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변화 (3)2021.10.08.
다음 날, 외숙모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난 뒤 가족들이 집을 나서는 걸 배웅했다. 그러곤 오전 내내 집에서 뒹굴 거렸다. 정말이지 간만의 휴식이었다. 이미 어제 여기로 오면서 주방일은 쉬겠다고 했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토요일이라서 그리 힘들지 않은 날이었지만, 그래도 월차까지 내며 양해를 구했더랬다. 뭐, 손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평소에 내가 주방에서 빠지는 건 어쩔 거냐고. 오히려 날 응원해주며,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이들인데……. 돌아갈 때 주방 식구들 선물 좀 사 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톡이 울렸다. 응? 이하연이다.
- 뭐해요?
- 설마 아직까지 자는 건 아니죠?
- 식구들은 출근했어요?
- 막내는 학교 잘 갔나?
- 다들 잘 계시죠?
- 밥은요?
- 나 안 보고 싶어요?
- 근데 막 서운한 거 있죠.
- 그런 일 있으면 나랑 같이 가지.
- 나도 보고 싶은데.
- 오늘 계약한다고 했죠?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톡을 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피식 웃고는 답톡을 보냈다.
--- 계약은 내일 할까 해요.
--- 오늘 삼촌께도 집 보여줘야 하니까.
- 그럼 내일까지 거기 있을 거예요?
---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 계약이야 제 이름으로 할 것도 아니고.
--- 굳이 제가 여기 있을 필요는 없죠.
- 아, 그렇기도 하겠당.
- 있죠. 저 저녁에 거기 가면 안 돼요?
- 할 얘기도 있는데.
음? 할 얘기? 뭐지 싶어서 톡을 써 내려가다가 싹 다 지웠다. 왠지는 몰라도 그래야만 할 거 같아서였다. 뭐랄까. 느낌상 그랬다. 톡은 물론이고 전화상으로 할 얘기가 아닐 듯해서.
--- 그래요, 그럼.
--- 이따 저녁에 봐요.
답톡 대신 새끼 곰 한 마리가 귀엽게 엉덩이를 흔들며 춤추는 이모티콘을 보곤 웃으며 핸드폰을 챙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의아했지만,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러곤 거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을 기분 좋게 맞으며 눈을 감았다. *** 예상대로였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신축 아파트를 한차례 둘러본 외삼촌은 만족한 표정이라기보단 미안하다는 얼굴이셨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물리실 거 같진 않았지만,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일식당으로 향하는 길 내내 생각이 많으신지 말씀이 없으셨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삼촌을 상대하는 게 나 혼자가 아니란 것. 외숙모랑 수연이 누나는 토요일이라서 일이 일찍 끝났고, 수아는 내가 태권도장에서 바로 픽업해서 데려오는 길이었다.
“여, 여기 비싼 거 아냐?”
내부 인테리어가 제법 고급이라서 미리부터 겁먹은 수연이 누나가 말까지 더듬으며 날 말렸지만, 그런다고 돌아갈 내가 아니다.
“비싸 봐야 얼마나 한다고. 걱정 말고 시켜.”
“어머! 얘 좀 봐. 너 그러다가 거덜 나. 쟤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몰라서…….”
“언니!”
“호호호. 우리 수아, 입 삐죽거리는 거 봐. 귀엽지?”
“수아야, 일루 와. 오빠랑 메뉴판 같이 보자.”
“응! 오빵!”
수아가 좀 귀엽긴 하지. 예쁘게 생기기도 했지만, 싹싹한 데다가 착하기까지 하니까. 오빠인 내가 봐도 이런데, 삼촌은 나중에 이런 딸을 어떻게 시집 보낼까 모르겠다. 나 같으면 결혼할 남자라도 데려오면 멱살부터 잡지 않을까 싶은데.
“진짜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메뉴판을 확인하곤,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는 걸 확인한 수연이 누나가 마음이 편해졌는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윽, 언니 꼭 늙은이 같앙.”
“이게!”
“이거 덮밥인가? 난 이걸로 하지.”
“아빠! 이거…… 당이 높을 거 같은데? 딴 거로 해요.”
“괜찮아. 밥 먹고 나서 회사까지 걸어가면 되지. 운동도 할 겸.”
당뇨 때문에 걱정하는 딸과 운동하면 괜찮다고 우기는 아빠의 일상적인 대화였다.
“삼촌, 이걸로 하세요. 가츠동에 올라가는 돈가스는 튀긴 거라서 열량이 너무 많아요. 제 생각엔…… 그나마 사케동이 나을 거 같은데.”
“연어 회인가? 나쁘지 않네. 그럼, 그거로 먹지.”
“난 초밥 먹을랭.”
“여기 우동도 되나?”
“언니, 다이어트 해?”
“이게!”
“왜앵! 요즘 하루에 몇 번씩 체중계…… 읍!”
“외숙모는 뭐 드실래요?”
“글쎄, 뭐가 좋을까?”
“오야코동 어떠세요? 닭가슴살 올라간 거로. 맛도 괜찮은 거 같고,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어? 그럼, 나도 그거로 할래!”
수연이 누나가 말을 바꾸는 모습에 눈웃음을 짓던 외숙모까지 메뉴를 결정하자, 직원을 불러 음식을 시켰다. 그러곤 계약 얘기를 꺼냈다.
“전 오늘 들어가 봐야 해서, 내일 계약을 못 볼 거 같아요.”
“아쉽다.”
수연이 누나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하는 걸 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아쉽긴. 이사할 때 또 올 건데.”
이미 돈 얘기라든가, 이사 날짜에 대해선 어젯밤에 대충 말해놓은 게 있어서 오늘은 별달리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근데, 누나 시간 좀 돼?”
“어? 왜?”
“밥 먹고 백화점에 좀 가려고.”
“백화점?”
“응. 가구도 보고, 가전제품도 보려고.”
“……괜찮겠어?”
걱정스러운 눈빛이다. 외삼촌이랑 외숙모도 같은 반응이셨고.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에이, 왜들 그래요.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그 정도는 괜찮아요. 그동안 벌어놓은 것도 있고, 매달 들어올 돈도 꽤 된다니까 그러네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당연히 돈 쓰는 재미 때문이 아니다. 요는 누굴 위해 쓰느냐다. 흥청망청 써댈 정도로 정신이 썩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들한테 쓰는 데 인색할 정도로 각박한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기쁘다. 내가 번 돈으로 가족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게.
“이번만 좀 봐줘요. 앞으론 바빠서 이럴 시간도 없다니까요.”
우는소리를 하자, 그제야 다들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 점심 식사 후 외삼촌이 회사로 돌아가고 난 뒤,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처음엔 비싼 가격에 머뭇거리던 가족들이지만, 보다 못한 내가 가격 상한선을 정해주자 그제야 마음 놓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속으로 생각했다. 삶이라는 게 늘 같을 수는 없겠지. 어떤 때는 잔잔한 파도와 같다가도, 어떤 때는 격한 풍랑에 휩쓸리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바람 한 점 없을 수도 있을 테다. 그러니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는 거겠지. 이를테면 변화 없는 삶이란 없다는 걸 테지만, 그래서 그게 뭐 어떤가. 혼자라면 모를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문제 될 건 없다고 본다. 어려움이 닥친다면 이겨내면 되고, 고통은 나누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제보단 나은 오늘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껏 버텨올 수 있었다.
“오빠! 이거 봐! TV가 엄청 커!”
저만치서 수아가 눈을 반짝이며 날 부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 초인종이 울린 것은 오후 5시경이었다. 문을 열기 전에 확인해보니, 짐작대로 이하연이었다.
“어서 와요.”
“그동안 잘 계셨죠?”
“안녕하세요.”
“어머, 더 예뻐졌네?”
“힛. 진짜요?”
이하연이 하는 말에 기뻐하는 수아를 보자니, 나이가 어려도 여자는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춥죠.”
“차 타고 와서 잘 모르겠는데요? 아 참, 이거…….”
“아, 뭐하러 이런 걸.”
“별거 아니에요. 얼마 전에 거래처에서 선물로 들어온 게 있어서 챙겨두었던 거예요.”
“어머. 이거 굴비 아냐? 아빠가 좋아하시겠다.”
“잘 먹을게요.”
그러고 보니 여자가 또 한 명 늘었다. 하아, 거실에 네 명의 여자가 앉아서 한마디씩 하는 걸 듣다 보니 정신이 몽롱해진다. 한 30분 정도까진 괜찮았는데, 관심도 없는 얘기를 끝없이 듣다 보니까 어느새 눈앞이 가물거릴 지경이다. 화제가 끊기질 않네. 처음엔 새로 이사 갈 집에 관해 얘기를 하다가, 어느샌가 정신을 차려보니 드라마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에 옷 얘기로 넘어가 있었고.
“어디 가려고요?”
중간에 내가 일어서자, 이하연이 물어온다. 나머지 세 명까지 다들 날 쳐다보니 살짝 민망하네.
“좀 피곤해서요. 잠깐 방에 누워 있으려고 하는데, 괜찮죠?”
“그럼요. 어제 촬영해서 피곤했을 텐데, 좀 쉬어요.”
“그래. 이따 밥 먹을 때 부를 테니까, 눈이라도 좀 붙여.”
수연이 누나까지 그렇게 말해주니, 나로선 고마울 뿐이었다. 그렇게 네 명의 여자들을 뒤로하곤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바닥에 이불을 깔곤 몸을 뉘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는데, 한순간 의식이 날아갔다. 그리고…….
“……빠.”
“음…….”
“오빠, 밥 먹으래.”
“....?”
눈을 떠보니, 수아가 날 흔들고 있다.
“밥 안 먹을 거야?”
“밥? 머, 먹어야지.”
상체를 일으키곤 뻑뻑한 눈을 껌뻑거리다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본다. 7시가 조금 안 됐다. 일어나 이불을 개곤, 밖으로 나가니 외삼촌이 보였다.
“아, 오셨어요?”
토요일이라고 일찍 끝나신 모양이다.
“잘 잤어?”
수연이 누나가 거실에 펼쳐놓은 상 위에 음식을 차리다 말고 내게 물어왔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씩 웃고는 다시금 주방으로 향하는 누나였다. 잠시 후, 가족들이 한데 모여 밥을 먹었다. 그 속에는 이하연도 있었다. 한데, 어느새 친해졌는지 나보단 식구들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더랬다.
“어? 너 그 웃음 뭐야? 왜 그렇게 징그럽게 웃어?”
“내가 뭘.”
“어쭈! 오리발 내미는 거 봐. 혹시 야한 생각한 거 아냐?”
“아, 뭐래.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리고 지금 이 타이밍에 그 말이 가당키나……. 큼, 그 얘긴 여기까지만 하지? 애도 앞에 있는데.”
“그, 그런가?”
참네, 가끔 보면 수연이 누나는 너무 격 없이 날 대하는 거 같다니까. 뭐, 나야 그편이 편하고 좋기는 하지만, 수아 교육에는 그다지 좋을 거 같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근데요, 언니.”
보기보다 어른스러운 수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왜?”
“언니는요. 우리 오빠가 왜 좋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식구들이 기겁하는 눈치였지만, 당사자인 이하연은 오히려 태연하게 대답한다.
“멋있잖아. 그리고 착하고.”
이 타이밍에서 수연이 누나가 눈살이라도 찌푸릴 줄 알았더니. 웬걸. 흐뭇한 표정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내 쪽이 창피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아의 질문은 계속되었고.
“그럼, 오빠랑 결혼할 거예요?”
“이수아! 너 버릇없게! 그런 거 묻는 거 아냐.”
“왜애애. 난 그냥…… 하연이 언니가 좋아서 그러는 건데.”
수연이 누나가 꾸짖자, 수아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울상을 짓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였을까. 이하연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수아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주었다. ***
“정말 좋으신 분들인 거 같아요.”
식사 후, 후식으로 차 한잔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을 나섰다. 이하연은 오늘, 올 때 운전 기사분이 태워다줘서 나랑 같이 타고 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예.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죠.”
“쿱.”
코를 훌쩍이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
“방금 되게 식상했다는 거 알죠?”
“그런가요?”
“그래도, 확 와닿긴 했어요. 진짜 그러실 거 같달까. 그런 가족들 속에서 진영 씨가 자랐다고 생각하니까,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죠.”
“흠, 어떤……?”
“글쎄요.”
“…….”
“다행이다? 그래서, 진영 씨가 그렇게 착한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칭찬 맞죠?”
차에 올라타며 묻자, 보조석에 오른 이하연이 배시시 웃는다.
“왜요? 아닌 거 같아요?”
씩 웃고는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러곤 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요? 어제 할 말 있다고 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