고 하고.”
- 다다음 주쯤에는 괜찮다는 거잖아. 그때쯤이면 딱 좋을 거 같은데? 그전에 레시피 정리하는 거로 하면.
“그렇다면 다행이고.”
- 그럼 그렇게 알고 진행하마.
알았다고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에 잠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박 실장에게 전화를 건 이유였다.
“박 실장님?”
- 예. 박준혁입니다.
“접니다. 서진영.”
-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던 참인데. 오늘은 늦었고 해서 내일쯤 전화할까 했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요.
“아, 그러셨구나.”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내 쪽 용무부터 해결해야지 싶었다.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있지 않습니까?”
- 혹시 기획사 문제 얘기입니까?
“맞습니다.”
대답을 들은 박 실장이 한 텀을 두고 말해왔다.
- 괜찮으시면 5분 정도 있다가 다시 전화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박 실장이 전화를 끊은 지, 오 분 정도 지난 후 다시금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곤 뜬금없이 얘기했다.
- 지금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예? 지금요?”
- 아, 제가 아니라…….
“……?”
- 회장님께서 보자고 하시네요.
*** 박 실장이 말해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안내를 따라 차를 몰고 간 곳은 신사동이었다. 흔히들 가로수길이라고 부르는 동네였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자, 저만치서 박 실장이 다가와 아는 척한다.
“요즘 많이 바쁘신 거 같더군요.”
“예. 그 때문에 연락드린 거고요.”
“그러실 거 같았습니다.”
언제나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안경을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호감이 가득했다.
“근데, 회장님께선 왜?”
“가시면서 말씀하시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아는 김진숙 회장은 어떤 의미로는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 무슨 얘기로 날 놀라게 하려나. 엉뚱한 구석도 있어서, 매번 그녀를 만나게 되면 깜짝 놀라곤 했는데. 오늘도 그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주차장에서 건물까지는 오십 미터쯤 떨어져 있어서 그사이에 궁금하던 걸 물었다.
“근데, 아까 저한테 전화하려 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그거요.”
“…….”
“별건 아니고요. 아시는지 모르지만, 오는 5월 30일이 대현 그룹 회장님께서 생신이거든요. 혹시 그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어? 대현 그룹이면……. 이하연의 할아버지 얘긴가? 그분이 생신이란 건데.
“혹시 파티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파티 주방을 맡아달라는 얘기인가? 난 멍한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지금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파티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그룹의 총수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어지간한 규모일 리가 없다. 그런 파티의 음식을 나더러 총괄하라는 얘기? 어처구니가 없어서 되물었다.
“농담하시는 거죠?”
내 질문에 박 실장은 대답할 생각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더니 호의 가득한 음성으로 얘기한다.
“누구나 처음은 있습니다.”
“…….”
“전 믿습니다. 서 셰프님이시라면 잘 해내실 거라고요. 그렇기에 대현 측에 셰프님을 추천한 거고요.”
할 말을 잃고 말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가게는 레스토랑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폐쇄적이었고, 그렇다고 술집이라고 하기엔 또 너무 밝았다. 반면 들어가는 입구부터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데다가 정장을 입고 리시버까지 낀 채 문을 지키고 있는 이들 때문인지 일반인들은 접근조차 어려워 보였다. 더구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깔끔한 복장을 한 여성이 우아한 몸짓으로 다가와 우리를 안쪽으로 안내해주니, 나도 모르게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회원제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 그렇게 그 여자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룸이라고 부를만한 곳이 나왔다. 문을 열자, 익숙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오랜만이네?”
김진숙 회장이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자, 김진숙 회장이 웃으면서 손짓한다.
“딱딱하게 왜 그래요? 이리로 와서 앉아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얼른 가서 앉았을 때, 박 실장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나가는 게 보였다. 둘만 있게 되는 건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의아해져서 김진숙 회장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면, 생각지도 못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 브랜드 말이에요. ‘서 셰프의 선택’……. 확대 개편한다고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