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변화 (1)2021.10.03.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서 그런가, 좀처럼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아시잖아요? 하연이가 보기와 달리 내성적인 거.”
결국, 모른다는 얘기다. 그렇다곤 해도 신현정 PD가 괜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닐 테다. 나와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이하연과 친하게 지내온 사이니까. 박유나가 둘째 언니 같다면 신현정 PD는 이하연에게 있어서 큰언니 같은 존재랄까. 그러니 그녀의 얘기를 흘려들어선 안 되지 싶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히 걱정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 안 드리려다가…….”
“아뇨. 하연 씨 생각하셔서 그러시는 거잖습니까. 제가 하연 씨랑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런 말 한다는 게 웃길는지 모르겠는데 신현정 PD와는 공적으로는 동료지만, 사적으로는 처형 같은 사람이었다.
*** 방송국을 빠져나오며 이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한참 동안 신호가 가도 받질 않는다. 결국 통화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안내 메시지가 나오길래 일단 끊었다. 바쁜 일 있나? 다시 한차례 전화를 해보았지만, 역시나 받질 않아서 간단히 톡만 보내놓았다. 그러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럴까 생각하며 저택을 향해 차를 몰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르. 응? 하연 씨인가? 진동이 울려서 확인해 보니 핸드폰에 익숙한 이름 석 자가 떠 있다. 반갑긴 했지만, 아쉽기도 했다. 지금은 그녀와 통화를 했으면 싶은데……. 이하연이 아니라 강형식이였기 때문이다.
“바쁜 거 아냐?”
런칭 직후라서 한창 바쁜 시기라고 들어서 대뜸 그렇게 묻자, 녀석이 크게 웃었다.
- 바쁘지. 너무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도 전화할 정신은 있나 보네?”
- 지금은 일로다가 전화한 거니까.
“뭐래.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끊어. 나 기다리는 전화 있어.”
- 그래? 누군……. 아, 그래. 알 만하군. 참네. 누군 뭐 빠지게 바쁜데, 누구는 연애하느라…….
“끊는다.”
- 야, 야!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너 연애하는 거 보니까 나까지 기분이 좋다고 말하려던 참이라고!
“하나도 안 웃겨. 그러니까, 그 용건이라는 거나 말해 봐.”
- 하아,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아, 몰라.”
- 흠, 혹시 싸웠냐?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끄셔.”
- 쯧, 내 코가 석 잔데 연애 상담할 것도 아니고……. 오케이. 지난달 결산 때문에 전화했다.
“결산?”
벌써 그렇게 됐나? 원래 삼한 식품과 계약하길, 내가 건넨 레시피와 내 이름을 사용하는 대가로 상품이 하나씩 팔릴 때마다 총매출의 4%를 가져가기도 했다. 사모님의 경우엔 내가 우겨서 종당 1억씩 계약. 합이 8억. 이번에 브랜드 런칭하며 출시한 상품 1차분이 그렇다는 거고, 계획되어 있는 2차분까지 포함하면 거진 20억 가까이 지급받으실 터였다. 1차분인 8억은 이미 사모님 통장으로 입금되었고, 내 경우엔 아직 결산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난 또 뭐라고.”
돈. 중요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요즘 같아선 잘 모르겠다. 광고도 여러 편 찍고, 방송국도 드나들다 보니 간이 커진 걸까. 의식이 통장 잔고를 따라잡지 못해서 머릿속의 균형감각이 무너졌달까. 그냥 많이 버는구나 라고 생각할 뿐, 이상하게 와닿질 않는다.
- 얼만지 궁금하지 않아?
“알면 뭐가 달라지나. 그냥 주면 주나 보다 하는 거지.”
- 나참, 그러다가 절에라도 들어가겠다?
“그래서 얼만데?”
궁금하긴 하다. 내가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도 궁금하지만, 것보다는 얼마나 팔렸는지가 더욱 궁금하다.
- 자식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듣고서 놀라지나 마라.
“…….”
- 팔천.
녀석의 말을 듣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에 들었을 땐 그것보단 더 많이 팔렸다고 하지 않…….
- 이번 달에 네가 가져갈 몫이다. 아, 이건 어디까지나 지난달에 팔린 매출을 기준으로 산정하고. 아마 다음 달엔 더 많이…….
“내 몫이 팔천이라고!”
진심 놀랐다. 내가 가져갈 몫이 총매출의 4%임을 고려하면……. 대체 얼마나 팔린 거야! 이러다 나 재벌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 아깐 별 관심 없는 듯 굴더니만. 아무튼, 통장에 입금하라고 했으니까 이따가 확인해봐. 나 사실 무지 바쁜데, 너 기대하고 있을까 봐 전화한 거거든. 오래는 통화 못 하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나중에 물어보든가 하고.
“아, 알았다. 고생해라.”
전화를 끊고 나서도 어안이 벙했다. 8,000만 원이란다. 계약을 한 달씩 끊어서 받는 거로 해서 그렇지. 일 년으로 따지면……. 10억 가까이 되는 돈이다. 아니 아니. 지난달에는 30일을 다 채우지 못했다는 녀석의 말대로라면, 아마 그 이상이겠지.
“후우, 로또야 뭐야.”
고개를 내저으며 흐려지는 정신을 챙겼다. 그런데도 자꾸만 들뜬다. 정정하자. 아니 인정하자. 얼마나 버는지 와닿지 않는다는 말…… 거짓말이다. 나도 사람인데, 어찌 욕심이 없을까. 돈만 많아 봐라. 당장에 싸 들고 가서 집부터 사지. 그놈의 대출 때문에 외삼촌이랑 외숙모가 고생하시는 걸 생각하면…….
“그럼, 지금 내 통장에 얼마가 들어 있는 거야?”
이제까지 모아둔 돈이 꽤 되는 데도 함부로 쓰지 못한 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였다. 한마디로 겁이 났던 거다. 사람 일이라는 게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 거니까. 벌 때 바짝 벌어야지. 돈 좀 만진다고 홀랑홀랑 써대면 나중에 빈털터리밖에 더 될까 싶어서였다.
“어쩔까.”
갑자기 고민이 생겼다. 이미 내 머릿속에선 외숙모의 얼굴이 떠올랐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결심을 굳히곤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수화기 너머에서 반가워하는 외숙모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고모가 불러서 나간 자리엔 당황스럽게도 뜻밖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아빠?”
“뭐하니? 왔으면 앉지.”
자기는 모르는 양, 얄밉게 얘기하는 고모였지만 이하연은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자리에 고모,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앞쪽은 아버지가 앉아계셨다.
“밥 먹자고 해서 나왔더니, 왜 아빠가 여기 계신 거야?”
말을 돌릴 것도 없다 싶어 그녀가 묻자, 고모가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곤 투덜거렸다.
“참네. 애들 문제는 애들이 알아서 하게 놔둘 것이지. 하여간 네 아빠 딸바보라는 건 진즉에 알았다만……. 진짜 중증이다, 중증.”
고모 얘기만 들어서는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만, 어쩐지 위화감이 들었다. 때문에 이하연은 아버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옆에 앉아 있는 고모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딴청을 피우고 있었기에. 하지만 원하는 얘기를 들을 순 없었다.
“밥부터 먹자.”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얘기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이하연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로부터 30분 뒤. 식사를 얼추 끝냈을 때, 그녀의 아버지인 대현 개발 사장 이상훈이 슬쩍 물어왔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만. 요리사라지?”
흠칫. 속으로 뜨끔 한 이하연이 안 그래도 큰 눈을 치떴다가 이내 표정을 고치곤 고모를 흘겨보았다.
“어머, 얘! 왜 그렇게 보니? 나, 그 남자…… 서 셰프 칭찬만 했다 뭐.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요즘 갓솁이 대세잖니? 말이 요리사지, 반쯤은 연예인…… 그 뭐냐. 공인! 그래, 공인이잖아? 그런 의미에선 나도 엄연한 팬이라고. 당연히 두 사람 응원한다고. 솔직히 집안에 그런 사람 한 명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뭣하면 우리 백화점 모델 해도 될 테고. 그럼 매출 좀 오를걸? 아무튼, 나름 갓솁 팬이라는 년이 네 오빠한테 쪼르르 달려가 험담을 했겠니?”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뭔가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이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아빠도 만나보면 마음에 들 거야.”
딸의 얘기를 들었으면서도 이상훈 사장은 뭐라 대꾸하질 않는다. 그저 물끄러미 이하연을 바라보다가 커피잔을 들어 올릴 따름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있자, 이하연으로선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사람 불러 내놓고.”
여전히 아빠 앞에서는 어리광쟁이일 수밖에 없는 딸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부르려면 직접 전화하든가. 치사하게 고모한테 시키고…….”
고모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며 못 들은 척하는 동안, 이상훈 사장이 재차 물었다.
“요즘 TV에도 곧잘 나온다고 하더라. 음, 지난달에는 삼한 식품에서 신규 브랜드 출시하는데, 한 다리 걸쳤다지?”
“진영 씨, 재주가 많아. 요리도 잘하지만, 사업 감각도 있는 거 같고 광고 찍은 거 보면 차라리 연예계로 나가는 게 나을 거 같기도 하고.”
이왕 들킨 거, 될 수 있으면 점수나 따려고 말하곤 있었지만 켕기는 건 없었다. 전부 다 사실이니까. 하지만, 듣는 입장에선 좀 다른 모양이었다.
“그래. 재주는 좀 있어 보이더라만.”
말을 늘이던 이상훈 사장이 한 템포를 쉬곤 얘기했다. 한층 낮아진 딱딱해진 음성으로.
“한번 보자고 해라.”
*** 목에 건 명찰에는 임미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머, 아직 안 갔어?”
함께 일하는 동료의 물음에 그녀는 살포시 웃으면 고개를 내저었다.
“데이트 좀 하려고.”
“어머나! 애인 생긴 거야?”
묻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농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임미연이 남편과 두 딸 그리고 평소에 아들이라고 부르는 조카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인이지. 사랑하는 남자.”
“풉. 아들 보려나 보네.”
“지금 온다고 하네.”
“갑자기? 왜? 돈 떨어졌대?”
“그런 일로라도 전화 좀 자주 했으면 좋겠네.”
워낙 한곳에서 오래 일해서 그런가. 그녀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동료였다.
“아유, 무심하기도 하지. 하여간 한국 남자들 너무한다니까. 하아, 어쩌겠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걸. 호호호. 이렇게 얘기하니까, 진짜 애인인 거 같다.”
호들갑스럽게 웃고 있는 동료를 보며, 임미연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의아해했다. 대체 오늘 왜 여길 오겠다고 한 걸까. 주말도 아닌데, 오이도로 오는 것도 이상하고. 집으로 가지 않고, 굳이 그녀가 일하고 있는 아파트로 오는 것도 이상하기만 하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는 아파트 청소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진영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부끄러워서는 아니고, 괜스레 마음 쓰는 게 싫어서였다. 그 아인…… 예전부터 그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외삼촌인 남편을 따라 집으로 왔을 때, 기가 죽어서 어깨가 축 처진 모습이 흡사 비 맞은 강아지 같았더랬다.
뿐만 아니라 한동안 눈치를 보며 그 나이 때 남자애들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게 떠오른다. 그게 참 마음이 아팠다. 세상에 부모를 골라 태어나는 자식이 없듯이, 자기 원해서 고아가 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진영이는 모든 잘못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행동했었다.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는 군식구인 자신이 먹는 만큼 임미연이 새벽부터 나가서 아파트 계단을 쓸고 닦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결국, 그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간 것이고.
“아유, 간만에 만나는데 맛있는 것 좀 사달라고 해. 요즘 걔 돈 잘 번다며.”
동료의 너스레에 웃고 마는 그녀. 임미연이 소리 없이 미소짓고 있을 때였다. 빠-앙! 아파트 정문. 검은색 일색의 스포츠카가 언제 왔는지 클랙슨을 울리고 있었다.
“어유, 누군데 시끄럽게! 그래도 차는 좋네. 쳇! 부모 잘 만나서 몇 억씩 하는 차나 몰고 다니…….”
임미연의 동료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차 문이 열리곤 진청색 슈트를 걸친 남자가 내렸다. 그러곤 임미연 쪽으로 걸어오며 반갑게 부른다.
“외숙모!”
“아, 진영아!”
“어머! 얘가 진영이야? 많이 컸네!”
“안녕하세요.”
“훤칠하네! 요즘 방송에도 나오고 하더니, 어째 더 잘생겨진 거 같다?”
“에이, 아녜요.”
손사래를 친 서진영이 얼른 임미연의 팔짱을 끼곤 살갑게 말했다.
“얼른 가요. 해지기 전에.”
“응? 어딜 가는데?”
씨익 웃은 뒤, 서진영이 대답했다.
“우리, 집 사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