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2차 예선 (2)2021.09.26.
내가 등장하자, 안 그래도 큰 음악 소리가 배는 더 커졌다. 솔직히 말해서 고막이 터질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금세 작아졌다는 것. 팟! 팟! 팟! 여기저기서 조명이 켜지며, 어둠을 몰아내는가 싶더니 그사이 음악 소리가 확연히 줄어들다가 서서히 흩어졌다. 그제야 살 것 같은 표정이 된 나는 정면의 카메라를 응시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반갑습니다, 서 셰프님.”
한진석이 방금까지 진지하다고나 할까, 근엄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다소 딱딱한 어조로 얘기하던 것과는 달리 친근하기 이를 데 없는 말투로 인사를 건네오고 있었다.
“예. 저도 반갑네요.”
“흐흐흐, 이런 분위기 좋은데요? 꼭 무슨 마법사가 된 거 같기도 하고. 앞으로도 이렇게 가죠. 컨셉 좋네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한진석이 마음이 든다는 듯 얘기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서 셰프님과 함께 맛있는 도전을 시작할 분들을 만나볼까요?”
어느새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한진석이 이렇게 얘기하자, 우리가 바라보고 있던 공간…… 스튜디오의 전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텅! 텅! 텅! 텅! 텅……! 절묘한 음향효과와 함께 조명이 순차적으로 켜지며, 스튜디오 안에 오열 종대로 서 있던 참가자들이 보인다. 다들 화로와 조리대가 설치된 한 평 남짓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수가 무려 128개나 되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장엄해 보일 지경이다.
“와! 엄청납니다! 서 셰프님, 이런 거 보신 적 있으세요?”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없다. 하지만 여기서 내 컨셉은 다소 차갑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는 박신영 작가의 주문으로 인해 함부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이미 그걸 잘 알고 있던 한진석이 대답조차 듣지 않고 다음 멘트를 이어갔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CG가 아니라 실제 화면을 보고 계십니다. 저분들이 다 지난주에 실시한 오디션을 통과하신 분이란 사실, 알고 계신가요?”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뭐랄까. 꼭 눈 오는 날 뛰어다니는 강아지 같달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참가자들은 다들 잔뜩 굳은 모습으로 정면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얀색 조리복과 조리모, 그리고 가슴에 번호와 함께 이름이 적힌 명찰을 달고 있는 128명의 참가자들. 그들은 나무토막처럼 꼿꼿이 선 채로 단상 위의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지금 영상이 나가고 있습니다만, 지난주엔 진짜 엄청났죠. 2천 명이 넘는 분들이 오셨고, 무려 10대 1이 넘는……. 아, 제가 숫자가 약해서 계산이 잘 안 되네요. 예? 18대 1? 19대 1? 아, 몰라 몰라. 아무튼,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2차 예선에 오르신 분들입니다. 128명의 도전자들을 소개합니다!”
그의 외침과 함께 카메라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미집에 달린 다섯 대의 카메라에다 스튜디오 안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 그리고 열 명도 넘는 VJ들이 직접 들고 뛰는 카메라까지. 대충 헤아려도 서른 대가 넘어가는 카메라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스튜디오 안을 훑고 있었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굳어 있던 참가자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정말 대단한 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20년 전에 모 방송국에서 개그맨으로 데뷔하기 위해서 치렀던 오디션을 방불케 하는데요. 과연 오늘! 이분들 중에 몇 분이나 남아서…… 예? 이미 그건 결정되어 있다고요? 아, 이런! 그렇습니다. 64명! 딱 절반인 64명만 남아서 웃으며 이곳을 나설 수 있다고 하네요. 후우, 보는 제가 다 긴장될 지경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지, 한진석은 진짜로 긴장한 듯 손에서 배어나는 땀을 바지춤에 닦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닫지는 못하는 듯했다.
“서 셰프님. 오늘, 맛있는 도전을 시작할 분들께 한 말씀 해주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말문을 열었다. 조리복 상위에 붙어있는 마이크를 확인하며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요리사란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그간 피나는 노력을 경주해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처자식을, 혹은 남편을 위해 평생토록 칼질을 하고 국자를 들었을 분도 계실 겁니다. 어쩌면 나이가 비교적 어린 분들 중에선 이제껏 해오던 일들을 그만두고, 새롭게 자신의 인생을 걸어가고자 익숙하지 않은 칼을 드신 분들도 계시겠죠.”
내가 천천히 바라보며, 장내를 훑자 다들 긴장된 가운데에서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날 바라보는 걸 그만두지 않는다. 그런 그들과 일일이 시선을 교환하며 계속해서 얘기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십시오. 일 분, 일 초. 버저가 울릴 때까지 절대로 물러나지도 주저앉지도 마십시오. 이 시간, 이 공간은 오로지 여러분의 것이니까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음에도 어딘가에서 시작된 박수 소리는 어느 틈에 장내를 뒤덮었다.
“워우, 짜릿합니다. 말씀만 들어도 뭔가 가슴속에서 불끈하고 올라오는 느낌이네요. 자, 그럼 시작하기에 앞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서 셰프와 함께하는 ‘맛있는 도전’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부터 얘기 드리겠습니다.”
다들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방금보다 한층 더 눈을 빛내는 모습에 속으로 웃음이 났다. 웃겨서? 그것도 아니면 가소로워서? 아니다. 진심으로 감격해서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 아니, 오히려 못한 처지였었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저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아마도 가슴속에선 활화산 같은 열기와 함께 머리가 뜨겁게 끓어올라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겠지. 그러니 기원한다. 누군가는 떨어지고, 또 누군가는 위로 올라가겠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설사 경연에서 탈락하더라도 오늘의 도전을 발판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그렇게 내가 조용히 마음속으로만 참가자들을 응원하는 동안에도 한진석은 살짝 흥분된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64명에서 32명이 되고 다시 16명이 되면, 2차 예선이 종료됩니다. 그때부터가 본선이라 할 수 있는데요. 여기 계신 서 셰프님의 지휘하에 8명씩 팀을 이뤄서 각기 레스토랑을 오픈하게 됩니다.”
레스토랑을 어떤 과정을 통해 오픈하게 되는지, 또 기간은 얼마인지, 그 결과 승부에서 이긴 팀에겐 어떤 포상이 주어지며, 최종적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어 승리한 이에겐 상금과 함께 어떤 혜택이 주어지게 될지를 설명하자, 다들 눈에서 이글거리다 못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불태워버릴 듯한 눈빛들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네. 이정도로 의욕적이라면 뭔들 못할까. 기꺼운 마음에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을 때, 한진석이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룰은 간단합니다. 서 셰프님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십시오.”
그러곤 내게로 주도권을 넘기는 한진석. 어떻게 보면 규칙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웃기게도 여기선 정말 그게 다다. 내가 곧 규칙이었다. 경연을 위한 테스트도 내가 낼 것이고, 승패를 결정짓는 것도 내가 할 것이며, 그 결과 판세를 갈음해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탈락의 고배를 건네는 것도 내가 될 터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직은 한 명의 요리사로선 부족하기만 한 내가 그처럼 절대적인 권한을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다. 내게는 아저씨가 준 칼이 있었고, 사모님으로부터 전수한 산나물과 장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며, 그간 혹독할 정도로 몰아붙이며 날 단련시켜준 김진호 셰프와 따스한 보살핌으로 내 앞길을 열어주신 고윤수 주방님도 계셨다. 그리고……. 나레이션. 천군만마와 같은 조력자가 있는 한, 나는 할 수 있다. 그렇게 믿으며 천천히 말했다.
“준비 부탁드립니다.”
길지 않은 얘기에 스텝들이 대거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 손에는 스테인리스 볼과 함께 열 개들이로 포장된 달걀이 들려있었으며, 얼마간의 설탕과 바닐라 에센스 또한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128명의 참가자들 앞에 놓인 조리대 위에 휘핑기가 놓였다.
“지금 각자 앞에 놓인 재료들로 머랭을 치시면 됩니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이 지난 뒤, 제대로 치지 못하신 분들은……. 안타깝지만, 탈락입니다. 아, 휘핑은 지금 가져다 놓은 거로 하시면 됩니다.”
자동이 아닌 수동. 즉 핸드 휘핑기로 하라는 얘기였다. 사실 머랭을 치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요즘은 대부분 자동 휘핑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손으로 직접 휘핑을 친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닐 터였다. 어디선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물론 기분 탓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여기 있는 참가자들 중 절반 이상은 실제로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난 단호하게 얘기했다.
“지금부터 십 분 드리겠습니다.”
삐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버저음이 들렸다. 그러자 참가자들 중 몇 명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펴보니 그중에는 한청과 유수아 또한 포함되어 있어, 한편으로는 안심이 된다. 흠, 이래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 건가.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 두 사람을 살피게 된다. 후우, 그러지 말아야지. 다들 목숨이라도 건듯 경연에 임할 텐데, 괜스레 두 사람에게 눈길을 주다가 나도 모르게 공정성을 잃게 된다면 모두에게 실례라 할 수 있으니까. 탁! 탁! 탁! 탁! 탁……! 휘핑기가 스테인리스 볼을 갈아내듯 쳐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기 시작했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달걀을 까서 흰자만 골라내고, 거기에 설탕과 바닐라 에센스까지 넣고서 열심히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 빠릅니다! 12번! 가장 먼저 휘핑기를 돌리기 시작했는데요. 저 정도 속도면 십 분 안에 충분히 머랭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합……. 아! 37번! 달걀이 깨지며 노른자까지 들어갔네요. 이를 어쩝니까! 당황하고 있습니다. 서두르다 보니 나온 실수인 듯한데요.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순서대로 차분하게 움직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추임새처럼 한진석이 돌아가는 상황을 중계하는 걸 들으며 나는 단상을 내려왔다. 그러곤 장내를 돌아다니며 살폈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끄는 건……. 12번……토미 김. 23번……이경진. 48번……박순철. 61번……유수아. 그리고 113번 한청. 이들 다섯 사람이었다. 이종무 CP가 참가했던 회의에서 거론된 이들로 조기에 탈락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의 방송을 이끌어나갈 이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재미 교포인 토미 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3대 요리학교 중 한 곳인 CIA 출신으로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그에 비해 박순철은 취사병 출신으로 어떻게 보면 흙수저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종무 CP의 주목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경진 아주머니는 주부였는데, 요리사 자격증 하나 따지 않았음에도 1차 오디션에서 박식한 지식과 능란하게 조리기구를 다뤄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
“5분! 지금 막 5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시간은 원래 빠르다. 조금만 딴생각을 해도 5분 정도는 후딱 지나가기 마련이다. 하물며 지금처럼 잔뜩 긴장한 채 초조한 심정으로 휘핑기를 돌리고 있을 때라면……. 정말이지 화살처럼 지나가 버리는 게 시간일 터다. 더구나 애초에 판단을 잘못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경우라면 아마 더하겠지. 난 박순철을 지나가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쯧, 처음부터 불안하더니만. 설탕을 너무 적게 넣었다. 아니, 설사 부족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좀 더 일찍 깨닫고 나중에라도 조금 더 넣으면 되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는 아직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눈치다. 원래 머랭을 칠 때 꼭 설탕을 넣을 필요는 없었다. 거품을 내는 데는 달걀흰자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쿠키를 굽기 위한 재료니 필요한 것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설탕이 넣으면 거품이 훨씬 빨리 그리고 많이 올라오기 때문이었다. 적정량은 달걀과의 비율, 1:1. 그보다 적으면 그만큼 시간이 더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박순철의 경우에는 1:1은 고사하고 1:0.5도 안 된다. 당연한 얘기만……. 시간만 많다면야 문제가 없으련만, 주어진 시간 안에 머랭을 만들기 힘들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7분이 지나는 시점에서도 머랭이 충분히 부풀어 오르지 않자 박순철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그를 비롯해 수십 명이 똥줄이 타들어 가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이, 10분이 흐르고 마침내 버저가 울렸다.
“그만!”
내 입에서는 누군가에겐 잔인하게 들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