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셀럽? (1)2021.10.31.
“저요? 상주에서 왔는데요?”
- 아침부터 기다렸나요?
“에이, 그랬으면 이렇게 앞줄에 서지도 못했죠. 밤새웠어요.”
-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친구들이랑 같이 밤새워서, 오히려 즐거웠는걸요.”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자는 해맑기만 하다. 그녀의 옆에서 깔깔거리며 손으로 V자를 해 보이는 여자들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그녀들을 지나쳐 VJ의 카메라가 다른 곳을 찍기 시작했다.
- 보시다시피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대국민 프로젝트라고 해도 좋을 정도 아닐까 싶은데요. 부디 이곳에 모인 이들이 좋은 성과를 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화면이 바뀌며 광주 쪽의 예선 상황이 보인다.
- 잘하는 건 뭐죠?
“타, 탕수육이요.”
- 오, 신선하네. 그거 집에서 해 먹긴 쉽지 않은데, 아직 학생 아닌가요?
“아뇨. 제가 좀 어려 보이긴 하는데, 직장인이에요. 요리도 학원 다니며 배웠고요.”
- 그러네. 스물넷. 동안이네요. 그럼 취미로 하는 건가요? 요리는?
“시작할 땐 그랬는데…… 하다 보니까 재밌더라구요. 그래서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볼까 해요. 여기 참가한 것도 그래서고요.”
인터뷰처럼 이어지고 있었지만, 1차 예선이었다. 그 자리에서 당락이 결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웃음 뒤에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참가자들 사이에 묘한 신경전도 벌어지고 있었고. 각 지방의 대도시에 있는 체육과 내지는 스튜디오에서 벌어지는 1차 예선. 그 모습이 도시별로 카메라가 비추며 TV에 떠올랐다. 부산, 대구, 대전, 광주…… 그리고 인천 쪽으로 넘어갔을 때였다.
- 이름이 외자네요?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어요.”
- 젊네요. 그런데도 경력은 꽤 화려하네요? 자격증도 많고.
“원래 저희 집안이 음식점을 하거든요.”
- 그렇군요. 그래서 한청 씨는 뭘 잘하죠?
“아, 잘하는 건…… 굳이 얘기하면 한식을 잘해요.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게 싫다는 건 아니고요.”
심사위원의 얘기에 당차게 대답하는 여자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 모습이 살짝 얄밉기도 했지만, 심사위원은 그저 웃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곤 손을 움직여 서류에 두 글자를 써넣는다. 합격. 그렇게 십여 분간 비추던 1차 예선 상황을 끝내고, TV 화면에는 로고가 떠오른다. 서 셰프와 함께 하는 <맛있는 도전>. 심장을 울리는 듯한 음악 소리와 함께 화면이 바뀌고, 화면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빠암……빰……빠밤……. 트롬본 소리와 함께 피아노 건반을 뒤쫓아 첼로 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스튜디오 안이 밝아져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러선 더 이상 밝아지지 않고. 발소리가 울린다 싶더니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음식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존재 또한 발견하게 될 터입니다. 이는 사람이라면 단 한 명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동등한 기회와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돈이 많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먹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잔뜩 무게를 잡은 한진석이 깔끔하면서도 심플한 정장 차림으로 말하고 있었다.
“인류는 여러 분야에서 계속해서 도전해왔습니다. 신학과 예술, 철학과 과학, 의학과 건축.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실패를 주춧돌 삼아 끝없이 도전한 결과 우리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시대를 열어젖히고, 이제껏 없었던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우리 인류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준 도전이 있습니다.”
한진석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채 선언했다.
“오늘부터 우리는 다시 한번 도전하려 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위대한 도전. 서 셰프와 함께 하는 ‘맛있는 도전’!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방송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시, 십칠 프로 넘어갑니다!”
모니터룸을 울리는 외침에 모두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소리친 당사자, 김성희 조감독이 울먹이며 바라보는 모습에 신현정 PD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수고했어, 신 피디.”
이종무 CP는 흡족하다는 얼굴로 카드부터 꺼내 들었다.
“오늘 끝나고, 회식하도록 하지.”
“꺄아아악! CP님! 사랑해요!”
박신영 작가가 방방 뛰는 모습에 이종무 CP는 낄낄거렸다.
“신혼이라며? 자꾸 그렇게 늦게 들어가면 남편이 싫어하지 않아?”
“아이, 왜 그래요? 우리 남편은요, 그런 저를 사랑하는 거라고요.”
“그런 저? 술꾼을 말하는 건가?”
“흐흐흐. 술은 남편보다 제가 더 세거든요. 그래서 더 좋아하는 거고요.”
“와, 알고 보니 박 작가 남편은 보살이었네, 보살.”
주거니 받거니 웃고 떠드는 그들을 보며 신현정 PD 역시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아직 방송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현재까지의 시청률은 17%. 물론 자체 분석에 불과하지만, 오차 범위는 그다지 크지 않다. 설사 많이 틀린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고. 방송이 나가고 있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 기사들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점령하다시피 한 단어들이 모든 걸 대변해 주고 있으니까. 맛있는 도전, 갓솁, 한진석, 서진영, 예선, 머랭…… 등. 상위에 올라 있는 단어들은 모조리 <맛있는 도전>과 관련된 검색어뿐이었다. 그만큼 화제성이 높다는 얘기. 이 정도면 굳이 시청률을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터였다. 더군다나 지상파도 아닌 케이블이란 걸 감안하면 더없이 고무적인 일이다. 하기야 17%나 되는 시청률부터 경이롭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상파라면 그다지 많다고 하기 어려울 터. 하지만, 케이블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요즘 케이블 방송사들도 나름 선전하고 있다지만, 이 정도 수치면 사실상 30%를 넘겼다고 보는 게 맞을 터다.
“일단 첫 테이프는 제대로 끊었고. 이젠 롱런만 남은 건가?”
이종무 CP의 말대로였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으나,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누구 한 명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첫 방은……. 대박이었다. *** PD로 입봉하고 나서 10년.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페셔널.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의 책임 프로듀서인 김철수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꿀꺽. 마른침을 침을 삼키며 그가 중얼거렸다.
“이, 이 프로?”
무슨 음료 이름도 아니고……. 한때 삼십 퍼센트까지 육박했던 프로그램이, 자신이 맡은 지 불과 3개월도 채 되지 않아서 폭삭 주저앉았다. 한마디로 폭망. 이래서야 자존심을 지키는 건 둘째치고 자신의 목이 위태롭다.
“크윽!”
이를 갈아붙이는 김철수 PD. 그는 신경질적으로 돌아섰다. 그러면서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 이게 다…….’
자신의 실력은 생각지도 않고, 누군가 탓할 상대를 찾기 시작하는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올라 있는 상태였다. 신현정과 서진영. 이제 그에게 있어서 두 사람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정작 그 둘은 그의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 SBC의 노경환 PD는 다른 때와는 달리 혼자서 방송을 모니터 중이었다. 왜? 이미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고, 방송이 끝났을 땐 확실해졌다. 짐작대로였다. 자신이 연출한 방송…… <혼저왕 먹읍서>는 선전했다. 그것뿐이었다. 그저 선전했을 뿐, 판을 뒤집지는 못했다. 이번 주 방송이 나가기 전, 누군가는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가 망가진 걸 축하하며 <혼저왕 먹읍서>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말하기도 했지만……. 그가 보기에 그 소리는 개소리였다. 어째서 지금의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가 급락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그 원인은 명명백백하거늘. 물론 덕분에 그간 <혼저왕 먹읍서>가 꿀을 빤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왕이 떠나 성을 차지한 광대의 슬픈 몸놀림에 불과하다는 걸 모를 노경환 PD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금요일, 황금시간대의 승자는 <맛있는 도전>. 그나마 십 퍼센트대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는 <혼저왕 먹읍서>는 아마도…….
“병가지상사 아니겠는가.”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번 분기가 끝나면 편성에서 빠질 수밖에 없음을 예감하며, 노경환 PD는 두 사람을 떠올렸다. 먼저 신현정 PD. 예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이젠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맞수. 아니, 이젠 왕좌를 탈환하기 위해 도전해야 할 챔피언. 그녀를 떠올리자, 차갑게 식었던 심장에 뜨거운 피가 휘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서진영. 요리 프로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예능에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카드임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해야 하는 일은 분명해진다. 노경환 PD의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다음 프로에서 서진영을 섭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 회장실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근래 들어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 비서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어쩜 이렇게 이쁠까?”
진심으로 기뻐하는 김진숙 회장의 목소리에 박 실장이 간만에 환한 미소를 머금는다.
“인터넷에 이런 말이 떠돌더군요.”
“응? 어떤 말?”
“갓솁이 갓솁한다……는 말이요.”
“갓솁이 갓솁해?”
되묻고 있었지만,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아니었나 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진숙 회장이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우리 서 셰프가 물건은 물건이야, 그치?”
“그런 서 셰프의 진가를 일찌감치 알아보신 회장님의 눈이야말로 보배인 거죠.”
“호호호. 지금 아부하는 거야?”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호오, 팩트라 이거지?”
농담처럼 묻고 있었지만, 자부심이 넘치는 음성이었다.
“그저 감복할 뿐이죠.”
“좋아, 좋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계속되는 박 실장의 아부성 발언에 그저 좋아라 할 만도 하련만, 김진숙 회장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고심하는 눈치다. 그걸 또 알기에 박 실장은 마음 놓고 농을 치는 걸 테고.
“지난번에 말씀하신 계획을 좀 더 앞당기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계획이라…….”
이미 수립해놓은 계획이었다. 오케이만 떨어지면 바로 실행에 옮겨도 될 만큼. 게다가 서진영에게도 반쯤은 승낙을 받아놓은 상태.
“시기상조는 아니겠지?”
“가치가 더 올라가면 회장님보다 먼저 낚아채려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흥! 그런 떨거지들한테 뺏길 순 없지. 그렇긴 하지만…….”
“서 셰프도 관심이 아주 없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이쪽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푸시하면 못 이긴 척 넘어올 공산이 큽니다.”
“그래?”
김진숙 회장이 흐뭇하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사실 그녀는 예전부터 연예 사업에 관심이 많았더랬다. 오죽하면 3년 전에는 일본계 자금으로 설립된 영화관 체인을 통째로 인수하려고 물밑 접촉을 했을까. 안타깝게도 자금 부족으로 다른 기업에게 뺏기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한 건 아니었다.
“앞으로의 시대는 그저 물건만 잘 만들고 잘 파는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어. 대중들이 원하는 걸 미리 알고 파고들어야 하는 거지. 그러기 위해선 좀 더 가까이 갈 필요가 있지. 그러기에 가장 좋은 건 누가 뭐래도 콘텐츠고.”
방송 끝물에 흘러나오는 예고편을 바라보던 김진숙 회장이 TV 화면에 보이는 서진영을 향해 더없이 기껍다는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기업의 체질을 바꿔야 해.”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가볍게, 그리고 규칙적으로 두들기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서 셰프라면, 그 시작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어느새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김진숙 회장이 턱을 살짝 치켜들곤 결정을 내렸다.
“박 실장. 잘할 수 있지?”
“염려 놓으십시오. 제 영혼을 탈탈 털어서라도 서 셰프의 마음을 붙잡겠습니다.”
“믿을게.”
당사자인 서진영이 들었다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길길이 날뛸 만한 대화였지만, 김진숙은 만족한 눈치였다. 그녀가 TV를 보면서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이젠 우리 서 셰프도 셀럽이라고 할 수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