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 2차 예선 (3) (156/204)

#156. 2차 예선 (3)2021.09.29.

그 누군가라는 건 당연히 탈락의 운명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었다. 여기엔 촬영 시작 전부터 제작진의 관심을 모았던 박순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버저가 울리자 누구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고, 또 누구는 낙심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속속들이 내 눈에 박혀 들어왔지만, 난 애써 외면했다. 지금의 난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29살의 대한민국 청년도, 삼한그룹 총수의 본가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고 있던 요리사 지망생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떤 이에겐 생애 처음 혹은 마지막으로 갖게 된 기회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냉철해질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이 오디션에 도전을 결심했다는 것 자체가 언제든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한 거니까. 사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그만이라는 말을 하기 무섭게 다들 휘핑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몇몇은 아쉬움이 그득 담긴 눈빛을 한 채로 스테인리스 볼과 휘핑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여러분께 주어진 시간은 10분입니다.”

한진석이 조용히 말하자, 그제야 비로소 뒤로 물러나는 이들. 나 역시 그들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박순철이 보였다. 낭패감에 물든 얼굴이다. 스튜디오 밖, 스텝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속으로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언제 왔는지 이종무 CP가 신현정 PD 옆에 서서 박순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알 만하다. 지금 이종무 CP를 비롯한 스텝들 중에 박순철이 떨어질 거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이들은 없으리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박순철은 눈앞에 놓인 결과물을 내려다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니까. 나와 눈이 마주친 이종무 CP가 눈짓으로 ‘어떻게든 안 되겠냐?’고 물어왔지만, 살짝 고개만 저어 보이곤 가만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장내를 울리는 발소리. 모두가 내게로 시선을 모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

“확인해 보도록 하죠.”

난 참가자 중 한 명 앞에 멈춰 서서 스테인리스 볼을 들어 올렸다.

“뒤집어서 머랭이 흘러내리지 않으면 합격입니다.”

그때까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던 이들조차 파리한 안색이 되어 날 바라본다. 그럴 수밖에. 아무리 거품을 일으켜서 점성을 높였다지만, 그래 봐야 달걀흰자다. 시간차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흘러내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다. 그럴 줄 알고 이미 시험해보았으니까. 혹시라도 몰라 직접 휘핑을 치고 머랭을 만들었더랬다. 뭐, 머릿속으로는 이미 흘러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튼,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기에 제자리에 선 채로 뒤집힌 스테인리스 볼을 들고 있었다. 자신의 것을 쳐다보는 참가자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나가며 쳐다본 바로는 제대로 된 머랭을 만들어 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머랭을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다.

“17번 참가자. 합격입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17번 참가자가 주먹을 말아쥐곤 기쁜 표정을 해 보인다.

“오오! 첫 번째 합격자가 나왔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한진석의 멘트가 이어지고. 그사이, 여기저기서 참가자들이 자신의 스테인리스 볼을 쥐고 뒤집고 있었다. 그렇게 떨리는 심정으로 볼을 뒤집느라 장내가 금방 소란스러워졌고, 얼마 후엔 사방에서 희비가 엇갈린 탄성과 탄식이 뒤섞여 들려왔다. 그중에서 한사람…… 토미 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태연한 얼굴로 스테인리스 볼을 뒤집더니, 당연히 머랭이 흘러내리지 않을 거라 믿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만큼이나 실력은 확실했다. 머랭은 볼 안에 떡하니 붙어서 좀처럼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피식 웃고는 시간을 체크했다. 참가자들이 빠짐없이 볼을 뒤집는 걸 확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정 없이 그러고 있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잘 처진 머랭이라도 오래 들고 있으면 흘러내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7번, 8번, 12번, 15번, 23번, 36번…… 합격입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아직까지도 머랭이 흘러내리지 않은 참가자들을 호명했다.

“……46번, 47번, 50번, 54번, 58번…… 61번.”

유수아의 앞에 이르러 그녀의 번호를 부르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수아가 번쩍 고개를 쳐들곤 눈을 빛냈다.

“합격입니다.”

조막만 한 주먹을 꽉 쥐고서 ‘좋았어!’라고 작게 말하는 그녀를 보곤 속으로 웃으며 돌아섰다. 그러곤 연이어 합격자들을 발표했다. 그중에는 내가 아는 이름도 하나 들어가 있었다. 다행이랄지 당연한 일일지, 한청 또한 살아남은 것이다. ***

“3번 카메라! 77번 참가자 잡아! 6번하고 8번 카메라는 48번 얼굴 클로즈업하고! 2번 지미집! 거기서 그냥 지나가면 어떡해! 떨어진 사람들 표정은 필요 없다는 거야!”

카메라 감독의 지시에 따라 VJ들이 뛰어다니고, 지미집 카메라가 스튜디오 안을 휘젓고 있었다.

“와아! 서 셰프, 카리스마 장난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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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짱을 낀 채 오디션을 지켜보고 있던 이종무 CP가 혀를 내두르자, 박신영 작가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저럴 줄 알았다니까요. 괜히 갓솁 갓솁 하는 게 아니래도.”

“그러게. 신 피디가 호언장담을 하길래 뭘 믿고 그러나 했더니만, 이제야 알겠네. 히야! 카메라 돌기 시작하니까, 사람이 저렇게 바뀌네!”

이종무 CP와 박신영 작가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들으며 신현정 PD는 스튜디오 안의 서진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때와는 또 다르다. 그때는 뭔가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인간미 넘치는 배려심 그리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잔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공감 능력이 두드러졌다면, 지금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 정도만 해도 기대 이상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시청자들의 반응 또한 나쁘지 않으리라. 흡족한 눈빛이 된 신현정 PD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스튜디오 안이 부산스러워진다. 물론 대본을 미리 봤던 그녀였기에 그 까닭은 이미 알고 있었다. 탈락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격려 차원에서 몇 마디 하고 여기서 내보는 걸 테지.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닌 장면이지만, 왜인지 기대가 됐다. 뭐랄까. 이 별거 아닌 장면에서 서진영이 또 한 번 특별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그 때문에 신현정 PD는 서진영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당연히 카메라 감독에게 주문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 셰프 집중 조명하고, 탈락자들 표정 클로즈업!”

스텝들도 이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번호가 불리지 않은 분들께서는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스튜디오에서 들려오는 서진영의 목소리.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탈락자들이 하나둘 걸어 나오는 게 보인다. 누군가는 분한 모습이 역력했고, 또 누군가는 북받치는 서글픔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은 서진영은 가만히 선 채로 묵묵히 맞이했다. 잠시 후 50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 스튜디오 앞쪽으로 모여들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좀 복잡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오디션에서 떨어진 상황에서도 참가자들은 나름 질서를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을 서진영이 한 명 한 명 쳐다보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쯤에서 한진석이 상황을 정리하며 멘트를 쳐야 하지만, 서진영이 나서자 군말 없이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였다.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는 걸 보곤 조용히 지켜보는 걸 택한 듯했다. 역시 MC 10년 경력의 베테랑이었다. 아무튼, 서진영의 조리복 상의에 달린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 억울하십니까?

“어? 저거 대본이랑 다른데?”

박신영 작가가 눈이 동그래져선 손가락으로 스튜디오 쪽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신현정 PD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촬영 중이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서진영이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 다들 말씀이 없으시군요. 그럼 이대로 끝내도 좋은 겁니까?

그제야 탈락자들이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 아뇨! 이대로는 억울합니다!

-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 흑, 다시 칠게요! 저, 머랭 잘 칠 수 있어요! 원래는 잘 치는데…… 긴장해서…… 흑!

- 제발요! 한 번 더 해보면 안 돼요?

그들의 목소리를 서진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들어주고 있었다. 그의 태도에서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라도 본 것일까. 탈락자들은 간절히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이들까지 합세해 한마디씩 보태다 보니 스튜디오 안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그럼에도 서진영은 제지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저 듣기만 할 뿐, 이렇다 할 행동도,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길 얼마간. 탈락자들의 간절한 호소로 인해 스튜디오가 한창 시끄러워졌을 때, 서진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애원하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방금까지 시장통 같던 장내가 고요해지고, 서진영이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 시작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룰은 간단합니다. 제가 테스트하고 통과하시면 합격입니다.

기대하던 말이 아니었던지, 누군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 떨어진 사람에게도, 붙은 사람에게도.

가차 없이 말을 잘라버리는 서진영. 하지만 표정은 전혀 냉혹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따스함이 느껴지는 눈길이었다. 그걸 느낀 건지, 방금 불만을 토로하려던 이들도 입을 다물고 서진영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바람을 서진영을 배반할 것인지. 별것도 아닌 상황을 조마조마한 상황으로 바꿔버린 그를 보면서 박신영 작가가 눈을 반짝이고 있을 때였다. 이종무 CP 역시도 마찬가지. 그는 서진영을 감탄 어린 눈길로 보면서 연신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겠는지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

“저 친구! 방송을 알아!”

그런 그를 박신영 작가가 곱게 흘겨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좀 들어보자고요.”

“알았어, 알았어.”

이종무 CP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동안에도 서진영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공정한 기회였습니다. 그렇기에 결과를 번복할 수는 없습니다.

웅성거리는 탈락자들. 하지만 서진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만약 여기서 여러분이 안타까워 말을 바꾼다면, 최선을 다해 승부에 임하고 그 결과 합격하신 분들에겐 공정치 못한 심사가 되고 말 테니까요.

납득할 만한 얘기였기에 아까처럼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수긍한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들 모두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은 오늘 본 오디션에 많은 걸 걸고 있었을 터이기에.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서진영의 얘기는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은 2회차 예선에서 탈락하셨습니다.

명료한 선언에 탈락자들의 어깨가 한층 더 내려갔다. 그런 그들을 한차례 둘러보던 서진영이 스튜디오 밖을 향해 시선을 던진 것도 그때였다.

“어? 뭔가 할 말이 있나 본데요?”

박신영 작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신현정 PD는 서진영의 눈짓을 통해 모종의 신호를 캐치했다. 그녀는 재빨리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잠깐, 쉬었다 갈게요.”

  *** 한동안 쉬었던 촬영이 재개된 것은 서진영이 스튜디오를 벗어난 지 30분 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탈락자들이 결정되었다. 서진영이 말했던 것처럼 결과는 번복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촬영장을 벗어나는 탈락자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울기만 하던 이들도 하나같이 웃으며 방송국을 빠져나간 것이다.

“128명 중에서 48명이 떨어지고 현재 80명이 남았습니다.”

서진영의 목소리가 스튜디오 안을 울려 퍼지자, 남아 있던 참가자들이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오디션 시작 전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 이곳에 모였던 128명 중 64명만이 남아 3차 예선에 오를 수 있다고.

“자, 그럼 지금부터 두 번째 과제를 드리겠습니다.”

서진영의 말에 80명의 참가자들이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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