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셀럽? (2)2021.11.03.
인터넷은 또 하나의 세상이다. 누군가는 자기 나름의 논리를 내세우며 그곳이 거짓 세상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곳을 새로운 세상이 아닌 확장된 이 세계의 한 부분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곳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채 정보를 좀 더 자유롭고 편리하게 접하고 확대 재생산하며 소통에 소통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떤가? 휴우,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아마도 그건 청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세상과의 소통 대신 요리를 선택했기 때문일 터다. 뭐, 후회는 없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그때만 해도 요리라는 건 현실 세계, 즉 오프라인이 아니면 배울 수 없었으니까. 그것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거의 16시간 이상 일하며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온몸으로 익혀도 십 년은 족히 걸리는 게 요리였기에 당시로선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런 나로서는 미친 듯이 올라가고 있는 댓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것만 같다. - 미친 갓솁! 카리스마 작렬! - 또 갓솁이 갓솁한 건가? - 인정한다. 지난번 방송에서 인간미 뿜뿜하던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지만, 오늘 본 방송에선…… 진심 지렸다. - 와우, 요리사라는 직업이 이렇게 멋진 직업이었습니까? - 그나저나 왜 자꾸 2차 예선이라고 하는 거임? 오늘 첫 방 아님? - 1차 예선은 지역별로 치러진 서류 면접 심사였죠. 그래서 오늘 방송은 2차. - 그치만, 실질적인 첫 예선이라고 봐도 될 듯요. - 본편도 나쁘지 않았지만, 솔직히 예고편 나올 때 벌떡 일어났음. 참가자들 울고불고 난리 났던데, 혹시 갓솁이 막 윽박지르고 주먹 휘두른 거 아닐까요? - 노노. 아직도 갓솁 모름? 이건 내 예상인데, 참가자들 실력 달려서 떨어질 때, 갓솁 가차 없이 나가라고 했을 거 같음. 크, 피도 눈물도 없는 갓솁! - 헐. 그런 거임? 그럼 완전…… 내 스타일인데! 오빠, 날 가져요! - 응응. 폐기물은 안 가져. - 예언 하나 하지. 이 방송 반드시 뜬다. - ㅈㄹ 이미 뜬 걸 또 띄우려는 님은 누구? - 알바? - 절대 알바는 아님. - ㅇㅇ 요즘 알바들도 머리 좋음. - 방송 진짜 꿀잼이었음. - 핵꿀. 몇 군데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신조어들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문맥상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단지……. 민망하네. 카리스마는 무슨. 참가자들한테 쓴소리하기가 좀 그래서 일부러 표정을 숨기느라 애를 썼을 뿐인데. 그래서 그런가, 기자들도 난리다.
<검은 카리스마. 금요일 예능판을 접수하기 위해 갓솁 칼을 빼 들었다.> <신현정 PD와 서진영 셰프의 미친 케미. 드디어 베일을 벗다.> < JTL의 신규예능 프로 <맛있는 도전>, 첫 방부터 시청률 30%에 육박할 듯. > <한동안 잠잠하던 갓솁, 미친 존재감으로 대한민국을 뒤흔들다.> 윽! 내 손발 어찌할 거냐고. 오그라들다 못해 하나로 뭉쳐버린 듯하다. 지금이라면, 누가 와서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해도 백퍼 주먹만 낼 각이다. 후우, 식구들 보기 민망해서 미치겠다.
“꺄아아아! 오빵! 이거 봐! 이거!”
“뭔데? 아하하하! 짤방 장난 없다!”
수아랑 수연이 누나가 소파에서 날 사이에 두고 앉아 핸드폰으로 검색한 것들을 서로 보여주며 깔깔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아니, 그걸 왜 날 끼고서 보는 건데? 그냥 님들끼리 사이좋게 앉아서 보면 안 됨?
“하아…….”
결국,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문지르자, 우릴 흐뭇한 눈으로 쳐다보고 계시던 외숙모가 걱정스럽게 물으셨다.
“왜 그러니? 어디 아프니?”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좀 피곤해서요.”
“괜찮아. 엄마. 얘 그냥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헐. 수연이 누나는 날 너무 잘 안다.
“그런 거니?”
외숙모가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을 때, 수연이 누나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앗싸! 실검 1위!”
“진짜? 진짜, 진짜?”
“봐봐! 진영이 이름이잖아!”
내 앞에서 휙휙 지나가는 스마트폰 화면에는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실검 1위에 떡하니 올라 있는 이름……. 정확히는 별칭이랄까. 갓솁이란 두 글자가 박혀 있다.
“예에! 오빠, 쵝오오오오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두 사람, 아니 외삼촌과 외숙모까지 포함해 가족들 모두 환하게 웃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뭐……. 저렇게까지 좋아라 하는데, 좀 쪽팔리면 어떤가. 반쯤은 그저 웃고 또 반쯤은 내려놨을 때였다. 부르르르. 전화가 온다. 확인해보니 반가운 이름이다.
“응? 오빠?”
“어디가?”
“어 미안. 전화 좀 받을게.”
“뭔 전화인데…….”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수연이 누나를 피해 얼른 방 쪽으로 향했다. 이사하고 나서 처음으로 가지게 된 내 방이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나만의 공간에 혼자만 남겨졌다. 내 생전 내 방을 가지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는데…….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었다가 이내 상념을 털어버리곤 말했다.
“예, 하연 씨.”
- 방송 봤어요.
“아……. 하하. 그래요?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요?”
- 뭐예요. 아까 본다고 했잖아요.
“그, 그랬나?”
내가 출연한 방송이 처음 나가는 것도 아닌데, 엄청 부끄럽다. 너무 힘을 준 걸까? 조금은 어깨에 힘을 뺄 걸 그랬다는 후회를…….
- 멋졌어요!
흠, 이대로도 나쁜 건 아닐지도.
“진짜요?”
- 예! 완전 상남자!
“사, 상남자요?”
- 마초 같은 느낌은 아닌데, 뭐랄까……. 조용한 카리스마? 몇 마디 안 했는데도 주변을 압도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면서도 참가자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는 눈빛도 좋았고요.
내 얘기 맞나? 다른 사람을 잘못 본 거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아, 하연 씨니까 그렇게 본 거겠죠.”
- 아니에요! 회사 사람들하고 같이 봤는데, 다들 멋있다고 난리였는걸요. 힝, 이러다가 딴 여자들까지 다 알아버리면 어쩌죠? 진영 씨 멋진 남자인 건 나만 알아야 하는데. 누가 유혹해도 절대 넘어가면 안 돼요?
헛참. 콩깍지도 어느 정도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엽다. 고맙기도 하고.
“그런 일 없어요.”
- 그걸 어떻게 믿어요.
평소 같으면 이쯤에서 웃으며 물러날 그녀인데, 오늘따라 집요하다. 그렇다고 뭔가 그럴싸한 말을 하려고 해도, 그조차 지금은 멘탈이 따라가질 못한다. 자칫하면 나중에 이불킥감이 될 거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으니까. 해서 변명 같은 해명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저 못 믿어요?”
예전에 드라마 같은 데서 연인으로 분한 배우들이 이런 대사를 주고받는 걸 보면서,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저런 식으로 얘기할까 비웃었는데……. 이래서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다. 속으로 나 자신에게 조소를 지어 보이는 동안, 잠시 말이 없던 이하연이 선뜻 얘기한다.
- 믿어요.
휴우, 난생처럼 연애라는 걸 하다 보니 진짜 별것도 아닌 거로 긴장하고 또 식은땀을 흘리게 된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투정 아닌 투정을 받아주고 나선 별 탈 없이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맛있는 도전> 첫 방이 있던 날이 지나갔다. *** 하루가 지났지만, 방송의 여파는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
“워우, 서 솁! 왔음?”
준석이 형이 얼굴에 잔뜩 장난기를 머금고서 내 가슴을 툭툭 치고 있다.
“……또 놀리려고 그러죠?”
“아냐, 내가 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동생한테.”
쳇. 말투부터 평소랑 다르구만. 고개를 내젓고 있는데, 형이 내 목을 감아온다.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런데요?”
“그래서 어떻게 되냐?”
“뭐가요?”
“어쭈? 모르쇠로 나가겠다 이거지?”
슬쩍 목을 졸라오는 형이다. 풀어보려고 힘을 줘보지만, 어찌나 강하게 죄는지 당최 풀릴 생각을 안 한다. 하는 수없이 기브업.
“제대로 말해야 알죠. 뭐가 궁금한데요?”
“뭐긴? 어제 방송에서…… 마지막에 탈락자들 발표하고 끝났잖냐? 그다음에 예고편 나오고.”
“그래서요?”
“탈락한 사람들 막 울고불고 난리던데……. 인터넷에 보니까 네가 막 표독스럽게 독설 날리고, 면박을 있는 대로 줬다고 하던데, 아냐?”
“하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그건……. 아우, 말할 수도 없고.”
그놈의 비밀엄수 조항.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 한청이 지나가며 툭 하고 내뱉는다.
“오빠, 그거 말하면 우리 잘려요.”
“응? 그런 거야?”
준석이 형이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혀를 내두른다.
“너무하네. 자기 입으로 말도 못 한단 말이야?”
“비즈니스잖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한청을 나와 준석이 형이 동시에 바라보았다. 참네. 쟤는 나이도 얼마 안 먹은 게 무슨 산전수전 다 겪은 것처럼 말하는지. 어떨 때 보면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니까.
“그런 거냐?”
“그런 거죠.”
납득했다는 듯 내 목을 풀어주는 준석이 형. 형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물어온다.
“이따 밤에 술 한잔할래?”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안 되는데요?”
“왜?”
“오늘부터 운동하려고요.”
“운동?”
형뿐만이 아니라 주방 식구들 모두 내게 시선을 던지고 있다. 관심들 참 많네. 멋쩍게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헤, 헬스 끊었거든요.”
“헬스?”
“예. 요즘 부쩍 힘이 달리는 기분이라.”
“흐음…….”
형이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날 위아래로 훑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형이 씩 웃어 보였다.
“아니. 그냥.”
그냥이 아닌데? 뭔가 의미심장한 눈이구먼. 의심스럽게 형을 쳐다보자, 준석이 형이 픽하고 코웃음을 치며 얘기했다.
“너 애인 있다고 하지 않았냐?”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요?”
“뭐, 상관이 아주 없진 않지.”
“……?”
“점점 유명해지는 남친. 그걸로도 모자라서 몸매관리까지 들어간다? 이거 백퍼 바람각 아니냐?”
“참나. 형은 아직도 날 몰라요?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그래, 그래. 의지는 가상하다만. 누군 바람피우고 싶어서 피우디? 다 그럴 만하니까, 피우는 거지.”
“뭐래.”
고개를 절절 흔들며 혀까지 차고 돌아섰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이 쿡쿡 쑤신다. 뭐지? 이 기분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죄책감이 느껴지다니…….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아침 식사 준비에 매진했다. *** 저녁 식사까지 모두 끝난 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슬슬 더워지고 있었기에 몸이 끈적거려 샤워를 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헬스장에 가서 씻어도 되겠지만, 운동 후에 또 샤워를 할 테니 그냥 숙소에서 씻고 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아!”
한데, 숙소 건물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사모님. 그러니까, 이 집의 안주인이라고나 할까, 강 회장님 부인인 장희경 관장의 사람으로 지난번에 보약을 주고 갔었더랬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예……. 근데, 무슨 일이신지?”
남자가 살갑게 웃더니, 공손한 태도로 내게 말한다.
“괜찮으시면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난 손목을 들어 시계를 내려다봤다. 낡은 시계의 시침은 7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헬스야 딱히 정해놓은 시간이 없으니, 자정 안에만 가면 될 터. 물론 너무 늦게 가면 내일 아침이 힘들어지겠지만, 그렇게까지 오래 걸릴 거 같지도 않고…….
“그러시죠.”
당연히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얘기를 나눌 거라고 생각해 건물로 들어가려고 하자, 남자가 불쑥 말했다.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
의아해져서 그를 바라보자, 남자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 남자가 모는 승용차를 타고 저택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향하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애당초 거절했으면 모르겠으나 이왕지사 따라나서기로 한 것. 괜스레 설레발을 떨어봐야 꼴만 우스워질 테니 그냥 잠자코 있는 편이 낫겠다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 만에 도착한 곳은…….
“여긴?”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가기 전 보인 간판에는 익숙한 글자들이 박혀 있었다. 혜암아트홀. 그럼……? 머릿속에 장희경 관장의 얼굴을 떠올리는 동안, 남자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능숙하게 차를 몰아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