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오디션 3차 예선 (1)2021.10.17.
스튜디오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지나서였다. 지난번 오디션 때와는 달리 이번엔 혼자였다. 한청과 함께 올 수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모르는 의혹을 피하기 위해서다. 오디션이 3차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자칫 특혜라도 준다는 인식을 줄 수도 있었으니까. 방송국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한청이 와있었다. 긴장했는지 녀석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오디션 출연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칠 때, 간단히 손만 들어서 아는 척하곤 스텝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왔어요?”
가장 먼저 날 반갑게 맞이한 것은 한진석이었다.
“일찍 왔나 보네요?”
“저도 얼마 안 됐어요. 차가 좀 막히더라고요. 요즘 부쩍 느끼는 건데, 차가 많아진 느낌이에요.”
“서울이 다 그렇죠.”
손수 차를 몰고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솔직히 요즘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차가 막히는 거 같다는 그의 말은 크게 와닿지 않는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 그래도 오늘처럼 갑자기 차가 막히기 시작해 도로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때면 차라리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음엔 지하철 타고 올까 싶기는 해요.”
“에? 사람들 시선은 어쩌고요?”
한진석이 뜨악한 표정으로 묻길래 피식 웃어 보였다.
“저 알아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요.”
“에이, 그건 아니죠. 요즘 갓솁이 얼마나 핫한데요.”
한진석이 손까지 내저으며 과장되게 말하고 있을 때, 박신영 작가가 다가왔다.
“둘이 뭔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요?”
“아, 오셨어요?”
“흐흐흐, 원래 우리가 친하잖아요.”
“아우, 부러워라. 나도 좀 끼워줘요.”
그렇게 살갑게 구는 박신영 작가와 함께 셋이서 한참 동안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스튜디오 한쪽이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저만치에 신현정 PD가 보인다. 그녀를 확인한 한진석이 움찔하더니 눈알 굴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신현정 PD를 두려워하는 눈치다. 하여간 이 양반은 이상할 정도로 신현정 PD를 어려워한다니까. 그가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을 보며 박신영 작가와 눈을 마주치곤 웃고 있는데, 신현정 PD가 다가왔다. 한데, 그 뒤에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보인다. 그중에 남자 쪽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인사하시죠. 오늘 출연하실 분들이에요.”
신현정 PD의 소개와 함께 남자 쪽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류승렬입니다.”
이미 오늘 방송에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심혜미예요. 오늘 잘 부탁드려요.”
나와 한진석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중년 여자는 요리연구가였는데, 한식에 특화되어 있었고 그중에서도 궁중요리 쪽으론 국내 최고라 해도 무방하단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한진석이 겸양을 떨며 얘기하고 나자, 얼추 인사는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류승렬이 살갑게 우릴 대한다.
“형!”
“흐흐흐. 승렬이, 오랜만이네? 너, 저번에 상 타는 거 봤는데. 요즘 너무 잘나가는 거 아냐?”
“참네. 형이야말로 연예대상 받으셨잖아요!”
한진석과 류승렬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를 치켜세우는 걸 보다가 웃고 말았다.
자신의 분야에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마치 한동네에 오래 살며 형·동생으로 지내온 듯한 같은 모습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져서였다. 역시 방송이고 뭐고 간에, 편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만큼은 좋은 일은 없는 듯하다.
“심사 제대로 해라.”
류승렬에게 엄포 아닌 엄포를 놓자, 녀석이 씨익 웃어 보인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제가 음식을 못해도, 먹는 거 하난 진짜 잘하거든요.”
***
“아주 오래전부터 우주와 인간을 고찰하여 지금까지도 힌두교의 경전 <베다>에 의해 전승된 고대 인도의 전통의학이 있습니다. 예,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아유르베다인데요. 그 아유르베다에서 이런 말이 전해져옵니다.”
큐카드를 들고 매끈하게 멘트를 이어가는 한진석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전문가다운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식사법이 잘못되었다면 백약이 소용없고, 식사법이 옳다면 백약이 필요 없다.”
대부분의 조명이 꺼져 있는 어두운 스튜디오 안. 유일하게 한진석이 서 있는 곳에만 떨어져 내라는 조명빛 아래, 그가 마치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처럼 말을 이어간다.
“그렇습니다. 음식은 그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섭취해야만 할, 단순한 에너지원만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전부터 먹기 위해 사는 건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 건지를 두고 논쟁 아닌 논쟁을 이어온 건지도 모르죠.”
그가 걸음을 내디뎌 한쪽으로 물러나며 친근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갓솁과 함께하는 <맛있는 도전>. 오늘도 시청자 여러분의 관심 속에서 열정적으로 요리의 세계를 파고들 오디션 참가자분들을 모셔봅니다.”
팟! 팟! 팟! 조명이 켜지며 스튜디오 안이 카메라에 담긴다. 짝짝짝짝. 저번과 달리 이번엔 방청객까지 와있는 상황.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들리며 장내에 오디션을 위해 참가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 64명. 오늘 이들 중 절반이 떨어지고 32명의 참가자들만이 다음 예선에 오르게 될 터였다. 그래서인지, 다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런 그들을 보곤 한진석이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오늘도 선전하시길 기원하며, 소개합니다. 갓솁! 서진영 셰프입니다!”
방청객들은 물론이고 오디션 참가자들까지 스튜디오가 떠나가라 소리치는 가운데, 스튜디오 한쪽에 드리워져 있던 커튼이 젖혀지며 그곳에서 서진영이 걸어 나왔다.
“갓솁! 갓솁! 갓솁!”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이들을 한차례 둘러보던 서진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말했다.
“되게 어색하네요. 이러는 거…… 짜고 치는 거 티 나지 않아요?”
그의 말에 킥킥거리던 한진석이 웃음을 억지로 삼키곤 멘트를 던진다.
“예예. 민망해서 어찌할 줄 모르는 갓솁입니다. 이런 말, 좀 웃기긴 한데요. 숫기 없는 모습…… 귀엽죠?”
예----! 방청객들이 좋아하라 대답하자, 한진석이 신나서 덧붙였다.
“요즘 대세이면서도 그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거 같은데요. 흠, 모솔이라 그런가? 어? 다들 모르셨어요? 우리 서진영 셰프…… 아직 솔로예요. 맞죠?”
서진영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급기야 한숨까지 쉬던 그가 눈을 반짝이는 한진석, 아니 방청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아뇨. 저 애인 있는데요?”
*** 어이가 없다. 누가 그래? 내가 솔로라고? 대본에도 없는 애드리브를 치는 한진석 때문에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감하거나 하진 않는다. 다만, 이래도 되나 싶어서 박신영 작가를 바라보았지만……. 얼씨구? 뭐가 그렇게 웃긴지 깔깔거리며 손뼉을 치고 있다. 게다가 신현정 PD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문 채 흥미롭게 날 바라보는 중이다. 헛참. 그렇게들 나온다 이거지? 난 스스럼 없이 얘기했다.
“저 사귀는 사람 있어요.”
연이은 고백에 한진석이 정말? 하는 얼굴이 된다.
“재미없는 얘기는 이쯤 해두고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실 테니, 얼른 오디션부터…….”
“와우!”
뭐야, 저 반응은? 한진석이 눈이 동그래져서 외치고 있다.
“방금 그 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실 만한 발언이란 건 아시나요?”
“하아, 이쯤 해두죠? 누가 제 연애사를 궁금해할 거라고 자꾸만 이러는 건지.”
“아니죠! 무려 갓솁 아닙니까? 당연히 관심 있어 하죠. 아니, 지금쯤 대한민국의 수많은 미혼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제가 장담하는데요, 이거 방송 나가면 바로 실검에 오를 게 분명합니다.”
웃기는 얘기다. 실검에는 개나 소나 오르나. 참네, 남의 연애사에 왜들 그렇게 관심들이 많은지. 뭐, 한진석의 말처럼 이슈가 될는지도 모르고 그 때문에 구설수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있으면서 없는 척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괜히 나 때문에 이하연이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큼, 이미 룰은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쏠린 얘기를 계속해서 끌고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한진석은 말할 것도 없고 박신영 작가까지 내 연애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지만, 알게 뭐람. 난 단호하게 선을 긋고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오디션을 위한 과제를 제시하면, 참가자들은 주어진 시간 내에 요리를 완성해야 합니다. 만일 완성하지 못할 경우엔 이유 불문하고 탈락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리를 완성한 것만으로 예선을 통과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 그럼, 요리를 완성하고도 떨어질 수 있는 겁니까?”
한진석의 질문에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뒤 얘기했다.
“당연하죠.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이어진 후 그 자리에서 바로 당락이 결정됩니다.”
내 얘기에 한진석이 요란한 제스처를 취하더니 기대 가득한 눈빛이 되어 소리쳤다.
“오늘, 갓솁을 도와 참가자들의 요리를 심사하실 분들을 모십니다! 이미 수많은 매체를 통해 소개되신 분으로 알고 계신 분들도 많으실 텐데요. 궁중요리의 대가이신 송암 최연실 선생님의 수제자이며 현재 한국요리연구회 회장이시기도 한 20년 경력의 요리연구가이십니다. 심혜미 씨입니다!”
짝짝짝짝!
“이어서…… 떠오르는, 하아 진짜 이 수식어는 대체 몇 년이나 따라붙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한국 영화계의 빛나는 신성! 찍었다 하면 천만은 가볍게 넘겨버리는 충무로의 블루칩! 와일드한 로맨틱 가이, 배우 류승렬 씨!”
다시 한번 박수가 터지고, 요리연구가 심혜미에 이어 류승렬까지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습니다, 두 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예, 오늘 두 분께선 갓솁을 도와 오디션 참가자들의 심사를 하시게 되는데요. 심혜미 요리연구가님, 떨고 있는 참가자들한테 한마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은은한 미소와 함께 심혜미가 앞으로 나서는 게 보인다.
“막상 와보니 제가 다 떨리네요. 그치만 너무 얼어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어머니들이 가족들 음식 만들 때 떨지는 않잖아요? 그냥 편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내 식구들한테 맛있는 밥 한 끼 만들어준다는 심정으로요.”
“워우! 진짜 좋은 말씀이네요. 자, 그럼…… 류승렬 씨? 오늘의 포부는?”
“아, 진짜! 왜 저는 그런 거 시키는 겁니까?”
평소 성격처럼 울컥하는 류승렬. 하지만, 그도 잠시. 녀석은 밝게 웃더니 호쾌하게 얘기한다.
“저 오늘 진짜 기대 많이 하고 왔거든요? 어제저녁부터 쭉 굶은 상태고요. 그러니까, 부탁드려요! 맛있는 거 많이 해주세요!”
크크큭. 녀석답다. 난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을 받았다.
“오늘은 팀플로 가겠습니다.”
한진석이 호들갑을 떨며 격하게 반응한다.
“오오! 팀플! 기대되는군요!”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한 팀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간단한 추첨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사전에 얘기를 들었던 터라 당황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긴장감을 떨치지 못하겠는지 장내가 소란스러워진다. 그러길 한참. 스텝들이 작은 상자를 들고 스튜디오 안을 누빈지 십여 분 후 참가자들의 손에는 숫자가 쓰인 공들이 들려 있었다.
“1번, 32번.”
“67번, 24번.”
“123번, 21번.”
연이은 호명에 따라 팀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한팀이 된 이들이 짝을 지어 같은 조리대 앞에 서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다가 마침내 도합 32개의 팀이 각자의 자리에 섰을 때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요즘 환절기라서 그런가, 부쩍 주변에 감기드신 분들이 많아 보이더군요.”
“응? 알았다! 오늘 주제는…… 보양식?”
한진석이 눈을 빛내며 묻길래 가볍게 웃어주었다.
“과제 드리겠습니다. 어떤 재료를 쓰시든 상관없습니다. 도구도 마음껏 쓰십시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음식이든 괜찮습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 겨울을 나며 약해진 체력을 북돋아 줄 요리를 만드십시오. 시간은 한 시간 드리겠습니다.”
삐-익! 버저 울리며 오디션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