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시작합니다. (1)2021.10.24.
가로수길 어귀의 작은 바. 예전 같으면 박유나의 가게에서 만났겠지만, 그녀가 임신을 하면서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이처럼 생소한 곳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요즘 유나 씨는 어때?”
고민준의 물음에 신현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곧 산달.”
기껏 쥐어짠 화제인데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게 두텁다는 증거일 터다. 잠시 말을 않고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고민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곤 신현정을 불렀다.
“현정아.”
“…….”
“면목 없다만…… 미안하다.”
맨정신에 이 말을 하기가 왜 그리 어렵던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단지 술을 마셨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말에도 신현정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술잔만을 바라보다가 다소곳한 목소리를 흘린다.
“형. 그때 생각나?”
이번엔 고민준이 대꾸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신현정은 계속해서 얘기했다.
“그때 말이야. 방송제 때 기껏 섭외했던 가수가 펑크내는 바람에 대타 찾겠다고 형이랑 나랑 그 빗속을 뛰어다녔던 거.”
“……너 2학년 때 말이지?”
고민준은 아스라이 떠오르는 기억에 눈이 가늘어진다. 기억하다마다. 남들 눈에는 어찌 보일런지 몰라도, 대학의 방송도 방송. 비록 교내에서만 전파가 흐른다지만, 방송 자체가 엎어지는 불상사는 없어야 한다. 방송이란 철저한 시간 엄수라는 약속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때는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했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그때, 부장이었다. 나름 유구한 전통을 가진 방송반. 그것도 타 학교를 대상으로 일 년간의 성과를 보여주는 방송제. 자신의 대에서 방송사고를 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펑크를 낸 초대손님을 대신할 게스트를 찾기 위해서.
“아무라도 좋으니, 무조건 섭외부터 하자는 내 말에 넌 끝까지 반대했었지.”
돌이켜 생각하면 절박하기는 자신이 더 절박했을 텐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건 오히려 그녀였었다.
“사실은 그때…… 나 좋았어.”
“……?”
“형이랑 같이, 그 고물차를 몰고 방송국을 돌던 거 말이야.”
“선배들이 지금도 가끔 얘기하긴 하더라. 너, 그때 눈이 반쯤 돌았더라고.”
“……아니, 그런 거 말고. 형이랑 그 빗속에서 차 안에 있는데…… 방송은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형이랑 같이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하는 것도 좋았고, 그런 와중에도 전혀 망할 것 같지 않은……. 이상할 정도로 믿음이 가던 것도. 그게 그렇게 좋더라고. 형 때문이었을 거야. 생각해보면 늘 그랬지. 내 곁엔 형이 있었어.”
“……현정아.”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야. 방송이 진심으로 좋아졌던 게.”
“…….”
“형.”
“……왜?”
“항상 고맙게 생각해.”
그녀의 갑작스러운 얘기에 고민준은 끙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안 그래도 불편한 마음이었다. 망할 윗대가리들이 잘나가던 방송을 망쳐버린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하필이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그런 식으로 쳐내버린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발단이 되었을 터다. 요즘 들어 회의가 들었다. 그 결과 고민준은 어렵사리 올라간 본부장 자리를 내려놓고서 KBC 방송국을 떠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신현정이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마.”
“후우.”
“나 지금 좋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야.”
또다시 말이 없어진 고민준. 그에게 신현정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더없이 맑은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 이제야 비로소 홀로서기를 시작하려고 해.”
“……!”
“그러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줄 수 있지?”
한 템포를 두고 고민준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너라면……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그의 말에 신현정이 싱긋이 웃어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뭐라고 말하기 어려워 머릿속으로 수없이 많은 단어들을 떠올리고 또 삼키던 끝에 고민준은 물었다.
“내일모레라고 했지? 첫방이?”
어렵사리 꺼낸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간단히…… 그러나 더없이 밝은 음성으로 튀어나왔다.
“응.”
그녀의 옅은 미소가 보기 좋아서 고민준은 어쩐지 대견해졌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을 묵직하게 누르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축하해.”
“아직 방송 전인데?”
“그럼 뭐…… 미리 축하하지 뭐.”
멋쩍게 대꾸하는 고민준을 신현정이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방송 이틀 전. 누군가에겐 의미 없는 카운트다운이겠지만, 또 누군가엔 꽤 의미 있는 일일 수 있었다. 그중에는, 우습게도 방송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또 TV에서 놈의 얼굴을 봐야 하는 건가?’
한숨을 쉰 강윤식이 눈을 가늘게 해 보였다.
‘그나저나 정말 우연일까?’
점심식사를 마치고 난 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서 든 생각이었다.
‘광고를 제안하기도 전에도 차였다고 했지 아마?’
의아하기만 하다. 일이 푼도 아니고, 적게는 수천만 원이고 많으면 억대를 가뿐히 넘기는 출연료다. 그런데도 서진영은 광고출연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지난해 아버지조차도 모르게 비자금을 털어 출자한 회사였다. 지분 55%를 해외에 있는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취득하고 실질적인 지배력을 손에 쥔 회사는 꽤 전망이 밝았다. 스타트업이라고 하긴 뭐해도, 기술력은 상당했고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하드웨어까지 갖춘 회사였으니까. 앞으로 삼한 전자에서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 데 일조할 회사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튼, 사실상 자신의 회사나 마찬가지인 한서 사운드를 통해 서진영에게 광고출연을 제의했건만……. 설마하니 그걸 걷어차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신기라도 있는 걸까?”
자신의 중얼거림에 강윤식은 픽하고 웃고 말았다. 역시 꼼수는 안 된다는 것이군. 물론 안 돼도 그만이란 마음으로, 가볍게 내지른 잽이었지만……. 강윤식은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난번처럼 훅도 안 된다. 슬쩍 잽도 질러보았지만 이조차도 통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한 방을 준비하는 수밖에. 카운트가 될지 어떨지는 몰라도, 몸통을 노릴 수밖에는 없지. 강윤식의 입가에 비릿하다 못해 잔인해 보이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는 놈은 역시 매가 답이지.”
그의 머릿속에 강형식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촬영 다음 날 저녁.
“지금 막 도착했어.”
- 그래? 그럼 이제 끊어야겠네.
차를 몰고 오는 길, 강형식에게 걸려온 전화. 녀석과 대화를 나누다가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러 끊고자 했다.
“아무튼,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 오케이, 하연이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그래.”
끊으려는데, 녀석이 날 부른다.
- 마!
“……?”
- 너무 긴장타지 말고. 아버님도 마음에 드셔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끙. 말이라도 고맙네.”
- 자식이. 잘해라, 끊는다.
녀석과 전화를 끊고 나서 방금까지 강형식이 얘기한 한서 사운드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이내 접어버렸다. 하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머릿속은 멍하고 점차 입안이 말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살짝 정신 나간 놈처럼 굴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잠시 후, 빌딩 최상층에 이르러 내린 뒤.
“예약하셨나요?”
“예? 아니요.”
“그럼 일행이 있으신 건가요?”
“예.”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서진영이요.”
“여기 있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서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가게 안 깊은 곳 창가 자리였다. 그곳에 앉아 서버가 가져다준 물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후우, 긴장해서 그런지 자꾸만 목이 간질거렸다. 돌겠네, 진짜. 어제 방송 촬영을 한 것도 좋았고, 저녁 식사까지 끝낸 뒤 저택을 떠난 것도 좋았다. 오는 길에 본 옥외광고판에 모레 방송할 <맛있는 도전>의 1회분 예고가 흘러나오자, 왠지 길조처럼 느껴져 흐뭇한 미소까지 지었더랬다. 그랬는데……. 떨린다. 자꾸만 입술이 마르고, 입안은 텁텁해서 아무리 물을 마셔도 좀처럼 진정되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몇 초에 한 번씩 레스토랑 입구 쪽을 흘깃거리는 게, 내가 생각해도 정상은 아니다.
젠장. 나도 모르게 잇소리를 내며 내려다보니, 다리까지 떨고 있다. 아, 서진영. 너 왜 그러냐?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난 잘할 수 있어!’라고 외쳐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신만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하연의 얼굴을 떠올려보기도 하지만 다 소용없었다. 긴장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한숨이 흘러나올 따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더디기만 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드르륵. 입구에 이하연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밀리며 넘어갈 듯 흔들거렸지만, 그런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하연.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들어오는 노년의 신사…… 아마도 그녀의 부친일 이상훈 사장 때문이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방금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에 이른 이하연이 물어왔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쉽사리 대답이 튀어나오질 않는다.
“예? 아, 예……. 저도 지금 막 왔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대답은 했다. 그러곤 급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서진영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소. 이상훈이오.”
내게 내밀어진 손을 재빨리 잡자, 가볍게 악수를 마친 이상훈 사장이 자리를 권했다.
“앉읍시다.”
“예!”
“내가 번거로운 걸 무척 싫어하는 성격이라 여길 골랐는데, 괜찮지요?”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솔직히 여길 와보곤 말해서 놀랐다. 당연히 밀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레스토랑 안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었던 것이다.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라서 전망은 좋았지만, 대신 너무 트여있어서 민망할 정도다. 물론 그저 그런 약속이라면 그게 뭔 대수겠느냐마는. 지금처럼 한없이 어려운 자리라면, 이런 것도 부담이 된다. 그럼에도 난 별거 아닌 척해야만 한다는 게 더 문제고.
“괜찮습니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고, 좋습니다. 다만, 좀 놀라긴 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상훈 사장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숨기는 것도 없는데, 굳이 사람들 눈을 의식할 필요는 없지. 사적인 자리는 차라리 이편이 나을게요. 뭐, 회원제라서 여기 드나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경조차 쓰지 않을 터지만.”
“그렇군요.”
간신히 대꾸했을 때, 서버가 와서 주문을 받는다.
“식전이지요?”
“예.”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너무 거하게 먹기는 그럴 테고……. 간단히 먹고 술 한잔합시다. 괜찮겠소?”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지금 말을 입으로 하는지, 코로 하는지 모를 정도였지만 이하연이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는 걸 보면 잘하고 있다고 믿어도 되는 거겠지.
“난 이걸로 하지.”
이상훈 사장이 주문하고, 이하연까지 자신이 먹을 음식을 고른 뒤 내가 말했다.
“같은 거로 주세요.”
하아……. 바늘방석이 따로 없다. 요리사라는 직업을 가진 놈이 기껏 한다는 소리가 같은 거로 달라니.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이상훈 사장이 말했다.
“요즘 TV에서 자주 보이던데…….”
음,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에선 하차한 지 오래니까 광고 쪽이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서 셰프의 선택’이라고 하던가? 브랜드 런칭이 꽤 성공적이라지요?”
어? 이상한 쪽으로 파고들어 온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내가 뭐 죄지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당당하게 나가는 거다, 당당하게. 그게 날 믿고 이 자리까지 나온 이하연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지.
“그렇다고 하더군요. 매출이 나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나도 그렇게 들었어요. 올 상반기 매출만 놓고 평가하긴 어렵겠지만, 내년이 오기 전에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 한데 말이오.”
“……?”
“애초에 그 브랜드……. 삼한 쪽에 제시한 게 서진영 씨라고 들었소만. 맞소?”
“음,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레시피를 가진 걸 알고선 강형…… 강 실장 측에서 먼저 제의를 해왔습니다.”
“그런 거요? 아,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 말고요. 그저 궁금해서 물은 것이니.”
혹여 이쪽으로 깊이 파고드는 거 아닐까 걱정했는데, 얘길 들어보니 그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저 스치듯 물은 것 같아서 마음을 놓고 있었다.
“예.”
그래서 편하게 대답했는데…….
“듣기로는 2차로 신제품 출시까지 계획 중이라고 하던데, 하나만 물읍시다.”
응? 아직도 이 얘기가 안 끝난 거야? 마른 침을 삼키며 얘기에 집중했다.
“말씀하십시오.”
그런 날 이상훈 사장이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어왔다.
“그 브랜드 말이오. ‘서 셰프의 선택’가 해외로 진출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겠소?”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어째서 그런 질문을 나한테 하는 건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는다. 살짝 당황해서 이하연 쪽을 바라보자, 그녀 역시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이거……. 지금 날 시험하시는 거 같은데? ……뭐, 자신의 딸이 데려온 남자니까, 또 집안 자체가 사업가 집안이니 그거야 그럴 수도 있다지만, 그 대상이 나라는 시점에서 이미 번지수를 잘못 고른 거 아닐까? 난 요리사이지, 사업가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곧이곧대로 ‘그런 건 전 잘 모릅니다.’라고 대답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함부로 떠들어댈 수도 없고. 마른 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머릿속에 나레이션이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