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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셀럽? (3) (172/204)

#172. 셀럽? (3)2021.11.05.

“도착했습니다.”

남자의 얘기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관장님 뵈러 온 겁니까?”

날 보며 그가 빙글빙글 웃는다. 그러더니 당연하다는 듯 얘기했다.

“서 셰프님이라면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만.”

나도 모르게 눈가가 살짝 떨린다. 이것 봐라. 태도는 지극히 공손한데, 말 속에 뼈가 있다? 하는 행동을 보면, 테스트는 아닌 거 같고. 하기야 어쭙잖게 시험하려 들었다면 당장 내가 돌아서도 할 말이 없을 터. 제법 공들여 여기까지 날 데려온 거로 봐선, 괜스레 내 심기를 거스를 거 같진 않으니까. 그럼 이유가 뭐지? 아무리 내가 묻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처럼 중대한 사실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까닭은?

“궁금한 게 많으신 거 같습니다만,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 역할은 그저 ‘조용히’ 서 셰프님을 여기까지 모시는 것일 뿐입니다.”

난 가만히 그를 보다가 물었다.

“이름이 뭐죠? 지난번엔 경황이 없어서 미처 묻지 못했던 거 같은데.”

남자가 날 지긋이 보다가 싱긋 웃는다.

“그저 손발일 뿐입니다. 서 셰프님께서 기억해둘 만한 이름이 아닙니다.”

그렇게 얘기한 남자가 손목시계를 통해 시간을 확인하더니, 얘기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군요. 들어가시지요. 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럽시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돌아서는 남자. 그의 등을 난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보았다. *** 관장실은 미술관의 최상층, 즉 4층에 위치해 있다. 사무실도 있는 모양인지 유리문이 여러 개였지만, 그중에 한 층의 반쯤 차지하는 듯 보이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80평도 넘어 보이는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 봤을 땐 넓이가 반 정도는 될 줄 알았더니 안쪽으로 따로 분리된 공간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곤 해도 무려 백 평에 가깝다 보니, 휑하다 싶을 정도로 넓다. 게다가 층고도 높아서 위압적으로 느껴질 만도 한데,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그런가, 오히려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는…….

“수고했어요. 일보세요.”

중년 아니 노년에 가까운 여자가 나직나직 얘기하자, 여기까지 날 데려온 남자가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곤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나와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는 그였다.

“우리 처음 보는 건 아니죠?”

당연한 일이다. 인사까지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저택에서 마주치긴 했으니까. 주방일을 하는 이상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다만, 장희경 관장으로선 굳이 내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을 뿐이지.

“오늘 아침에도 뵈었는걸요.”

내가 선선히 대답하자, 그녀가 엷게 눈웃음을 친다. 한때 재계에서 이름났었던 미모를 지닌 만큼, 비록 나이를 먹었다곤 해도 우아하기 그지없는 자태였다.

“그래요. 식구죠, 우린.”

음, 뭔가 억지로 끼어맞추는 듯한 뉘앙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장희경 관장이 내게 자리를 권했다.

“앉아요. 이렇게 따로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천천히 얘기나 나눠요, 우리.”

……그놈의 우리 소리는. 속에서 뭔가 불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장희경 관장이 가리킨 소파 자리로 가서 앉자, 그녀가 어디론가 연락을 취해 차를 시키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때요? 여기.”

맞은편에 앉으며 그녀가 살갑게 묻고 있었다.

“좋네요. 뭔가 세련된 느낌이 들고……. 꼭 호텔 로비 같기도 하면서 예술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고나……. 후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쪽으론 문외한이라서요.”

애써 말하다가 이내 포기하곤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장희경 관장이 픽하고 웃는다. 비웃는 거 같진 않았고, 말 그대로 가볍게 웃는 느낌이었다.

“서 셰프. 생각했던 것보다 솔직하네요. 아, 진솔하다고 하는 편이 어울리려나? 아무튼, 대부분 사람들은 여기 오면 첫마디가 이거거든. ‘여기 너무 멋지네요!’ 같은?”

그때, 문이 열리고 젊은 여자 한 명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가 빠르고 능숙한 솜씨로 테이블 위에 찻잔을 부려놓고 사라지자, 장희경 관장이 차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요.”

“아, 예……. 감사합니다.”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 한 모금 머금었다. 나쁘지 않다. 첫맛은 향긋한데, 뒷맛은 깔끔하달까.

“좋은데요?”

“표정이 아까완 정반대네? 맛에는 일가견이 있다 이건가?”

“아, 그런 건…….”

“호호. 너무 그렇게 굳어 있지 말아요. 우리 초면도 아닌데, 이 정도 농담에 그러는 거 내가 불편해.”

“……알겠습니다.”

“서 셰프, 오늘 보니까 후회가 되네. 이렇게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일찌감치 만나볼걸 하는.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내요.”

미치겠다. 뭐라고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딱딱하긴. 뭐, 시간이 흐르면 좀 나아지겠지.”

잠시 날 가만히 바라보던 장희경 관장이 등 뒤로 상체를 젖히곤 다리를 꼬았다. 그러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곤 내려놓았다.

“서 셰프가 꽤 진솔한 사람이란 건 알았고……. 그럼 나도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네요.”

“…….”

“봐요, 서 셰프. 내가 원래 서 셰프한테 관심을 가진 건 우리 막내 때문이었어요.”

막내라고 하니까 꽤 정감이 가긴 하는데, 과연 강형식도 그렇게 생각할는지는 모르겠다. 실제로도 장희경 관장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둘째치고, 녀석 입장에선 코웃음이나 안 치면 다행이지 싶은데.

“예. 그러셨군요.”

요는 장희경 관장이 지금 말하고 있는 거다. 내게 관심을 가졌다고. 어째서? 아, 강형식 때문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어제부로 마음이 바뀌더군.”

어제면……. 방송 얘기네. 찻잔을 가만히 잡아가며 무심한 척했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쪽도 그런 건가? 강윤식처럼 날 이용하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또 그런다.”

“……?”

“또 혼자 묻고, 혼자 결정 내리는 눈치인데? 그거 안 좋은 습관이에요, 서 셰프.”

뜨악해서 장희경 관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네. 이봐요, 서 셰프. 내 나이가 내일모레면 예순이에요. 여자가 이 정도 살면, 신통력 같은 것도 생기는 법이거든? 게다가 난 어린 나이에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남자한테 시집을 왔어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내겐 선택권 같은 건 없었거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흔히들 말하는 재벌집 막내딸로 호의호식한 대가라고나 할까? 물론 불만은 없었어요. 지금도 그렇고. 대신 불안했지. 망망대해에 홀로 뚝 떨어져 버린 느낌이라고 하면 알려나? 그런 여자예요, 내가.”

“……그러시군요.”

“풋. 반응이 참 신선하네. 당황한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그래서 다들 갓솁, 갓솁하는 건가? 그런데, 서 셰프. 혹시 이런 말 들어봤어요? 부득탐승이라고.”

“……바둑 용어인 걸로만 알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었더라? 머릿속에 중구난방으로 떠오르는 말들이 있었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오래된 기억인지라. 아주 예전에……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별거 없어요. 너무 이기려고만 하지 말라는 뜻이니까. 그래도, 지금의 서 셰프한테는 필요한 말이겠네. 아, 우리 막내한테 더 필요할까나?”

뭔가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말이라 절로 입이 다물어진다. 음, 늙은 여우? 오늘 밤엔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려선 안 되겠다고 다짐하고 있을 때, 장희경 관장이 다시 말했다.

“긴장 좀 풀라는 말이었고……. 어디까지 했지? 아, 어제 TV를 보다가 서 셰프 방송 나오는 걸 보고 문득 떠오르지 뭐야. 저 정도면 함께 일을 해볼 만도 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죄송하지만, 제가 그럴 주제나 될지 모르겠네요.”

“겸손한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데 그게 너무 과하면 실례인 건 알지?”

끙. 이 여자…… 이제 좀 무섭다. 김진숙 회장과는 조금 궤가 다른 능란함을 갖추고 있다. 조금 더 교활하고, 조금 더 솔직한. 그래서 함부로 거절하기 힘든. 자신이 가진 힘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중에는 배경 또한 포함되었는데 그걸 또 애써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도 입으로 내뱉지 않으면서, 얼굴 표정만으로 다 드러내고 있는 느낌이다. 후우, 잘못 걸린 건가? 어쩐지 지난번에 보내온 보약이 입에 맞지 않더라니.

“생각이 많은 얼굴이네. 그래요.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끝내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

“서 셰프, 날 좀 도와줘야겠어.”

난 대답을 미루고, 장희경 관장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론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대체 뭔 소리지? 뭘 도와줘? 장희경 관장이 원하는 게 뭐지? 갖가지 상념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느새 나레이션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지금 상황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거라는 얘기. 생각 끝에 도달한 건 다름이 아니었다. 강윤식…… 강형식…… 그리고 강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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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후계구도다. 사실상 삼한 그룹의 승계는 굳어진 거나 다름없다. 강형식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강 회장에게 아들이라곤 차남인 강구철 사장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그 때문에 그동안 웅크려있던 강형식이 날개를 펴려 하자, 강윤식이 아득바득 막아서려 하는 걸 테고. 한마디로 언감생심 넘보지 못하게 참초제근하겠다는 거다. 그럼 여기서, 장희경 관장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 간단하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강형식의 손을 들어주는 게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오겠지. 물론 강형식이 대항마로서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그렇다고 해서 강형식이 진짜로 강윤식을 제치고, 강 회장에게 인정받아 그룹의 차기 회장 자리에 오르는 걸 장희경 관장이 바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양측이 격렬하게 싸우다가 그룹을 나눠 먹는 게 가장 좋은 결과겠지. 그래야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생각을 정리한 끝에 얘기했다.

“강형식과는 친구 사이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에게 배 놔라 감 놔라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희경 관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하는 심정이 되어 그녀를 노려보고 있자, 한참 웃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마음가짐, 나쁘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장희경 관장이 지긋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말했죠? 내가 관심 있는 건 서 셰프라고.”

숨을 돌리려는지, 아니면 내 주의를 좀 더 끌고 싶은 건지, 그녀는 말을 마저 하지 않은 채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러고 나서야 한층 낮아진 음성을 토해냈다.

“서 셰프는 다 좋은데, 한 가지 문제에 있어선 많이 서투르네.”

“……?”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라.”

가볍게 한숨을 내쉰 장희경 관장의 표정이 일변했다. 이제까지처럼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부드럽기만 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날카로운 기운이 번졌다.

“자긴 이미 힘을 가졌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모르겠어?”

“음……. 솔직히 모르겠네요.”

“그래. 그런 점이 서 셰프의 매력이긴 하지. 그렇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둬. 매력은 매력으로 끝나야지, 끝까지 모른척하거나 애써 외면하면 그거야말로 멍청한 거야. 그러다가 잡아먹히는 수가 있다고. 자신이 가진 힘에.”

충격적……이라고 말하긴 힘들겠지만, 조금 놀라긴 했다. 내가 힘을 가졌다는 것도 인정하기 힘든데, 그 힘에 잡아먹힌다라……. 솔직하게 말해서 남의 얘기처럼 들린다. 잠시 말없이 그녀를 보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경청하겠습니다.”

장희경 관장이 훗하고 웃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장점이 많은 남자네, 서 셰프는.”

그러더니 불쑥 치고 들어왔다.

“셀럽이란 말은 알지?”

“……예.”

“이름이랑 얼굴 좀 알려졌다고 해서 셀럽이라고 불리진 않는다는 것도 알 테고?”

“……거기까진 모릅니다만. 그럴 거 같네요.”

“그런 거야. 셀럽은…… 뭐랄까. 그래, 격을 갖춰야 하는 거지.”

“…….”

“서 셰프에겐 그 격이 느껴지고.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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