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2차 예선 (4)2021.10.01.
처음 낸 테스트가 간단했다면, 두 번째 낸 테스트는 평이하다고 할 수 있었다.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하면 되는 거였다. 다만, 그 재료라는 게…….
“앞에 놓인 파, 마늘, 양파, 밀가루를 이용해 무얼 요리하시든 개의치 않겠습니다. 양념은 원하시는 대로 쓰셔도 됩니다. 시간은 20분. 시작합니다.”
서진영의 짧은 설명만큼이나 주어진 시간도 짧았다.
“오! 2차 예선! 두 번째 테스트! 참가자들은 20분 내에 요리를 만들어 내야만 합니다! 과연 주어진 시간 내에 서 셰프님의 입맛을 사로잡을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한진석의 멘트가 아니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분이란 시간은 요리를 할 밑 재료를 다듬는 것만으로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릴 터였다. 더구나 재료라는 것도 달랑 네 가지뿐. 고기도 해산물도 없었으며, 하다못해 미역과 같은 해조류라도 있었으면 나았으련만 파, 마늘, 양파, 밀가루만으로 무언가 요리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 점은 80명 모두가 공평하다고 할 수 있어서 누구 하나 불만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버저 울렸습니다! 참가자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한진석이 장내를 보며 추임새 비슷하게 멘트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신경 쓰는 참가자는 없었다. 버저가 울리고 난 뒤, 정신없이 움직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이빨이 빠진 것처럼 참석자들의 조리대가 군데군데 비어있는 가운데 다들 어떻게든 그럴싸한 요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였다. 스튜디오 밖에선.
“방금 전 상황은 그림 좀 나오겠는데요?”
아직까지도 1차로 탈락한 이들에게 서진영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박신영 작가가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흐흐흐. 내 장담하는데, 1회차 방송 나가자마자 이슈가 될 거야.”
이종무 CP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하자, 박신영 작가가 맞장구를 친다.
“확실히 서 셰프님이 뭘 좀 안다니까요.”
“그러게. 거기서 패자부활전 얘기를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군.”
이종무 CP의 말대로였다. 서진영은 방송 중간에 탈락이 내정된 이들에게 기다리라고 하곤, 신현정 PD에게 느닷없이 제안했던 것이다. 2차 예선에서 4차 예선까지. 예선을 치르는 동안 탈락한 이들만 모아서 그들만의 경선을 치르게 하자고. 그렇다고 해서 많은 수를 구원해주자는 것도 아니었다. 두 명. 어떻게 보면 적어도 너무 적은 수였지만, 떨어진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기사회생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다시금 주어진 기회인 만큼 치열하기 짝이 없을 터였다. 아무튼, 그렇게 뽑힌 2명과 본선에 진출한 16명을 합쳐 최종적으로 본선에 진출하게 될 18명. 원래 본선 진출자가 16명이었던 데에 비해서 인원이 늘어나긴 할 테지만, 상관없을 터였다. 그래 봐야 두 그룹으로 나뉘면 한 명 더 늘어나게 되는 것뿐이니까. 한마디로 와일드카드인 셈이다. 그리고 그 와일드카드는 또 한 번의 이슈를 만들어 낼 터였다. 갑작스러운 제안이긴 했지만, 꽤 괜찮은 제안이라 생각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채택되었다. 다행히 이곳에는 신현정 PD뿐만 아니라 이종무 CP도 있었고, 촬영 첫날이라서 일찍부터 방송국을 찾은 박신영 작가까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데, 저걸로만 요리를 어떻게 해요?”
박신영 작가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신현정 PD가 스튜디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미 참가자들의 테스트와 관련해선 서진영에게 일임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의문이 들긴 한다. 진짜 파, 마늘, 양파, 밀가루만으로 요리를 할 수 있나? 아니, 못할 것도 없지만 간단한 요리 몇 가지로 종류가 한정될 수밖에 없을 텐데…….
“후우, 지금까진 좋았는데, 이러다가 후반부는 날려버려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이종무 CP가 걱정스럽게 얘기했지만, 신현정 PD는 표정에 변화가 없다. 그만큼 서진영을 믿고 있다는 걸 테다. 그 증거로 스튜디오 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묘한 빛이 어렸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 삐익-.
“아! 버저 울렸습니다!”
한진석의 목소리가 버저가 울리는 소리와 더불어 귀속으로 파고들었다. 참가자들이 요리를 하다 말고 움직임을 멈추는 게 보인다. 뭐, 그렇다고 해서 다 그런 건 아니다. 물론 두 번째 테스트라고 해서 시간 조절을 잘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애당초 부족하다 싶을 정도의 시간을 준 것도 있어서, 지금처럼 몇 명이 허둥대며 뒤늦게 요리를 마무리하는 건 이미 예상 범위 내였다. 당연히 가차 없이 제지했다. 여기가 오디션 장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레스토랑을 운영할 걸 생각하면 지금부터 시간관념만은 확실하게 머릿속에 새겨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
나름 단호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세 명 정도가 아직도 요리도구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89번 참가자, 물러나세요.”
한진석도 이때다 싶었는지, 끼어든다.
“아쉽겠지만, 멈추셔야 합니다. 왜냐? 그게 룰이니까요! 후우, 보는 제가 다 가슴이 아픕니다만, 그래도 공정한 승부를 위해서 서 셰프님의 말을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그제야 다들 뒤로 물러선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요리하느라 어수선해진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 장내를 돌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안에 울려 퍼지는 내 발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린다고 생각하며 한 참가자의 조리대 앞에 섰다.
“칼국수네요.”
“……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스스로 한심하다고 여기는 걸까?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국자를 들었다. 그릇에 국물을 떠서 맛을 보곤…….
“너무 싱겁군요. 그리고…… 밀가루가 뭉쳐서 씹히고요.”
“죄, 죄송합니다.”
“탈락입니다. 이유는 아시죠?”
“예…….”
고개를 푹 숙이고 마는 7번 참가자를 지나쳐 8번으로 넘어갔다.
“전병인가?”
“예! 재료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소스에 힘을…….”
“센스는 나쁘지 않군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별거 아닌 재료인 밀가루로 반죽해서 부꾸미를 만들고, 대신 파와 마늘 그리고 양파를 다져 볶은 뒤 케첩에 버무려 만든 음식은 적어도 보기엔 먹음직스러웠으니까. 근데, 케첩이 양념에 들어가나? 흠, 양념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 같기도 한데……. 내가 물었다.
“이거 케첩이죠? 토마토소스 대신으로 쓴 건가요?”
“예. 그, 그럼 안 되나요?”
난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맛 좀 보죠.”
젓가락으로 부꾸미 하나를 집어 소스째로 입에 넣었다. 끼어드는 한진석. 그 역시 부꾸미를 맛보곤…….
“오! 맛있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맛도 나쁘지 않다. 시간에 쫓기며 만든 음식이란 걸 감안하면 100점 만점에 70점까지 줄 수 있겠다.
“좋네요.”
“서 셰프의 칭찬, 오랜만이지 싶네요!”
한진석의 멘트 때문인지, 8번 참가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기대가 한가득. 옅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양념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페널티를 주기는 힘들겠군요. 더구나 이 정도로 창의적이라면 저로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겠네요. 합격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환호하는 그를 지나쳐, 18번.
“칼국수네요?”
“……예, 카……칼국…… 죄송합니다.”
앞서 7번 참가자가 칼국수를 만들었다가 대차게 까인 걸 본 탓인지 잔뜩 얼어 있었다.
“맛 좀 볼까요?”
국자로 국물부터 맛을 봤다. 괜찮다. 간도 딱 맞았고, 무엇보다 파와 양파를 미리 볶아서 국물 맛을 풍성하게 만들어 감칠맛이 돌았다. 거기에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 면도 찰기가 돌며 탄력이 넘친다.
“맛있네요. 합격입니다.”
“아! 저, 정말요?”
작은 체구의 여자는 기쁜 나머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오른다. 그 모습에 피식 웃어 보이곤 다시금 심사를 이어갔다. 그러길 얼마간. 토미 김의 순서에 이르렀다. 그는 원래 12번이라서 번호순으로 따지면 일찌감치 심사를 봐야 했는데, 횡이 아닌 종으로 움직이다 보니 다소 늦게 순서가 온 것이다.
“음……. 이건 뭔가요? 혹시 라자냐인가요?”
“맞습니다. 라자냐입니다.”
미국에서 살다 왔다는데, 한국말이 유창하다. 그만큼 머리가 좋다는 걸까? 아무튼, 놀랍다. 주어진 재료로 라자냐를 만들어 내는 것도 놀랍지만, 겨우 20분 만에 그걸 해낸다는 게 더욱 놀랍기만 하다. 특히 라자냐가 오븐을 사용하는 요리인 만큼 어지간히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시도조차 하기 어려울 텐데. 그 어려운 요리를 토미 김은 해낸 것이다. 역시 급이 다르다는 걸까? 난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그가 만든 라자냐를 맛보았다. 나참, 맛을 보니…… 진짜 놀랍네. 이거 진짜 파랑 양파 그리고 마늘만 가지고 맛을 낸 거 맞아? 아무리 양념을 마음껏 이용해도 된다고 했다지만, 이건 좀 너무하는데? 후우, 이래서야 테스트의 의미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이런 심정은 나뿐만이 아니듯, 나와 함께 맛을 본 한진석이 감탄사를 연발한다.
“와! 이거 뭔가요? 와아! 파랑 양파만으로 진짜 이걸 만들었다고? 이건 그냥 팔아도 되겠는데요!”
나 역시 인정한다.
“맛있네요. 근데, 설마 비프 소스를 이용한 건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그냥 야채를 올리브유와 간장으로 볶아 라구 소스 맛을 내려고 시도했을 뿐입니다.”
탄성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미국 출신의 요리사가 간장을 이용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해서 만든 요리가 라구 소스 맛을 내는 것도 놀랍기만 하다. 나 혼자 있었으면 농담이 아니라 혀를 내둘렀을지도 모르겠다.
“합격입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토미 김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놀라거나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다음은 23번 참가자 차례군요.”
날 뒤따라온 한진석이 눈을 빛냈다.
“어? 이번엔 파전인가요?”
그 후로 꽤 오랫동안 음식을 맛보았고, 심사가 이어졌다. *** 심사가 끝나고 나서도 이종무 CP와 박신영 작가 그리고 신현정 PD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와아, 진짜 놀랍네요! 저걸로 어떻게 그런 요리들을 만들죠?”
특히 결혼 3년차임에도 자신은 여전히 신혼이라며 박박 우기는 자칭 새내기 주부 박신영 작가는 혀를 내둘렀다.
“파랑 양파, 마늘만으로 대체 몇 가지 요리를 만드는 거냐고! 아, 살짝 빈정 상하려고 하네. 세상엔 왜 이렇게 음식을 잘하는 사람이 많은 거냐고요!”
그녀가 투덜거릴 만도 하다. 80명의 참가자가 내놓은 요리는 무려 50종이 넘었으니까. 말이 좋아 50종이지, 재료가 네 가지밖에 없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이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이걸로 확정인가! 적어도 1회차 시청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신 피디! 오늘 수고 많았어.”
이종무 CP도 흡족한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신현정 PD를 치하하고 있었다.
“아뇨.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전부 서 셰프님 덕택이죠.”
“노노. 서 셰프님을 끌고 온 것도 피디님. 요리에 관해선 서 셰프님께 일임하자고 말씀하신 것도 피디님이잖아요. 그러니, 반쯤은 피디님 공이라고요.”
박신영 작가가 해맑게 웃으며 소리치자, 이종무 CP 역시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현정 PD는 어느새 시선을 돌려 저만치 서 있는 서진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심사가 끝난 뒤, 참가자들이 전부 빠져나간 스튜디오는 뒷정리에 정신이 없는 스텝들을 제외하곤 서진영과 한진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서진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신현정 PD가 조용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갔다. *** 한진석과 함께 오늘 촬영한 방송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 정말 고생하셨어요.”
신현정 PD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부터 그녀를 어려워하는 한진석이 눈치를 보다가 뒤로 빠지고.
“고생이랄 게 있나요. 맡은 일만 열심히 하는 거죠.”
신현정 피디가 대꾸 대신 고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불쑥 묻는다.
“요즘 하연이하고는 자주 만나세요?”
응?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의아한 표정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자, 신현정 피디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며칠 전 통화했는데, 목소리가 좀 안 좋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