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다 가질 순 없다. (2)2021.10.13.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간만에 강 회장댁 가족들이 빠짐없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방에 난 창틈으로 바라보니 강형식도 보인다. 오랜만이네. 요즘 밤마다 갖는 술자리 때문에 아침은 거의 거르는 듯 보이더니.
“야, 쟤 오늘 왜 저러냐?”
준석이 형의 물음에 고개를 돌리는데, 나랑 눈이 마주친 한청이 잽싸게 시선을 돌리는 게 보인다. 속으로 웃음이 났다. 어지간히 궁금한가 보다.
“글쎄요. 속이 안 좋은가?”
“그래? 아까 밥 먹은 게 체했나? 청아, 너 괜찮아?”
“괘, 괜찮아요.”
한청이 준석이 형에게 대답하곤 날 째려본다.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 끄곤 주방 정리를 할 뿐이었다.
*** 아침 식사가 끝난 뒤에 주방에서 나왔기 때문에 달리 갈 데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강형식의 창고인지 차고인지 모를 곳까지 가는 것도 좀 그렇고.
“이럴 땐 좀 불편하네.”
그래도 여자애인데 숙소로 데려가 단둘이서 그 좁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도 내키지 않아, 결국 주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벤치에 한청과 나란히 앉았다. 녀석은 아까부터 말없이 날 바라보기만 한다. 궁금함이 가득한 눈빛. 평소 성격대로라면 대놓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만도 한데,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다.
“안 궁금하냐?”
내가 묻자,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궁금해서 미칠 것 같거든요!”
“아, 궁금하면 궁금하지. 소리는 지르고 난리냐.”
“갖고 노는 거 같으니까 그러죠!”
“아냐, 아냐. 그런 거.”
웃음을 참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곤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해 보였다.
“청아.”
“……왜요.”
삐졌나?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리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녀석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너, 광고 찍을래?”
순간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그러더니 더듬거리며 되묻고 있었다.
“과, 광고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김서연, 즉 KS 측으로부터의 제안은 이미 있었다. 지난번에 C 마트 광고를 찍은 후, 신정을 전후해서 광고가 나갔고 그게 또 이슈가 되었던 참이다. 물론 난 그때 신년 인사로 바쁘다 못해 눈코 뜰 새 없었던 주방일로 거기까지 신경 쓸 게재는 못 되었지만. 아무튼, 지난번 광고 촬영 때 만났던 김서연이 광고 컨셉이 잡혔다고 문자를 보내온 게 어젯밤이었다. 아파트 계약문제로 오이도를 다녀오고 이하연과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는 바람에 피곤해서 잠이 들었던 차라 아침이 되어서야 확인하긴 했지만, 보자마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무슨 광고인데요?”
한청이 관심 없는 눈치는 아니다.
“별건 아니고. KS 그룹 알지?”
“알죠.”
“난 잘 몰랐는데, 거기 테마파크? 뭐 그런 것도 하나 보더라고.”
“음……. 들어본 것도 같아요.”
“아무튼, 내가 이번에 거기 광고 찍을 거거든. 그런데 컨셉 보니까 딱 너만 한 여자애가 필요한 모양이더라.”
“응? 내 나이 또래의 연예인들도 많잖아요.”
“그렇긴 하지. 근데, 광고주…… 그러니까, KS 쪽에선 좀 더 신선 마스크랄지……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전문직 냄새가 나는 사람이 필요하다네? 거기다가 이왕이면 얼굴 좀 되고 시크해 보이면 좋다고 하더라고.”
“……그럼, 막 수영복 입고 워터슬라이드 같은 거 타는 거 찍는 건가?”
“그런 건 아냐.”
뭔 생각을 하는 건지. 갑자기 웬 수영복? 속으로 실소하며 나름 진지하게 컨셉을 설명해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컨셉은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었다. KS 그룹에서 남해 쪽에 새로 조성하는 휴양지는 ‘K랜드’라는 다소 성의 없는 이름만큼이나 컨셉 또한 중구난방이다. 뭐, 내가 보기엔 그렇다는 얘기다. 어쨌든, 테마파크 광고가 의례 그렇듯 이렇다 할 포인트 없이 유명세를 앞세운 모델들을 전면에 내세워 광고를 하겠다는 거였는데, 그러다 망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싶었다. 그래서 김서연에게 간단히 답을 보냈더랬다. 약속은 약속이니 광고는 찍겠다고. 그러면서 슬쩍 제안했다. 요즘 대세라고 할 수 있는 SNS를 부각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 연락이 없길래 까먹고 있었는데, 아침 식사 시간 전에 김서연으로부터 문자 한 통이 날아왔던 것이다.
“어떻게, 할래 말래?”
잠시 생각에 잠기는지, 한청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토닥거리며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불쑥 물어왔다.
“근데, 전 어떤 역할인데요?”
“글쎄. 저쪽에서는 커리어우먼을 생각하는 거 같던데……. 그런 거 있잖냐. 젊은 나이에도 나름 화려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삶에 지친 여자가 잠깐의 휴식을 갖고 활력을 되찾는다? 뭐, 그런 거.”
“웨엑! 식상해요!”
“그렇지? 내가 보기에도 그래.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건…….”
“…….”
“오히려 그 반대로 가자는 거지.”
“반대요?”
“응.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디딘 청춘이 고달픈 생활을 이어가다가 휴가철에 겨우 시간을 내서 휴가를 떠난다. 거기서 친구들하고 풀장에서 수영도 하고 놀이기구도 타다가 밤이 되면, 바베큐 파티? 그런 걸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지. 근데 여기서 포인트는…… 그 여자의 요리 실력이 엄청나단 거야. 보는 사람의 눈이 다 시원할 정도로 호쾌한 칼질과 함께 능수능란하게 바베큐 준비를 하고 음악과 웃음 속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춤추고 놀면서…….”
“힛! 재밌겠다! 그럼, 불 쇼? 그런 거 막 하면 되겠네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감독님께 한번 말해볼게. 근데, 얼마 받는지는 안 궁금해?”
“돈 때문에 하나요?”
헐. 있는 집 자식이라 그런지, 이런 부분에선 꽤 쿨하네. 아니 머리가 좋은 건가? 어떻게 보면 기회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니. 혹시 또 모르는 일이지. 이번 일을 계기로 한청이 잘나가는 방송인이 될는지도. 쯧, 생각해 보니 괜한 짓을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성실하게 자기 할 일을 잘하고 있는 애를 꼭 꼬드기는 거 같기도 해서. 하지만 녀석이 <맛있는 도전>에 참가한 것도 따지고 보면 방송에 출연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거니, 그녀에게도 나쁘진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넌 괜찮냐? 혹시 집에서 반대하거나…….”
“에이. 오빠도 참. 너무 구닥다리 아녜요?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누가 이런 기회를 거절해요? 엄마도 얘기 들으면 좋아하실걸요?”
“아, 그러냐?”
요즘 애들 생각을 알 수가 없다. 상관없지. 자기가 좋다는데.
“그럼, 일단 오케이인 거네?”
“예! 저는 좋아요.”
“그래. 그렇게 알고 저쪽에 말해놓을게.”
*** 양쪽이 관심을 가지니, 일은 일사천리였다. 일단 김서연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 프로필 봤어요. 나쁘지 않더군요. 단발이라 그런지 시크한 분위기도 좋고, 눈빛이 차분한 게 꽤 이지적으로 보이더군요. 그러면서도 요리 쪽으론 거의 천재인 듯하니 전문성도 갖췄고. 그 정도면 이슈몰이도 가능하겠어요. 근데, 그런 애는 어디서 찾은 거예요?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같이 일하는 애예요.”
- 아, 그럼…… 삼한 그룹?
“그렇기도 하고, 이번에 JTL에서 찍고 있는 방송 있죠? 거기에도 출연해요.”
- 그래요?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네요. 아, 그리고 말씀하신 컨셉도 좋은 거 같아요. 인플루언서를 전면에 내세우자는 거잖아요? 위쪽에 보고서 올릴 참인데, 모르긴 몰라도 좋아할 거라 봅니다.
“다행이네요.”
- 예. 다 서 셰프님 덕분이죠.
“뭘요. 그냥 생각나는 거 말씀드린 게 다인데요.”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난 뒤, 김서연이 내일쯤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후우, 좀처럼 쉴 새가 없네. 바쁜 건 좋은데, 뭔가 쫓기는 기분이 머리가 복잡해진다. 흠, 그렇게 생각할 것도 아닌가. 일이 없는 것보단 이편이 낫겠지. 마음을 다잡다가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요즘 조용하지? 근래 들어선 들려오지 않는 나레이션. 내가 잘하고 있어서 그런가 하고, 한편으로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 싶기도 싶기도 하다. 불안한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애써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잡념을 털어버렸다. 그 후로 일주일. 정신없는 나날이 지나갔다. 그리고…….
“아이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젠 익숙하다 못해서 친밀함까지 느껴지는 권태홍 감독의 인사에 웃어 보였다. 계약도 할 겸 대본 확인차 만나는 자리였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김서연까지 와있었다.
“처음 봬요, 김서연이에요.”
그녀가 내미는 명함을 받아들곤 눈알을 굴리는 한청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올 거 같았다.
“이쪽이 말씀드린 한청이고요. 나이는 어리지만, 요리 실력은 저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오우! 엄청나군요! 권태홍입니다.”
감독의 인사까지 받자 한청이 잔뜩 얼어서 그 뻣뻣한 목을 꺾어 고개를 숙여 보인다.
“하, 한청이라고 합니다.”
“오! 이름 좋다! 느낌 있어요!”
권태홍 감독이 쾌활하게 소리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서연이 준비해온 계약서에 나와 한청이 사인을 했다. 계약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연예인도 아니고 일반인이라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젠 방송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나로서도 3억이라는 돈은 적은 돈이 아니었고, 처음 광고를 찍는 한청의 입장에서도 5천만 원이라는 액수는 꽤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증거로 녀석의 얼굴이 한껏 밝아져 있었다. 아마 사회에 나와서 처음으로 벌어보는 큰돈이겠지.
“컨셉 듣고 뽑은 건데, 어떠십니까? 괜찮은가요?”
대본을 살펴본 후 내려놓자, 권태홍 감독이 눈을 빛내며 물어온다.
“좋은데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남녀가 지친 일상을 떠나 휴가를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광고. 한 명은 자가용을, 또 한 명은 KTX를 타고 서울을 떠나지만 종착지는 같다. 그리고 두 사람의 핸드폰에 깔린 SNS 앱에서도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게시물이 올라간다. 마치 사진첩을 보듯 화면이 교차하며 휴가지에서 찍은 사진들과 태그들이 SNS에 올라가고, 실시간으로 반응해 좋아요의 숫자가 늘어난다.
“요즘은 누구나 하나쯤은 하잖아요? SNS? 그런 면에서 친숙하게 느껴질 거라 봅니다.”
권태홍 감독이 기분 좋다는 듯 말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자아, 그럼 이제 일정을 조정해볼까요?”
손을 싹싹 비비며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듯 보이는 건 착각만은 아닐 터였다. *** 촬영 날짜는 일주일 뒤로 잡혔다. 다행히 <맛있는 도전>의 촬영일과는 겹치지 않는다.
“여기서 내려주면 돼요.”
“그래?”
광화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자, 한청이 안전벨트를 풀고서 내 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워워, 그 눈빛은 뭐야? 부담스러우니까 넣어두지? 손을 내젓자, 녀석이 해맑게 웃으며 소리쳤다.
“오빠! 제가 진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요.”
“그럼 하지 마.”
“잇! 지인짜!”
“크큭, 알았어. 뭔데 그래?”
“아뇨. 그냥요. 고맙고요! 저, 요즘 막 행복한 거 있죠! 오빠 덕분에 광고도 찍고. 오디션까지 합격해서…… 친구들이 엄청 부러워하는 거 알아요?”
“글쎄. 그것까진 모르겠고. 광고는 네 이미지가 우연찮게 컨셉에 맞았을 뿐이고, 오디션도 네가 잘해서 된 거지 난 한게 없는데?”
“히힛. 그러면…… 다 내가 잘나서 그런 거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까르르 웃더니 차 문을 연다. 이제야 좀 저 나이 때의 애들 같네. 한청이 해맑게 웃고는 손을 흔들며 내리고 있었다. 나 역시 손을 한차례 흔들어주고는 차를 출발했다. 그렇게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한청을 뒤로 한 채 복잡한 시내를 빠져나오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르. 전화가 온다. 확인해보니, 박 실장이다.
“예, 실장님.”
- 얘기 들었습니다. 오늘 계약하셨다고요.
“방금 마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 그러시군요.
담담하게 얘기하는 박 실장의 음성을 들으며, 머리 한쪽으로는 떠올린다. 김진숙 회장이 따로 지시한 거라도 있는 걸까? 눈을 빛내고 있을 때, 박 실장이 불쑥 제안했다.
- 혹시 얘기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광고 한 편 더 안 찍으시겠습니까?
“광고요?”
방금 광고 계약하고 왔는데, 또 무슨 광고? 의아했지만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C 마트 쪽에서 광고를 찍으려나 보다 하고 생각할 뿐. 그래서 알았다고 대답하려던 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응? 나레이션?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이내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 거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