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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다 가질 순 없다. (1) (161/204)

#161. 다 가질 순 없다. (1)2021.10.10.

이제까지와 달리 진지해지는 그녀의 얼굴. 나는 이하연을 보다가 말했다.

“일찍 들어가야 해요?”

아직까지도 내가 물은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녜요.”

“그럼, 우리 바람 쐬러 갈래요?”

오늘 안에만 들어가면 되기에 나 역시도 그리 급할 건 없었다. 뭐, 차 안에서 얘기를 나눌 수도 있지만, 보아하니 이하연이 좀처럼 입에 떼지 못하는 눈치다. 억지로 얘기를 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조용한 데 가서 차분한 마음으로 대화를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후 차를 꺾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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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라곤 하지만, 아직은 밤바람이 차갑기만 하다. 특히나 한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자 금세 몸이 식으며 솜털이 일어난다.

“춥지 않아요? 저기 들어갈까요?”

내가 손가락을 들어 유람선처럼 생긴 레스토랑을 가리켰지만, 이하연이 고개를 내젓는다.

“춥긴 한데…… 답답한 거보단 나을 거 같아요.”

“어? 그래요?”

“그냥 우리 좀 걸어요.”

“그래요, 그럼.”

딱히 내가 춥다기보단 혹여 그녀가 추워할까 봐서 했던 말인지라,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함께 강둑을 걷기 시작했다. 강 쪽에서 불어온 바람결에 이하연의 머리칼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다가 물었다.

“요즘은 안 바빠요?”

그녀가 한 손으로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며 대답한다.

“좀 괜찮아졌어요. 중국 쪽 반응도 나쁘지 않고, 슬슬 안정세에 접어들고 있다고나 할까. 이번 분기만 잘 넘기면 올해 목표로 했던 매출까진 문제없을 거 같아요.”

“다행이네요.”

살짝 벗어난 얘기였지만, 상관없다. 지금 당장 듣고 싶은 얘기, 그리고 하고 싶은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궁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 그녀와 나 사이엔 사실상 아무런 접점이 없다. 작년…… 그날, 강형식과 처음으로 만났던 날에 만일 클럽에 가자는 녀석의 말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이하연을 만날 수 있었을까? 아니, 만나는 건 둘째치고 과연 지금처럼 이렇게 그녀와 손을 붙잡고 걷고…… 응? 언제 손을 잡았담?

“봄꽃이 지기 전에 이렇게라도 함께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흐드러지게 핀 건 아니지만, 아직은 나무마다 피어있는 벚꽃들을 보다가 싱긋 웃었다.

“혹시 그거 알아요? 벚나무가 원래 우리나라가 원산지라는 거?”

“어머? 정말요? 일본 국화 아니었어요?”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 모습이 여간 귀였다. 하여간 눈은 어찌나 큰지. 속눈썹도 길어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일본엔 국화가 없는데요?”

“어? 그, 그래요?”

“예. 제가 알기론 그래요.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에서 저마다 벚나무 원산지가 자기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학자들 사이에선 우리나라 제주도가 원산지라는 얘기가 거의 정설로 받아지는 모양이에요. 근데 이게 꽤 신빙성이 있는 게, 우리나라에선 오래전부터 벚나무를 이용해 만든 것들이 꽤 많았거든요. 일테면, 팔만대장경?”

“아! 팔만대장경이면…… 그 팔만대장경?”

손뼉까지 치고 재밌어하는 그녀를 난 가만히 바라보았다. 겨우 이런 얘기에도 저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니. 순진하다기보단 순수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러면서도 마냥 착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한번 결정 내린 것들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듯 보인다. 하기야, 그런 성격이 아니라면 사업을 어떻게 할까. 나하고는 완전히 다른 성격임에도 초지일관 나만 바라보는 모습이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난 숨을 가볍게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는 모르겠으나, 피하기만 할 문제도 아니다. 이럴 땐 차라리 속 터놓고 대차게 밀고 나가는 게 정답이 아닐까.

“하연 씨.”

“……?”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가 내가 부르자, 살짝 바뀐 분위기를 알아채곤 눈을 한껏 치켜뜨는 그녀였다.

“집에서 뭐라고 해요?”

느닷없는 질문이었을까. 그녀가 흠칫한다. 맞구나. 그럴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하연의 성격상 이렇게까지 말끝을 늘일 리 없을 테니. 안 그래도 예전에 그녀의 고모란 분을 만났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이 불안 불안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그녀의 태도에 확신하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했다는 건 아니고. 이상하게도 다 잘될 거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한층 맑아진 정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날 가만히 쳐다본다.

“아빠가…… 한번 보재요.”

음……. 그렇구나. 별다른 걱정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나라도 저런 딸이 있다면, 그래서 그 딸아이에게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면 관심을 가질 듯하다. 그래도 조금 그렇긴 하네. 따지고 보면 그녀와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보자고 하니 왠지 부당하다고 느껴진다. 뭐, 상관없지. 딱히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순진한 생각인지는 몰라도 단순히 사귀든 결혼을 하든 당사자 간의 마음이 가장 중요할 테니까. 게다가 다른 건 몰라도 이하연을 좋아하는 마음만은 다른 사람에게 질 거 같지도 않고. 이런데도 불구하고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면, 그 역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물론 지금의 나로선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1도 없었지만.

“하연 씨 생각엔 언제 뵈면 좋겠어요?”

별다른 음색의 변화 없이 되묻자, 그녀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괘, 괜찮겠어요?”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안 괜찮을 건 뭐가 있어요.”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그녀. 난 이하연의 손을 다시 한번 꼭 쥐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누가 뭐래도, 하연 씨 남친은 저잖아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웃어 보이자, 이하연의 얼굴에도 점차로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이하연과 헤어지고 돌아와 샤워부터 하곤 침대에 앉았다. 그새 톡이 와 있다. 다 이하연이 보내온 것들이었다.

- 생각지도 못했는데, 오늘 데이트 즐거웠어요.

- 아까 본 벚꽃들은 평생 잊지 못할 듯.

- 다음에도 우리 같이 걸어요.

- 오늘 진짜 좋았어요.

- 그리고…… 고마워요.

평소와 다르다. 톡들이 몇 개 안 되는 것도 그렇지만, 발랄하기만 하던 예전과 달리 진지한 느낌이 강하달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아서 웃게 된다.

“다음 주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원래는 이번 주에 보려고 했는데, 이하연의 아버지가 바쁘단다. 하기야 무려 대현 그룹의 오너 일가, 그중에서도 적장자로서 사실상 회장 다음가는 권력을 지닌 사람인데 어지간히 바쁠까. 그래서 언제 보면 되겠냐고 물으니, 다음 주는 되어야 할 거란다. 그 결과 이번 주말쯤에 확실히 말해주겠다는 얘기를 끝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후우, 조금…….”

긴장되긴 하네. 누군가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서, 눈 오는 날 대문 앞에서 몇 시간씩 눈을 맞으며 꿇어앉아 있었다고 하더라만. 머릿속에 내가 엄청 큰 저택의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곤 피식 웃고 말았다. 실없기도 하지.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요즘이 어떤 때인데……. 한차례 고개를 내젓고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나저나 내일 계약은 잘 하시려나 모르겠네. 아까 낮에 아파트를 둘러보며 기쁘게 웃으시던 외숙모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

“잘했네.”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기쁜데도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간단히 말했지만, 다행히 수화기 너머에선 서운해하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 원주인이 대학교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인지 엄청 교양있는 거 있지! 돈도 막 깎아주고……. 아! 근데 너 진짜 괜찮아? 너무 많이 쓴 거 아냐?

“뭐래. 그 얘긴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

- 그, 그렇기는 한데…… 미안해서 그러지. 네가 얼마나 힘들게 번 돈인데.

“알면, 앞으로 좀 더 잘하든가. 큼! 누나 동생이 집에서나 구박받이지, 밖에 나오면 꽤 하거든?”

- 예, 예. 알아 뫼시죠. 우리 잘생기고 착한 동생.

피식. 한차례 웃고는 수연이 누나에게 물었다.

“그럼 다음다음 주에 이사하는 건가?”

- 그렇긴 하데. 그래도 되나 모르겠어. 아직 집이 나간 것도 아니라서.

“상관없잖아. 거기 집 뺀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 하긴. 부동산 아저씨 말이, 인터넷에도 올려놨으니 금방 나갈 거라고 하긴 하더라.

“너무 걱정 마. 자꾸 그렇게 쓸데없는 고민으로 머리 굴리면 빨리 늙는다?”

- 어쭈? 서진영! 지금 누나한테 개기는 거니?

“참네. 진짜 뭐래니? 시집도 가기 전에 쭈그렁 할머니 될까 봐서 걱정해줬더니.”

- 야! 이게…….

“아, 들어가 봐야겠다! 끊는다!”

얼른 전화를 끊고는 픽하고 웃었다. 평소처럼 웃고 떠들었지만, 여기까지 느껴진다. 지금 누나가 어떤 심정인지. 살짝 들떠 있었고, 목소리도 잔잔하게 떨렸다. 그럴 만도 하지. 그동안 고생한 걸 생각하면……. 집이 오래되어서 그런지 외풍도 심했고, 겨울에는 툭하면 보일러가 고장 나기 일쑤인 데다, 여름에는 수압이 낮아서 화장실에서 물을 쓰면 설거지를 하기 힘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수아가 크면서 점차 좁게만 느껴지는 게 문제였다. 지은 지 20년도 넘어 낡은 것도 그렇고, 옛날 아파트답게 산꼭대기나 다름없는 고지대에 있는 것도 불편했는데. 새로 산 아파트는 시내 중심가에 있으니 다들 출근하기도 좋을 터였다. 주변에 편의시설들이 잘 갖춰진 건 덤이었고.

“워우! 브라더! 여기서 뭐 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준석이 형이 서 있다. 한 손에 담배를 들고서.

“에이, 형. 이제 곧 요리할 건데, 담배는 좀……. 그거 이제 좀 끊죠?”

“노노. 스트레스 때문에 안 돼.”

“참네. 백해무익한 걸 뭐 좋다고…….”

“얀마! 안 그래도 마눌님 잔소리에 갈수록 눈치 보느라 짜증 나는데, 너까지 그럴래?”

“알았어요, 알았어. 아, 근데 청이는 왔어요?”

“청이? 방금 들어오던데? 왜? 걔가 뭔 사고라도 쳤냐?”

사고라……. 굳이 얘기하면 앞으로 칠 예정이라고나 할까.

“그런 건 아니고요.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저 먼저 들어갈게요.”

“오케이. 나도 바로 들어갈게.”

커피는 언제 타온 건지, 한 손에 종이컵을 들어 보이는 형을 보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 청아. 너, 이따가 나랑 얘기 좀 하자.”

한창 아침 식사를 위한 밑재료 준비 중이던 한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날 쳐다본다. 그 눈빛이 ‘왜요?’는 듯 느껴져 웃고 말았다.

“얀마. 뭘 그렇게 봐?”

녀석이 한숨을 푹 내쉬곤 말한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요. 저 각오하고 있으니까.”

“각오? 뭔 각오?”

도마 위에 칼을 꺼내놓으며 묻자, 한청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도 안다고요. 지난번 오디션 때 엉망이었다는 거.”

속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알긴 아네. 야, 솔직히 말해서 좀 창피하더라. 뭔 머랭을 그렇게…….”

“아악! 말하지 마요! 저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라고요. 얼마나 떨렸는지 알아요? 그러다 보니까, 자꾸 손은 미끄러지고 달걀은 왜 그렇게 쉽게 깨지는지……. 진짜 엉망이었다고요.”

칼질을 하기 전에 날을 세워 확인하다가 녀석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긴장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별걸 다 마음에 담아두네.”

“응? 그것 때문에…… 저 혼내려고 보자는 거 아니에요?”

“내가 네 아빠냐? 선생님이냐?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아무튼, 이따 식사 끝나고 나서 잠깐만 보자.”

“……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녀석의 얼굴에 호기심 반 기대감 반.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녀석을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상상치도 못할 거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그러고 보니 재밌는데? 이참에 좀 더 골려줄까 싶다가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괜히 삐져서 안 하겠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게 될 테니.

“오셨어요?”

어느 틈엔가 주방으로 들어온 준석이 형이 김진호 셰프에게 인사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 역시 얼른 칼부터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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