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다 가질 순 없다. (3)2021.10.15.
어이가 없네. 간만에 들려온다 싶었더니, 다짜고짜 ‘거절해’란다. 대체 뭔 생각인지……. 황당했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레이션이 그렇게 얘기하는 이유나 좀 알자는 생각에. 따라라라, 라라……. 인간X극장의 BGM과 닮은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나레이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 서진영은 잊고 있다. 강윤식이라는 존재를. 여러 이유로 인해 한발 물러나 있지만, 여전히 그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듯 보인다. 흠칫.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덫?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레이션이 엄중히 경고해왔다. - 지금 박 실장이 제안하는 광고 계약은 표면 상으로는 삼한 그룹과 전혀 관계가 없는 회사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강윤식의 입김이 닿아 있다. 얘기는 생각보다 한참을 이어졌다. 하지만 그 설명에 비해 내용은 단순하다. 요는 결국 박 실장…… 정확히는 C 마트 계열사인 대일 기획을 통해 내게 제안해온 광고 계약 자체가 훼이크라는 얘기다. 일테면 속임수인데, 한마디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좋은 조건에 계약은 하지만 끝내 촬영은 파토가 나고 그에 대해 엄청난 페널티를 물게 될 거라는 얘기. 어떻게? 라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는다. 적어도 국내에서, 대기업의 힘이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범주를 넘어서 있을 테니. 법 뒤에서 벌어지는 일은 알아채기도 힘들고, 대처하기란 더욱 어렵다. 지금 나레이션이 알려주는 바도 그와 같다. 다시 말해, 함정에 빠지기 싫으면 애당초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말라는 뜻. 후우, 살얼음판이야 뭐야? 잊을 만하면 내 앞을 가로막는 강윤식. 나한테도 이런데, 강형식한텐 어쩔지. 모르긴 몰라도 시시때때로 함정을 파고 방해 공작을 하고 있을 터다. 그런데도 우는 소리 한번 안 하고 묵묵히 자기 길만 걸어가는 강형식이 기특할 지경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사라져버린 나레이션. 상념에서 깨어난 뒤 내가 말했다. 수화기 너머의 박 실장에게.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어쩌죠? 아시겠지만 요즘 많이 바빠서요. 방송 촬영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그렇다고 본업에 소홀할 수도 없어서……. 아무튼, 신경 써주시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 아닙니다. 바쁘시다는 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서 셰프님이 잘나가신다는 거니, 저희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겠죠. 아, 회장님께서 물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 왜……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매니지먼트 건에 대해서.
“아…… 그거요. 저어, 괜찮으시다면 며칠만 더 생각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 흠, 혹시 다른 데에서도 제안이 들어온 겁니까? 그렇다면 저희 쪽에서 보다 좋은 조건으로…….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한숨을 내쉬며 솔직히 말했다.
“잘 모르겠네요. 제가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 방송에 나가곤 있다지만,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방송인도 아니고. 괜히 헛바람만 든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해서요.”
- 그렇군요. 생각이 그러시다면 좀 더 숙고해보시죠. 저희야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 테니, 편하실 때 연락주시고요. 그럼.
전화를 끊은 뒤 머리를 긁적였다.
“슬슬 결정하긴 해야겠네.”
그건 그렇고.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강윤식은 내가 그렇게 미운 걸까? 아니, 그 남자의 눈에 나 따위가 들어오기나 할까 몰라. 아마도 강형식 때문에 나까지 견제하는 모양인데……. 참 더럽네. 기어이 몇만 원을 채워 넣어 천억을 만들어야 속이 풀리는 게 부자들의 속성이라고 하더니만. 가진 거에 만족하지 않고 남의 주머니까지 노리는 그 심보가 더럽기만 하다. 쯧, 그래도 뭐 나한테는 나레이션이 있으니까. 방금처럼 위험요소가 있으면 사전에 척척 알려주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인 거지.
“그래도 역시 더러워.”
기분이 참……. 생각난 김에 전화를 걸었다.
“어, 형식아.”
- 어딘데 이렇게 시끄러워?
“아, 운전 중.”
- 응?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보네?
“방금 광고 계약하고 들어가는 길.”
- 오오! 잘나가는데?
“뭘 또. 실없는 소리 말고. 너 혹시 한서 사운드라고 알아?”
- 한서? 거기 음향기기 제조 회사잖아? 왜? 거기서 너한테 뭐라고 해? 혹시 광고 찍재?
“그렇다고 하네.”
- 근데? 찍으면 되잖아?
“그게…….”
말끝은 흐리자, 녀석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 음……. 대충 알 만하군. 전화 끊어봐. 좀 알아보고 연락할게.
“이미 거절했어. 신경 쓰지 마. 너도 알아야 할 거 같아서 연락했을 뿐이야.”
한서 사운드와 강윤식의 관계를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대신 녀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나쁜 듯 느껴지는 웃음소리다.
- 더티한 새끼가 하는 짓도 구질구질하네.
“신경 쓰지 마.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데, 더러운 꼴 보지 않으려면 상대하지 않는 게 최선이잖아?”
- 크크큭, 맞는 말이네.
“하는 일은? 잘돼?”
- 대박이지.
“큰소리는.”
- 어어? 진짜야. 너 다음 달에 통장 확인해보면 기절할걸?
“그래, 그래. 열심히 해라.”
- 나참. 진짜라니까 그러네. 아, 안 그래도 연락하려던 참인데 잘됐다.
“……?”
- 2차로 출시할 상품 말인데. 광고 어떻게 할래? 장 상무님 말씀으론 이번 달 안에 찍는 게 스케줄 상 좋겠다고 하던데. 어떻게, 시간 되겠어?
“되고 말고 할 것 없이, 찍어야 하는 거 아냐?”
- 그렇긴 하지.
“그러면서 뭘 물어.”
- 뭐, 혹시나 모르니까.
“실없긴. 다음 주에 방송 촬영 있어서…… 그때만 빼곤 괜찮아. 알아서 스케줄 잡아봐.”
- 오케이. 그럼 그렇게 알고 진행하마.
바쁜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 그였다. 시간을 분 단위로 끊어서 쓰고 있는 강형식임을 알기에 섭섭하고 말고도 없었다. 그러나저러나, 이번에 강윤식이 장난 아닌 장난을 친 걸 알게 된 녀석이 괜스러운 짓이나 안 할는지 모르겠다. *** 전화를 끊고 나서 강형식은 침잠한 눈빛을 해 보였다. 그때, 문이 열리고 장동일 상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왜 그러고 있냐? 무슨 일 있어?”
원래부터 눈치가 백 단인 장동일 상무였다. 거기에 어릴 때부터 강형식을 보아온 터라 그의 신색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상치 않다고 느낀 것이리라. 강형식 또한 속내를 감출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방금 진영이랑 통화했거든요.”
“서 셰프?”
“예. 강윤식이 또 못된 짓거리를 하려는 거 같아요.”
잠시 그의 입을 통해서 사정 설명을 들은 장동일 상무가 쓰게 웃는다.
“어릴 땐 그렇지 않더니만.”
고개를 내저으며 혀까지 차던 장동일 상무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전화를 끊고 강형식에게 물었다.
“최명식이란 이름 들어본 적 있냐?”
“최명식이요?”
“그래, 현성 고등학교 나왔다고 하던데. 네 동창 아니냐?”
“아, 기억나요. 걔 아버지가 유명 가수라고 들었는데……. 그리고 엄마가 방송국 피디 출신이라고 했던 것도 같고.”
“것까진 잘 모르겠고. 한서 사운드 말인데……. 최명식이 대표이사로 등재되어 있더구나.”
“그래요?”
“근데 말이지. 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뭔가 냄새가 나네?”
“냄새라면……?”
“글쎄다. 최명식이 바지라는 느낌이 들어서.”
“어? 그 말씀은?”
“실제 주인이 따로 있을 거란 얘기지.”
장동일 상무의 말에 강형식이 눈을 반짝인다. 그러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재밌네요.”
어느새 강형식의 눈매가 날카로워져 있었다.
***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사, 다 가질 순 없는 거라고. 사람 욕심이라는 게 끝도 없어서, 한창 잘나갈 땐 모든 걸 가진 거 같고 또 가지고 싶어 하는 게 당연지사라 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난 그렇다. 이제껏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끝에 여기까지 올라와서인지는, 내 눈에 비친 세상은 핑크빛만은 아니다. 오히려 절반 이상이 잿빛. 빛과 더불어 공존하는 어둠은 포식자처럼 언제든 그 빛을 삼켜버릴 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욕심을 비워야 한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 억지로 일을 꾸미려 하지 말고, 순응하듯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 진영 씨가 괜찮으면…….
“난 괜찮아요. 그러니, 편한 대로 해요.”
- ……그렇게 말해주면 저야 고맙죠.
이하연의 목소리가 어째 힘없게 들린다. 뭔가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말을 해주고 싶지만, 당장 떠오르는 말도 없거니와 섣불리 말해서 그나마 붙잡고 있을 멘탈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 그럼, 아빠한테는 그렇게 얘기할게요. 내일모레 보는 거로 하자고.
“예. 그래요.”
- 진영 씨.
“……?”
- 미안해요.
“뭘요. 그냥 밥 먹고 얘기나 좀 나누고 오면 되는 거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알고 있다. 이하연의 아버지와 만나는 자리가 그리 편할 리 없다는 걸. 어쩌면 그 자리에서 이하연과 헤어지라는 말을 들을는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게 순리일 터. 그러고 나서야 난관이든 뭐든 헤쳐나가도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다 잘될 테니까.”
- ……예.
기운 없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 좀 울적하긴 하네. 참았던 숨을 몰아쉬곤 핸드폰에서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누나?”
- 어머, 진영아. 안 그래도 우리끼리 밥 먹으며 마음에 걸리던 참인데. 올 수 있어?
“아니, 요즘 너무 많이 빠져서 그건 좀 힘들 거 같네. 근데 왜 이렇게 늦게 저녁을 먹는 거야?”
- 아빠 퇴근할 때 맞춰서 밖에서 만났는데도 벌써 8시인 거 있지? 간만에 일찍 끝나신다고 해서 나온 건데…….
“그래? 많이 늦었네. 근데 지금 뭐 먹어? 좀 비싼 것좀 먹으러 가지? 간만에 가족들끼리 먹는 건데?”
- 얘는. 며칠 전에도 외식했는데. 기억 안 나? 그리고 돼지갈비면 차고 넘치지. 너도 있으면 좋을 텐데.
- 오빠아아앙! 오빠도 와! 같이 와서 먹자아아아!
- 가만있어. 누가 식당에서 소리 지르라고 했어.
- 잉! 언니는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그래.
- 어? 엄마가 바꿔 달라네?
- 진영이니?
“예, 숙모.”
- 밥은?
“먹었죠.”
- 그래. 아무리 바빠도 굶고 다니지 말고. 요즘 많이 바쁘지?
“그러게요. 여기저기서 많이 찾네요? 하핫, 그래도 기분은 좋아요. 그만큼 잘나간다는 거잖아요.”
실없는 소리다. 그럼에도 이렇게 얘기하는 건, 외삼촌과 외숙모가 좋아하실 거란 생각에서였다.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지만, 포기해선 안 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중에서 가장 값진 건…….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이사 갈 준비는 다 하셨어요?”
- 아직 하는 중이야. 막상 옮기려니까 짐이 많네.
“그러니까, 그냥 포장 이사 하시라니까요. 그리고 어지간하면 버리고 새로 사세요.”
- 어떻게 그래? 가족들 추억이 깃든 것들인데. 남의 손에 맡기는 것도 싫고.
“그렇긴 하네요. 아참, 삼촌은 요즘 어떠세요? 당뇨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죠?”
- 바꿔줄까?
“예.”
- 뭐한데, 나까지. 얼른 끊고 쉬라고 하지. 큼. 진영이니?
“예, 삼촌.”
- 이 녀석아, 너나 건강 조심해. 내 걱정은 말고.
“요즘 아침마다 조깅도 하고 운동 열심히 하니까 걱정 마세요.”
- 그럼 다행이고. 다음 주에 이사할 때 올 거지?
“될 수 있으면 그럴게요.”
-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 오빠! 꼭 와야 해!
수아의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래서 가족이 가족인 거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영원히 내 편인 사람들.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어릴 때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문제집을 살 돈을 어디서 구하나 고심하고 있을 때, 자고 일어나니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돈.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수연이 누나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이었다. 생일날 부모님 생각이 나서 울적해 있을 때, 이제 막 태어난 수아가 꼼지락거리다 뒤집었던 기억. 이상한 일이지만 그땐 그게 어찌나 신기하던지.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가슴이 뭉클거리고 가슴이 가쁠 정도로 두근거렸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집을 떠날 때 열두 번도 더 돌아보았던 기억이 난다. 다시는 못 돌아갈 것만 같아서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그때는 진짜 그랬다. 그래서 눈물을 삼켰었고. 그런 집이다. 한데, 이제 그 집을 떠나 가족들이 새로운 보금자리에 둥지를 트려고 한다. 기쁘지만, 한편으론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느낌. 쓸쓸하게 미소지으며 눈을 떴다. 내일부터 모레까지 하게 될 촬영. <맛있는 도전> 세 번째 촬영. 오디션 3차 예선을 떠올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