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 도약 (1) (173/204)

#173. 도약 (1)2021.11.07.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차다. 가까운 사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막말로 내세울 것 없는 이들끼리는 조그마한 성과라고 내면 서로 물고 빨고 해주기도 하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친구도 아니거니와 가족도 아니다. 무려 삼한 그룹의 안주인이다. 거기다가 국내에선 최고라고 일컫는 미술관의 관장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 할 일이 없어서 입에 발린 말을 하겠는가. 그러니 무시할 수만도 없다. 그러니까, 날 더러 셀럽이다? 와닿질 않는다. 그래, 인정한다. 근래에 내가 확 유명해진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긴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방송에 자주 나오고 이런저런 이슈가 되긴 했으니까 말이다. 광고도 적잖게 찍었기에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맞다. 그렇다고 해서 어깨에 힘주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왜냐? 어쭙잖게 잘난 척하고 다니다간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는 한데…….

“왜? 아닌 거 같아요?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겠네. 표정 보니까.”

내 표정이 어떻게 길래? 마음에 들지 않는 얘기에 인상이 구겨진다. 그런 내게 장희경 관장이 물었다.

“혹시 SNS 해요?”

“……아뇨.”

“그럴 줄 알았어요. 자기처럼 외골수인 사람은 좀 느린 편이긴 하지. 세상의 중심에서 살짝 빗겨나 있달까. 아무튼, 없으면 하나 만들어요. 그러면 바로 알 수 있을걸? 대중들이 얼마나 자기한테 관심이 많은지.”

글쎄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SNS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계정을 관리할 능력도 없거니와, 그럴 시간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을 찍는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발판으로 돈벌이를 할 생각도 없으니 지금도 앞으로도 SNS를 할 일은 없을 테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니 그 얘긴 이쯤 해두고. 아무튼, 서 셰프한테는 격이 느껴져. 중심이 잡혀 있다는 거지. 그걸 또 대중들이 아는 거고. 그러니 당연히 서 셰프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파급력을 지니게 되는 거겠지. 왜 이것도 아닌 거 같아요? 아님, 날 못 믿는 건가?”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했으면 나 상처받을 뻔했잖아.”

옅게 미소를 지어 보인 장희경 관장이 방금과는 달리 싱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고찰은 혼자 있을 때 천천히 하도록 하고. 오늘은 나랑 비즈니스를 하자고.”

“……말씀하십시오.”

“내가 제안하는 건 이거예요.”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혜암아트홀을 빠져나오는 차 안에서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보시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올 때처럼 갈 때도 날 데려다주는 남자. 이름도 모르는 그가 날 걱정해준다.

“괜찮습니다.”

“역 앞에 세워드리면 되는 겁니까?”

“예.”

순순히 대답하자,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그러다가 목적지에 거의 다 와 갈 때쯤 남자가 불쑥 던진다.

“두 분 사이에 어떤 말씀이 오갔는지는 모릅니다만.”

“…….”

“저는 마음에 듭니다. 서 셰프님이.”

“감사하네요.”

“훗. 빈말이 아닙니다.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좋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될 수 있으면 긍정적으로 고려하시길 바랍니다. 관장님께서 어떠한 제안을 하셨든지 간에.”

뒷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가만히 그를 보다가 물었다.

“왜죠?”

백미러를 통해 남자의 눈매가 보인다. 살짝 휘어진 것이 미소를 머금는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

“관장님께선…… 사업가시거든요. 아시죠? 기브 앤 테이크. 절대로 손해 보지도 않으시지만, 대가 없이 이득을 취하는 이들을 경멸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네요.”

“그러시다면 다행이고요.”

차가 멈추고 날 내려준 후, 남자는 차를 몰고 사라졌다.

“후우……!”

대낮처럼 밝은 건 아니지만, 불야성이라는 표현이 더할 나위 없이 맞아떨어지는 거리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사방팔방에 켜져 있는 네온사인과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누군가와 부딪힐 수밖에 없는 많은 인파 속에서 난 방금 장희경 관장이 제안한 바를 떠올렸다. 백화점 모델이라……. 광고라면 광고인데, 조금 궤가 다르다. 소식지는 말할 것도 없고, 전단지며 TV 광고까지 날 전면에 내세우는 마케팅을 하겠단다. 계약 기간은 3년. 경기도 성원시의 신도시인 분교지구 내에 새로 생기는 백화점. 앞으로 한 달 뒤면 완공 예정인 스타필드 백화점의 모델이 되어달라는 제안이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당최 판단이 안 된다. 아니 아니. 그전에, 이거 해도 되는 건가? 보통 백화점 모델 같은 건 남자보단 여자가 많던데. 그리고 대부분이 내로라하는 스타들이고. 거기에 비해 난 연예인도 아니거니와 급으로 따져도 그들의 발끝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장희경 관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다. 그녀는 대체 나한테서 뭘 본 걸까? 속이 답답한 게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다. 쯧, 모르겠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 운동부터. 그렇게 결정하곤 헬스장으로 가기 위해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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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맞잖아!”

“응? 진짜네?”

“와! 갓솁이다!”

“싸인 받자!”

“앗싸, 사진 찍었다!”

“빨랑 SNS에서 올려봐!”

“엄마, 엄마. 저 아저씨, 어제 TV에서 본 아저씨!”

“어머, 진짜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그때였다.

“오빠! 사인 좀 해주면 안 돼요?”

“사진 찍어도 돼요?”

상큼발랄하다고 말하기에도 어린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걸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아우성을 친다.

“갓솁! 어제 방송 멋졌어요!”

“꺄아아악! 표정 개시크해!”

“오빠아아아! 날 가져요!”

“미친년! 쪽팔리게 왜 그래?”

“저, 갓솁 팬이에요!”

“요리해주세요!”

“저랑 드라이브해요!”

어우야, 뭔 놈의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몰려드는 거람. 안 그래도 좁은 인도에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행인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오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도로 쪽으로 치우쳐 걷던 이들이 인도 밖으로 밀려나게 생겼다.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난 누군가 내민 사인지를 받아들며 외쳤다.

“죄송한데요! 여기 이러고 있으면 큰일 나겠어요! 사인이랑 사진……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릴 테니, 저쪽으로 가시죠!”

어디선가 꺅꺅거리는 소리로 함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을 이끌고 인도 안쪽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

“와, 씨! 깔려 죽는 줄 알았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훑으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옷 늘어났나?”

목이 아까보다 느슨하다. 아까 기습적으로 나한테 매달렸던 여고생 짓이지 싶은데……. 망할! 몇 벌 되지도 않는 티셔츠인데. 이번 주말엔 시간 좀 내서 몇 벌 사야겠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아까 길거리에서 사람들하고 씨름해서 그런가 무지하게 덥다. 해서 손으로나마 얼굴에 대고 부채질을 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내려와 선다. 띵! 문이 열리길래 막 걸음을 내디뎌 타려는 순간이었다.

“어!”

안에 타고 있던 남자가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흠칫. 놀랐다가 이내 옅게 웃어 보이자, 그 틈에 누군가 소리친다.

“갓솁?”

“어머, 갓솁이네?”

“와아아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그대로 돌아섰다. 그러곤 주위를 재빨리 살피는데, 비상구가 눈에 들어온다. 타다다닷. 빠르게 발을 놀려 방화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후우.”

숨을 몰아쉬곤 계단을 오르며 중얼거렸다.

“젠장! 7층까지 언제 올라가.”

  ***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후끈한 공기가 날 맞이한다. 과연 낮에 올 때랑은 다르구나. 엊그제 잠시 들러서 등록할 땐 이 정도까지 아니었는데, 사람 진짜 많네. 대충 헤아려도 삼십 명은 넘을 거 같다. 연령대도 다양해서 이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 남녀 할 것 없이 열심히 운동 중이다.

“어떻게 오셨……. 어?”

트레이너로 보이는 여자 한 분이 내게 인사를 해오다가 눈을 치뜬다. 하아……. 또 이런다. 어제 방송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나? 왜들 이러나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운동 좀 할까 하는데요.”

“아! 예……. 그, 그러면 먼저 등록부터 하셔야 하는데요?”

뭐지? 지금 얼굴 붉히는 건가? 더워서 그런 거 같지는 않고. 설마 부끄러워하는 거?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얼른 얘기했다.

“등록은 이미 했습니다. 확인해보시죠.”

“아, 잠시만요.”

머리를 뒤로 해서 한데 묶은 여자가 돌아서고 있었다. 운동복이 살짝 민망하게 느껴져 시선을 돌렸다. 서진영 너, 왜 이러냐? 이러면 저분한테 실례잖아.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해 보이고 있을 때, 여자가 되돌아왔다.

“맞네요. 등록되어 있으세요.”

“예. 탈의실은 어느 쪽인가요?”

“일단 이거부터 받으시고요.”

그녀가 내미는 가방을 엉겁결에 받고서 눈짓으로 뭐냐고 묻자, 여자가 싱긋 웃는다.

“이벤트 중이라는 설명 못 들으셨어요? 가방 안에 있는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나오시면 됩니다. 아, 가지고 계신 게 있으면 그걸로 환복하셔도 되고요.”

“아, 그 얘기…… 들었습니다. 그럼.”

목만 까닥거려 가볍게 인사를 하곤 탈의실 쪽으로 향하는데……. 몇몇이 날 보며 수군거리는 게 보인다. 설마……? 괜스레 멋쩍어져서 발걸음을 빨리했다. *** 미치겠다.

“저기요.”

또?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아니, 왜들 이래? 트레드밀에서 내려오기 무섭게 다가오는 여자. 언제 준비했는지 종이랑 펜을 내밀고 있다.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이젠 나도 포기다. 민망한 것도 한두 번이지. 이쯤 되니까, 없던 철판도 생겨날 판이다.

“예. 주세요.”

종이를 받는데…….

“민혜라고 해요.”

“아, 예…….”

처음엔 어색했는데, 몇 번 해봤다고 이젠 별스럽지 않게 받아넘긴다. 민혜 씨,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라고 쓰고, 그 밑에 오늘 날짜와 사인을 해주었다.

“감사해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도 자리를 뜨지 않은 채 날 물끄러미 쳐다본다. 뭔가 해서 바라보니,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운동 많이 하셨나 봐요. 진짜 멋지세요.”

눈웃음. 큭. 이건 좀 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 있을 때, 저만치서 아줌마들이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부끄러워하는 거 봐.”

“어제 방송엔 그렇게 정색을 하더니, 이제 보니 귀엽네.”

“우리도 가서 사인받을까?”

“호호호. 그래. 사인도 받고, 사진도 한 장 박지 뭐.”

까르르거리는 소리에 기겁하고 있을 때, 눈앞의 여자가 발그레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사, 사진도 좀.”

“예.”

대답하기 무섭게 여자가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곤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흔히 말하는 얼짱 각도로 사진을 찍는다. 찰칵! 찰칵! 찰칵! 몇 번이고, 찍고 또 찍고 하더니 밝게 웃으며 돌아서는 여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봐요, 총각.”

“예?”

“어제 방송에 나왔던 그 총각 맞죠?”

억지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헬스……. 관둬야 하나?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

“아, 진짜라니까요.”

- 크크큭. 그래서 안 해줬어요?

이하연은 웃느라 정신이 없다. 나참, 나는 지금 돌기 일보 직전이구먼.

“웃지 마요.”

- 웃긴걸요.

“아, 몰라요. 나, 지금 택시 타니까 들어가서 다시 전화할게요.”

- 아! 왜요? 택시 타서도 통화하면 되잖아요.

“……창피하니까 그러죠.”

- 제가 창피해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 쿠룹, 크큭. 진영 씨……. 너무 귀여워. 알았어요. 도착하면 전화 줘요.

전화를 끊고 나서 투덜거렸다. 여자친구가 뭐 이래? 외간여자가 자기 남친한데 막 들이댔다고 하는데, 웃기만 하고. 그렇게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택시 한 대가 다가와 멈춰 선다. 문을 열고 타며 목적지를 말하는데, 날 알아본 택시운전사 아저씨가 눈을 크게 뜨곤 외쳤다.

“어?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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